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 / 크라튈로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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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 부제는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인데, 주제를 잘 드러내 준다. 일부 학자들은 이 대화편의 주제를 '언어의 기원'에 대한 것으로 보는데, 이는 부수적인 논의거리일 따름이다. 이 대화편에서는 '이름'의 사례로 주로 고유명사와 일반명사를 예시하지만, 형용사들에, 심지어 동사들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제이북스 옮긴이들(『크라튈로스』,김인곤, 이기백, 2007)은 작품해설에서 때문에 '이름'을 외연이 넓은 '낱말'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이 대화편의 주제는 이름이 (1)'있는 것들' 각각에 자연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2)합의나 관습에 의해서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크라튈로스는 '자연주의'(1)라 불리는 입장에 서고, 헤르모게네스는 ‘규약주의’(2)라 불리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를 풀어서 설명해보자.
또 하나의 원전번역 『이온/크라튈로스』(,천병희, 숲, 2014)의 책 정보에 따라 좀 더 풀어서 설명해보자, <크라튈로스>는 사물들의 이름이 어떻게 붙여지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물은 자연의 본성에 따라 저마다 올바른 이름이 본래 따로 정해져 있으며, 그에 맞지 않다면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크라튈로스의 견해다. 앞서 ‘자연주의’라 했다. 이와 달리 이름은 그 대상의 본질과 상관없이 사회적 합의와 관습으로 만들어진다, 헤르모게네스의 주장으로 앞서 '규약주의'라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일종의 약속이라는 얘기다.
말과 언어의 근간이 되는 이름(낱말)에 대해, 왜 그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느냐와 관련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일이 처음부터 숨이 턱 막힌다. 이런 상반된 주장을 가진 크라튈로스와 헤르모게네스, 둘 사이에서 중재하거나 논박하면서 사물의 이름에 관한 철학을 다듬는 이가 소크라테스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왔다. 그런데 앞서 부제를 소개할 때 '이름의 올바름'이란 말부터가 불편했다. 그렇다고, '이름에 관하여'라고 할 수도 없으니, '올바름'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해야 한다. 자세한 해설을 수록한 이제이북스의 작품해설에는 이를 '어떤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 되게 해 주는 것(1)' 또한 올바른 이름을 판별하는 기준, 곧 '올바른 이름의 기준(2)'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이 대화편의 부제는 전자에 따르면 ''어떤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 되게 해주는 것에 관하여'가 된다. 언어에 관해 논한 최고(最古)의, 주용한 문헌들 중 하나답게 쉽지 않다. 어쨌든 앞서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의만이라도 볼 수 없다고 하였거니와 철학의 심오한 분야에까지 논의는 깊어지고 있다. 1)인식론적 문제, 2)존재론적 문제, 여기에 3)언어학의 문제까지 아우르는 플라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다, 이제이북스(작품해설)에는, 대화편 초반부에 소개되는 두 상반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먼저 크라튈로스의 견해다.
1)있는 것들 각각에는 이름의 올바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객관적으로) 
2)이름은 사람들이 합의하고서 붙이는 것이 아니다.(규약주의가 아님)
3)이름의 올바름은 본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 사람과 이민족 사람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것이다.(보편적으로)

이에 헤르모게네스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모두 부정한다.
1)이름의 올바름은 합의와 동의에 의해 정해진다.(자연주의가 아님) 
2)누군가가 어떤 것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그것은 올바른 이름이다.
3)어떤 이름도 각각의 것에 본래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규칙과 관습에 의해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규약주의에 입각한 주장 중 2)번은 틀을 벗어난 것처럼 생각된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는 입장'이 좀 그렇지 않은가! 자의(恣意)적인 이름붙이기까지 포함해야 한다니…….  그러나 이 대화편은 '자기 자신과의 합의'도 고려한다(435a), 곧 규약의 범위를 넓게 잡을 수도 있다고 하므로, 그렇게 틀인 주장이 아닐 수 있다. (천병희의 번역 해당 부분을 보자.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자네와 합의를 한 것이고, 이름이 올바름은 자네에게는 합의의 문제가 되었네.’ …… 관습은 닯은 이름들 뿐 아니라 닮지 않은 이름들도 사물들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으니까. 435a에서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를 논박하고 있다. 논박 과정에서 크라튈로스가 헤르모게네스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크라튈로스의 견해를 지지하나,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를 논박한 다음,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적 견해도 논박하여 이론을 정리해간다.
이제 훌쩍 건너뛰어, 거의 결론 부분을 살펴보자.

 

"소크라테스: 잠깐만! 잘 지어진 이름들은 이름 지어진 사물들을 닮았으며, 그래서 그런 사물들의 상(像)이라는 데에 우리는 누차 동의하지 않았나?
크라튈로스: 그랬지요.
소크라테스: 만약 이름들을 통해서도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 있고, 사물들 자체를 통해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도 있다면, 어느 쪽 배움이 더 훌륭하고 명료할까? 상(像)에서 상 자체가 훌륭한 모방물인지 배우고 그것이 모방하는 진리를 배우는 쪽인가, 아니면 진리에서 진리 자체를 배우고 진리의 상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배우는 쪽인가?
크라튈로스: 진리에서 배우는 것이 더 좋을 수밖에 없겠지요.
소크라테스: 사물들에 관해 어떤 방법으로 배우고 알아내야 하느냐는 어쩌면 나와 자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인 것 같네. 그러니 우리는 사물들을 통해 그렇게 하기보다는 사물들 자체를 통해 그렇게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걸세. 439a-b, 175~176, 천병희)"

 

앞서, 이 대화편은 3)언어학의 문제는 기본이고, 인식론적 문제, 존재론적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논의의 출발범에서와는 논점이 달라져 있을뿐더러 길이가 달라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물(사태)을 무엇이라고 부르는 '이름'에 대한 논의에서 '상(像)에서 상 자체'란 말이 등장하고, '모방'을 거론한다. 때문에 이 대화편의 집필시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일단 대표적인 중기 대화편인 『국가』의 유명한 논의(동굴의 비유)를 떠올려보라.
이제이북스(작품해설)에 따르면, <크리튈로스는 중기 대화편의 측면뿐만 아니라 후기 대화편의 측면도 갖고 있는데, 세들리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 곧 "플라톤이 후기(말년)에 이 대화편의 초판을 수정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유력한 해석이란다. 이제 앞서 인용을 좀 더 살펴보자.

1)상(像)에서 상 자체가 훌륭한 모방물인지 배우고 그것이 모방하는 진리를 배우는 쪽인가,
2)아니면 진리에서 진리 자체를 배우고 진리의 상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배우는 쪽인가?

이에 앞선 선택지를 정리하면
1)만약 이름들을 통해서도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 있다.
2)사물들 자체를 통해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도 있다.

(아래) 1)과 2) 가운데, 어느 쪽 배움이 더 훌륭하고 명료할까?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이 선택지를 부연한 것이 앞서 (위)1)과 2)로 정리한 것이다. '상(像)'은 곧 이름(낱말)을 말한다.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모방한 상(象)처럼, 사물(사태) 그 자체를 지시하고 그에 대입하는 이름이 있는 것.

"이름의 한계: 아무리 적절하고 적합하며 훌륭한 그에 걸맞은 이름(象)이라도

그 사물 자체를 오롯이 대치(代置)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로 읽혀"

A라는 사물의 생김새나 쓸모 등을 고려하여 그 [A]라는 이름을 붙였다. 누가 봐조 [A]라는 이름(을 통해)으로 사물 A를 떠올릴 수 있고, 사물 A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이러니러한 A라는 사물(사태, 현상)를 [A]라고 부르기로 하여 [A]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 규약주의척인 측면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위 인용(439a-b)을 달리 얘기하면(또 다른 비유를 하기가 좀 그렇지만)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는 불교의 『능엄경』의 유명한 비유가 떠오른다. 손가락 끝이 ‘이름’이고, ‘달’은 이름이 지칭하는 ‘사물 그 자체(진리 자체)’가 된다.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 끝을 보고 달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아무리 적절하고 적합하며 훌륭한 그에 걸맞은 이름(象)이라고 해도 그 사물 자체를 오롯이 대치(代置)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로 읽힌다.
우선은 사물들의 이름이 어떻게 붙여지는지에 관한 두 견해, '자연주의(크라튈로스) VS '규약주의'(헤르모게네스)' 두 견해를 논박하는 소크라테스의 논박 과정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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