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 리뷰(알라딘)에서 용병에 가까운 크세노폰의 참전을 '원군' 나아가 '원정'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변론'을 진행하였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 당시 아테나이와 더불어 그리스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스파르테의 왕 아게실라우스도 이집트 용병으로 나아가 조국의 다른 전쟁을 위한 비용을 벌어야 했던 사례를 꺼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1:1 형식으로 비교하고 있어 '비교열전'으로도 불린다. 영웅전에서 아게실라오스(그리스)의 파트너는 폼페이우스(로마)였다. 비교열전이 그렇듯 비교 대상은 두 사람의 삶은 여러 면에서 닮아있고, 그렇게 비교하고 나니까 또 다른 점(대조점)들이 있더라, 해서 비교하는 글이 이어진다. 두 영웅들을 비교하는 글 말미에 플루타르크는 두 사람이 이집트에 간 이유를 언급한다. 폼페이우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어쩔수없이 이집트로 항로를 정했다. 그리고 아게실라오스는 보수를 받기 위해(어쩔수없이) 야만족의 장군에게 고용되어 이집트에 갔다. 그리고 용병으로의 소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이집트의 입장에서 동족인 그리스인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84세에 생을 마감하는 아게실라오스 왕이 죽음을 몇 해 앞두지 않은 노년에 벌인 일이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비교열전')에서 그를 폼페이우스와 비교했지만, 필자는 용병으로 나서면서까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던 아게실라오스의 모습에서 로마의 영웅, 대 카토(마루쿠스 카토)의 노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은 노년의 대 카토(로마) 대 아게실라오스(그리스) 에 대한 비교열전이다. 더불어 이 글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라는 책의 배경을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마르쿠스 카토는 키케로가 지은 <노년에 관하여>에서 주 대담자로 등장한다. 대담에 참석했을 때 그의 나이는 84세. 불과 1년 후면 죽게될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노년에 대한 오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불식시키는) 대 카토의 삶에 대한 성찰이 깃든 견해에 따르면 1년후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1년이란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대 카토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조국 로마의 안위를 위하여 쏟아낸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윤시내의 '열애') 애국심이다.
그렇다면 간명하게 마르쿠스 카토(일명 大 카토)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마르쿠스 카토(기원전234~149). 그는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다. 본래 성은 프리스쿠스였지만 재능이 뛰어나 '카토'라는 성을 얻었으며, 붉은 얼굴에 회색 눈을 하고 있었다.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정관, 감찰관 등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에스파냐 전쟁에 출정했으며 그리스에서 아시아 군을 몰아냈다.(동서문화사 플루타르크 영웅전) 이제 인물 됨됨이를 조명해보자. "(대 카토는) 사치에 물들기 전 옛 로마의 ‘도덕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검소한 생활, 꾸준한 체력 단련, 불굴의 정신력, 적극적인 정치활동에 힘입어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재정관, 조영관, 집정관을 거쳐 기원전 184년에는 감찰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최초의 라틴어 산문 작가로서 라틴 문학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막대하다."(숲출판사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의 소개) 대 카토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의 마지막 정치적 업적은 카르타고의 파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카르타고와 누마니아(지금의 동알레지와 튀니지 지방) 왕 맛시닛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카토는 분쟁원인 조사차 사절로 파견된다. 카토가 죽기 4년 전인 기원전 153년의 일이다. 마시닛사는 로마에 우호적이지만 페니키아의 식민시인 카르타고는 로마의 대 스키피오에게 패한 뒤(제2차 포이니 전쟁에서) 로마와 우호조약을 맺고 제국을 잃었으며 무거운 배상금을 물어야했다.
그런데 대 카토는 그들이 비참하게 몰락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전사가 득실대로 엄청난 부가 넘치고 각종 무기와 군수품이 가득하여"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며 저들이 곧 로마를 위협하겠구나 경각심을 갖게 된다. 서둘러 로마로 돌아온 카토는 카르타고의 누미디아인들과 분쟁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하다며 그들의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해서 화제가 다른 질문에 대답할 때에도 대 카토는 "내 생각에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앞세우고는 답변했을 정도라고 한다. 카르타고가 로마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는 못해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강하다고 판단한 것. 이렇게 대 카토는 카르타고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쟁을 부추켰다.
이쯤에서 대목에서 포이니 전쟁에 대해 정리가 필요하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에 걸쳐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이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시(植民市)이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불렀다. 로마인들은 원래 시켈리아(시칠리아, 당시 이 섬은 여러 문화가 뒤섞인 곳)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썼는데, 이 섬 일부 지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광범위한 제해권을 갖춘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었으며,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으나 카르타고 수준의 해군력이 없었다. (1)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 23년 동안의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였고,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고 막대한 전후 배상금을 부과한다. 제1차 전쟁 이후 6년간 로마는 팽창을 거듭하여 지중해 대부분을 장악한다.
(2)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리는데,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다. 기원전 218년에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에스파이나)의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때에 상당수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하나,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해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무찔렀다. 당시 한니발은 그 이름만으로도 로마인들을 공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할 정도였다.(범죄영화의 완벽한 구성을 갖추고 있는 걸작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양들의 침묵, 1991>에 등장하는 한니발 렉터 박사(Dr. Hannibal 'The Cannibal' Lecter: 안소니 홉킨스 분)의 이름도 이 전쟁의 주역이름을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는 일명 ‘카니발-식인종- 한니발’이라고 알려진 흉악범으로 죽인 사람의 살을 뜯어먹는 흉측한 수법으로 자기 환자 9명을 살해하고 정신 이상 범죄자 수감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플루타르크 영웅전 소개된다)의 지연 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한다. 양(兩) 군은 이탈리아 말고도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도 격돌했으나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한다. 특히,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가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여 전쟁이 끝났다.
일명 '대 스키피오'로 불리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기원전 236~183년)는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꼽힌다. 전쟁사에서 다시 보기 힘든 명장끼리의 대결로 유명한 자마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찔러 승리를 거둠으로써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한다. 바로 이 때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라는 의미에서 그 유명한 별칭인 '아프리카누스'가 그에게 붙여졌다. 그는 적지에서 제2차 포이니 전쟁을 치르며 아프리카, 그리스, 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혀 지리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창시자'로. 문화적으로는 '로마문명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로마 외교술의 근본원칙인 '패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쳐, 세계 공동체의 실현을 추구하는 세계정치가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커다란 성취를 이룬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의 정치적 파벌과 질투의 희생양이 된다. 그는 결국 탄핵을 당해 망명과 같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배은망덕한 조국이며, 그대는 내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삶을 마감했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에서 바로 이 스키피오도 다뤘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B.H.리델하트 지음, 사이 펴냄)라는 번역서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아홉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국을 등진 뒤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36년 만에 조국 카르타고로 돌아와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스키피오에게 패배한 한니발의 인생이 너무도 극적이었기에 사람들은 스키피오의 승리를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이는 끈질긴 성취보다는 극적인 패망을 미화시키는 인간의 성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키피오를 평가하는 <역사의 천칭>은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 마루쿠스 카토 얘기를 하다가 대 스키피오 얘기를 하고 있지만, 둘은 정적 관계였다(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어쨌거나 대 카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찰한 결과 카르타고가 다시금 도발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전쟁준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그리스로마에세이>,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를 노년에 이른 대 카토(가 주로 얘기하고)와 두 젊은이가 말씀을 듣는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다.
두 젊은이 가운데 하나가 일명 소 스키피오(기원전 185년경~129년)인데, 앞서 2차포이니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이다. 그런데 소 스피피오는 대 스키피오의 친 손자는 아니고,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파울루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대 스키피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입양된 상태였다. 그리고 소 스키피오의 친누이는 대 카토의 며느리가 된다. 그러니까 사돈 관계인 이들이 등장하는 바로 '노년' 대담에서 대 카토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한다. 우선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를.
"나는 병사로서, 연대장으로서, 장군으로서, 사령관으로서 온갖 전쟁을 수행했지만 지금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으니 자네들에게는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 하지만 지금도 나는 어떤 전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원로원에 조언을 해주고 있다네. 오래전부터 음모를 꾸미고 있는 카르타고에 나는 미리 앞질러 선전포고를 해주고 있다네. 그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나는 그 도시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을걸세."(18절) 그리고 소 스키피오에게 할어버지의 유지를 받들라는 예언을 한다. "스키피오여, 자네가 조부님의 위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불사의 신들께서는 승리를 유보해두시기를!"(18절) 실제로 카토가 죽기 직전인 149년에 시작된 제3차 포이니 전쟁에서 소 스키피오는 과연 카르타고 시를 함락하고 파괴한다. 바로 이 대담에서의 희망사항이 실제로 이뤄진 것. 대 카토는 전쟁의 위험성을 진단하고 대비하도록 하였고, 소 스키피오는 실제 그 전쟁에 출정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이므로, 노회한 대 카토의 안목이 훌륭하다. 율곡 이이 선생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며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던 예지와 비교해볼만한 것이리라.
물론 제3차 포이니전쟁은 앞서 언급했듯이 새로 집권한 카르타고의 군사세력이 많은 로마인에게 불안을 조성하자, 급기야 기원전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가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한다. 싹을 밟아버리기 위해, 로마는 전쟁을 유도한 것. 카르타고는 이 요구를 묵살하여 세 번째 전쟁에 돌입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성전을 벌였다. 카르타고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활의 시위로 쓰게 할만큼 거세게 저항했으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소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2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폐허로 만들었다.
마르쿠스 카토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는 순간까지 조국 로마의 평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여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한 나라의 진정한 원로의 모습을 보여준 대 카토에 비교될만한 그리스인을 꼽으라면 단연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이리라. 그는 "당시 그리스 최고의 인물로서 뛰어난 왕이자 장군이었다.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전의 그가 거둔 화려한 전력은 생략하자. 바야흐로 팔십 세가 넘은 이 양반은 말년에 '메세네라는 작은 땅덩어리라도 손에 넣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전쟁 경비가 모자라 시민과 친구들에게 경비를 빌린다. 쉽지 않다. 급기야 이집트의 왕 타코스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전쟁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용병으로 출전한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당시의 숱한 반대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장군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위대한 그가, 이집트의 한 야만인 우두머리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은 추태다. 세상의 평가가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타코스가 보낸 돈을 받아 용병을 모집한다. 그리고 그 병력으로 함대를 구성한 뒤-페르시아 원정 때처럼 30명의 스파르테 장군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집트로 출항했다.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늙은 장군(왕)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의 속마음(믿음)을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읽고 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자기 자신만의 명예가 아나라 나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집 안에 틀어박혀 죽는 날만 기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앞서 <노년에 관하여>의 주 대담자인 대 카토 주장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대 카토는 잘 나가는 로마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아게실라오스는 꺼져가는 국운에 불씨라도 되기 위해, 갖은 반대와 수모를 견뎌내는 노년의 왕이었다. 누가 더 위대하다고 해야할까, 80대 중반까지는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장수한 경우인데, 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참으로 애틋하고 눈시울이 젖게 한다.
18대 대통령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야권 후보단일화를 '압박하시던' 원로들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노인들 대다수는 여권지지"와 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가슴이 아프다. 지난 삶의 굴곡 너무 컸으리라. 그 얼룩은 트마우마가 되어 무너뜨릴 수 없는 벽으로 우쭉 서 있는 것이리라. 미래로 가는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상당수라고 선거전 얘기는 씁쓸하다. 그런 노년들을 비판하는 지금의 젊은 우리들은 나라와 민족을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행에 옮기는, 대 카토와 아게실리우스 왕 같은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