뮤지컬 블라블라블라 - 내가 사랑한 뮤지컬 20
박돈규 지음 / 도서출판 숲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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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타이어를 갈았다. 마모가 심한 상태였다. 정비사는 리프트로 차체를 들어 올리고 헌 타이어 4개를 뺐다. 3~4년을 길에서 곧추선 채 하중을 견디며 달려온 바퀴가 처음으로 땅에 드러누웠다."

평범한 일상 에세이와도 같은 구절로 글은 시작된다. 그러나 사태를 담아낸 문장을 촘촘히 뜯어보면 예사롭지 않다. 3~4년을 줄곧 서 있던 바퀴가 비로소 누워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대목이 특히 그러하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땅에 누우면/당신도 나란히 나무 곁에 누워/눈보라가 되거나/한 소쿠리 비비새 울음이 된다.."

올해 참 오랜 만에 발간된 시집 <와온바다>에 수록된 곽재구의 <나무>라는 시의 마지막 행이다. 나무는 평생을 서서 살아왔으니 얼마나 고단했을까? 죽어서 통나무가 되어야 비로소 안식의 시간을 갖는다. 우리네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아, 그러므로 당신도 만사를 잊고 나무처럼 나무 곁에 누워보라고 시인은 권유한다.


"잘려나간 발톱처럼 낯설고 측은했다. 매끈한 새 타이어를 끼우고 정비소를 돌아 나오는데 산더미로 쌓인 폐타이어들이 보였다. 길의 끝이 무덤이다."

첫 인용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수만 킬로미터를 달렸을 타이어들의 길 위에서의 시간들, 그 길의 끝이 무덤이란다.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뮤지컬 캣츠는 정반대다. 무덤에서 길을 낸다."라고 받아침으로써, 그가 사랑한 뮤지컬 20편 가운데 하나인 <캣츠_왕의 익살, 광대의 기품>이라는 공연리뷰가 시작된다. 폐타이어는 뮤지컬 <캣츠>의 무대의 중요한 소품이면서 고양이들의 광장의 중심에 있다.


지은이 박돈규는 한 편의 뮤지컬을 소개하기 위해, 그 작품으로부터 선사받은 감동의 시간들을 스케치하기 위해 소소한 일상에서 소스를 끄집어낸다. 자나깨나 뮤지컬 생각을 하고 뮤지컬 공연에 빠져들고, 그럼에도 일간지 공연전문기자로서 매체가 요구하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고(苦)을 달게 받아들이는 필자, 스스로가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나를 중독시킨 뮤지컬에 대한 고백이다."라고 털어놓았는데, 그의 중독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를 무심코 뽑아낸 인용부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서문에서 그가 '사랑한 뮤지컬'에 대한 이야기, 곧 러브스토리를 엮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고백한다.


"뮤지컬 담당 기자는 직업적으로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취향을 드러낼 수도 없고 완전히 숨길 수도 없다. 기사와 나 사이의 긴장이다."

밥(노동)을 위해 써야 하므로 쓰고, 보아야 하므로 보는 공연은 때론 고역일 수 있다. 노동이 그 자체로 즐거움을 수 없는 것은 신문기자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시시푸스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삶, 해서 삶에 질리고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인간은 노동이 밥벌이 수단이면서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필자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을 때, 편견을 내려놓을 때, 감상이 편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뮤지컬'은 어쩌면 꼭 봐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알고보면 뮤지컬 담당기자(직업)는 늘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일하고 있다. 무대와 관객 사이에 있고 있어야 한다. 뮤지컬이라는 문화상품의 생산자와 소비자인 관객 사이에 있어야 한다. 다만 예를 들어 영화와 비교하자면 뮤지컬은 작품소개(기사)시에 '스포일러성' 기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뮤지컬의 스토리를 자세히 기사에서 다룬다고 해서, 사전에 읽은 관객들이 받는 감동은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면 좋은 작품은 설렁 그것이 영화라고 해도 '스토리가 사전에 알려진다고 해서 감동이 반감되는 경우는 아니어야 할 것이다. 무엇과 무엇 사이 또는 경계에 선 그는 개인적으로 뮤지컬에 중독된 애호가기에 괴롭다. 생각과 느낌 모두를 자신의 기사에 담아내지 못하는 것, 형식(틀, 프레임)에 갇힌 내용은 갑갑하였으리라.


앞서 소개한 시집에서 또 한 편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이 없는 날>에서 시인은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는 아픔을 노래한다. "생각한다/봄과 겨울 사이에/무슨 계절의 숨소리가 스며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과/싫어하는 것 사이에",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걱정한다. "또 무슨/ 병은 깊은지" 짠한 마음을 토로한다.  

이처럼 이 책 지은이는 뮤지컬 전문기자와 뮤지컬 애호가 사이에서 병이 깊어지는 것을 감지하면서 살아야 했다. 급기야 '형식'(기사)에게 반기를 든 그는 그간 일로써 썼고 쌓인 뮤지컬의 리뷰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리모델링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이 <뮤지컬 블라블라블라>다.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다. 아버지로서 딸에 대한 이야기를 곳곳에서 꺼내고, 국내외 곳곳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급기야 그가 사랑하는 뮤지컬과 뮤지컬을 만나는 일련의 과정은 기행수필로 질적 변화를 꾀하고, 그것은 성공적이다. 하여 <박돈규의 뮤지컬 오뒷세이아>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큼 기행수필집이 되고, 독자들은 부담없이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는 '내가 사랑한 뮤지컬 20'이란 부제에서 '사랑한'은 '사랑하는'이 되어야 한다.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질리기는 커녕 앞선 관람 때에는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들리는데도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이 들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좋은 뮤지컬이고, 중독은 바로 이 대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준비되었을 뿐 아니라 감동을 끌어내는 보편적인 법칙에 충실하면서 무대장치로, 노래로, 소소한 화제를 만들어내는 등 관객들을 현혹하는 일을 다반사로 하며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투자된 비용이 적지 않다. 해서 뮤지컬은 철저하게 '쇼 비지니스'이면서 '공연예술의 꽃'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신일 때라야 그들의 꿈꾸는 지속가능한 공연이 가능하다. 


한 편의 시집에서 참 마음에 드는 시 한편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9년 만인가, 오랜 만에 나온 곽재구의 시집에서, <사랑이 없는 날>이 내게는 그런 시였다. 특히,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도, 남과 북 사이도 아니고,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에"라는 구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경험했다. 이에 비하면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는 꽃잔치에 불과한 사족일 뿐이었다. 피아노학원과 세탁소 사이까지는 그렇고 그럴지만, 구체적인 상호(商號)에서 우리네 삶의 일상이 묻어있어서는 아니겠는가. 20개의 뮤지컬을 만나 사랑한 이야기에는 상자 기사 형식으로 뮤지컬 공연을 둘러싼 소중한 정보들이 양념처럼 겯들어져 있다. 역시 뮤지컬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그가 만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니아로서의 궁금증을 풀어헤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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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2-12-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재적소에, 한 편의 뮤지컬마다 국내 시인들의 시를 적절하게 인용하여 감칠맛이 나게하는데, 나의 리뷰도 그와 같이 써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