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은 쓰리지만 겉으론 조심조심 국보급 백자 달항아리를 다루듯, 경상우수사 배설의 동태와 심기를 관리하며 열두 척의 배를 '안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인수하는데 노심초사하는 충무공 이순신의 마음과 행보, 당면한 한반도 평화도 이처럼.. 쓰라린 칠천량해전 대패에서 명량해전의 달콤한 승리까지, 『난중일기』 <정유년Ⅰ>을 새롭게 읽었다. 4월 1일에 시작, 10월 8일까지. 한 번의 대패와 한 번의 대승을 포함하는 이날들의 기록이다. 두 해전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극적인 전환점. 플롯의 초고급인 급반전이랄까? 마음이 분주하시면 후반부 인용만을 읽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필사 수준으로 입력한 깨알같은 인용과 정리에 보물이 숨어 있다는..<필자>  

‘상유십이(尙有十二)’,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는 『이충무공전서』 중 이분李芬의 「행록」이 그 출처다. 이충무공문서(전집)에서는 『난중일기』(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의 일들)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어쨌든 ‘장계’에서 충무공은 수군을 재건해야 하며, 그 길만이 또 한 차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 방법임을, 왕에게 읍소한다. 그는 이 장계를 언제 어디에서 쓴 것일까, 『난중일기』 <정유년Ⅰ>에서  작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충무공의 뜻대로 명량해전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데, 이 유명한 장계는 치열한 해전의 승리를 통해 스스로 결재했다고 할까. 그만큼 수군 재건과 응전에 관한 왕과 중신들의 의지는 흔들리고 있었다. 필자는 ‘열두 척의 배’가 충무공 자신에게, 조선 수군에, 그리고 조선에 어떤 의미인지를 텍스트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사실 이 글은 이어질 <서사시 『일리아스』 속 ‘열두 척의 배’들>에 대한 머리말에서 길어졌음을 밝힌다). 

 

‘상유십이(尙有十二)’, 치열한 해전의 승리를 통해 ‘스스로 결재한’ 장계
인터넷 사전 기록을 보자. "명량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척 이상을 격퇴한 해전이었."(백과) 12척이 아니라 13척이다. 그러나 일본 수군에 대해서는 '130척 이상'이라고 하여 의견의 분분함을 반영한다. 국어사전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명량에서 왜선(倭船)을 쳐부순 싸움. 10여 척의 전선(戰船)으로 적 함대 133척을 맞아 싸워, 적국의 배 31척을 격파하여 크게 이겼다."고 이 전쟁을 정의한다. '10여 척'이라고 한 발 물러서면서, 적 함대는 '133척'이라고 명시한다. 사실 이미 관용구처럼 쓰는, '상유십이(尙有十二)'는 충무공이 직접 올린 장계에 따른 기록이니, 실제 전쟁에 투입된 전선이 12척이냐, 13척이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필자는 이 열두 척을 어떻게 충무공의 통제에 들어왔으며,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무너진 조선 수군을 충무공이 재건하는데, 어떻게 불씨 역할을 하는지를 살폈다. 거의 필사수준으로 입력하면서 해당 일기(<정유년Ⅰ>)를 읽었다. 소회를 직접 담고 있지는 않지만, 충무공이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수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던 듯하다.

 

12척 혹은 13척이냐는 중요하지 않아, 배설로부터 인수과정이 녹록치 않아 

대한 압축·정리하고 필요시 주석을 인용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면(이라고 하면 그렇지만) 관계를 고려함에도 스크롤 압박이 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대 최대영화 관객1위(누적 관객수 177,615,152명)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명량>(2014)은 배경쯤으로 참고하는 것으로 하자, ‘무료상영’까지 들어간 <극한직업>의 누적관객수가 16,258,132명 (2019.03.24.,)이라는데, <명량>이 1위자리를 고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쨌든 <트로이>라는 영화가 고전 『일리아스』를 제대로 읽는데, 도움이 되면서도 걸림돌이 되듯, 『난중일기』만을 충실히 살핀 결과라는 것(훗날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을 다시 강조한다. (해당 월일은 모두 음력이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 조선의 지휘관 원균의 거북선 세 척과

판옥선 100여 선 침몰, 수군 2만여 명 궤멸, 원균 사망."
실패한 전투에 대한 기록, 칠천량해전의 결과다. 그날 원균이 죽지 않고 1601년까지 살아있었다던가 하는 기록 등, 이처럼 간명한 이 기록에도 이의제기는 많지만 왜군의 급습에 조선 수군이 순식간에 무너진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 좀 색다르게 접근해보자. 『난중일기』에는 이 전투를 전후로 한 '날씨'가 맨 앞에 적혀 있는데, 조선의 운명이면서 충무공의 울분과 분노를 담은 마음지도 같아, 정리하면서 놀랐다. 그 무렵 충무공은 칠천량(거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경남 합천과 산청 사이로 추정)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설욕하는 결정적인 해전은, 그날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인 9월 16일에 이루어진다. 명량해전이다.

 

칠천량해전 전후 충무공의 일기, 사변을 바라보는 저자의 ‘마음지도’ 같아
삶은 늘 전쟁이다. 그런데 당시 전쟁은 생활이었다. 전투 현장 부근의 날씨를 통해, 칠천량해전 전후의 사정을 되짚어본다. 당시 충무공은 이 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머물렀고, 걱정스럽게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므로 다음을 『난중일기』에서 추출한 당시의 <날씨와 생활>이라고 하자. 충무공은 하루도 밀리지 않고 일기를 썼다. 사실이다. 또한 날씨를 거짓으로 적지 않았다. 역시 사실이다.

 

<7월> [14일]맑음, [15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16일](칠천량 해전 당일)비가 오다 개다 하면서 끝내 흐리고 맑지 않았다. [17일]비가 간간이 내렸다, [18일]맑음, [19일]종일 비가 내렸다, [20일]종일 비가 내렸다. [21일]맑음, [22일]맑음, [23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24일]비가 계속 내려 그치지 않았다, [25일]늦게 갬. [26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27일]종일 비가 내렸다. [28일]비가 내렸다, [29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8월> [1일]큰비가 와서 물이 불었다. [2일]잠시 갰다. [3일]맑음.


공교롭게도 (다음에 살피는)  하루하루 그날의 맑거나 흐르거나 쾌청하거나 하는 날씨와 당시 전황(충무공이 파악한 것이 아니라)을 받아들이는 조선인의 마음이 꼭 닮았다. 더구나 충무공은 가끔 꿈을 기록하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꿈을 꾼다. 일종의 전조인데, 걱정하는 마음,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7월 7일: 꿈에 원균이 나타남. 즐거운 기색인데 그 징조를 잘 모르겠다.(10일도 안 되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다) *8월 2일: 잠시 갰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8월 3일: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날들의 날씨와 칠천량해전 패배(전황)가 쓰라인 조선인의 마음이 조응
위 날씨 기록과 해당 일을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이제 『난중일기』를 자세히 살펴보자. <정유년Ⅰ>편은 4월 1일에 시작하여, 10월 8일에 끝난다. 한 번의 대패와 한 번의 대승을 포함하고 있는 날들의 기록이다. 내용이 결코 길지 않으나 이제 상당수는 '날씨'는 빼고 그 중 필요한 대목만 따왔으며, 주석이나 필자의 설명인 괄호 안에 처리했다. 먼저 감옥에서 풀려나 임지로 가는(권율 도원수가 머무는 순천 부근으로) 과정을 살핀다. 생략한 날이 많다. 

 

<4월> [1일] "맑음. 옥문(獄門)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여종 집에 이르니.. [3일]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4일] 오산, [5일]선산(先山)(현재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의)을 찾아 선친의 산소에 참배, [13일]어머님 마중하려고 바닷가의 길로 가다가, 어머님 부고를 접함. [19일]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길을 떠남. [26일] 구례현 도착. <5월> [28일]하동현에 이름. <6월> [2일]단계(丹溪: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에서 점심, 삼가(三嘉: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의 관가에 숙박, [4일]삼가를 떠나 오리쯤에 갈림길을 만남(한 길은 고을로, 다른 한 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십리쯤 더 가니 원수(권율)의 진이 보였다. [5일]점심을 먹고 도배를 함(당일 초계군수가 급히 찾아옴), [6일]잠자는 방을 다시 도배, 군관이 쉴 대청 두 칸을 만듦.

 

6월 4일 일기에 주목한다. '초계'는 지금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으로, 최계 변씨(卞氏)들의 본향이다. 주석에 따르면, 충무공 집안은 3대가 초계 변씨와 결혼했다. 할머니는 변함의 딸이고, 어머니는 변수림의 딸이며, 누이도 변기에게 출가했다. 얼마 전에 작고한 어머님과 할머니의 고향이 지척에 있다. '삼가'를 지나서 만난 갈림길(삼거리)에서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엿본다. 도원수 권율이 머물고 있는 곳은 순천인데, 합천, 산청, 진주 등 인접한 당시의 지명과 실제 위치를 고증한 자료는 적지 않으리라. 충무공이 거처로 정한 곳이 거제 곧 칠천량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만 해두자.

 

초계는 다산에게 강진 같은 돗, 삼가를 지나 삼거리에서 충무공은 무슨 생각을..
또한, 이즈음부터 '도배'를 하고, 군관들이 머물 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아. '발령대기' 상태이지만 근무를 시작했다. 또한 다산 18년의 귀양 때에 외가(해남 윤씨)의 지원을 받았듯이, 임시 머무는 곳이지만 이곳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본향인 점, 덕분에 충무공이 고단한 심신을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된 듯하다. 이곳에 머물며, 권율의 종사관 등을 통해 전황을 살피고, 칠천량해전 직후까지 머문다.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전선의 어두운 소식이 들려온다. 주로 원균과 관련된 소식들이다.

 

<6월> [11일]한산도와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 씀. [12일]이른 아침에 종 경과 종 인을 한산도 진으로 보냄(수신인 중에는 경상 수사(배설), 녹도 만호(송영종), 거제 현령(안위) 등이 보임), [17일]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많이 말함. [19일]진에 이르러 원수와 황 종사관을 만남. '원수는 원균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데'(우려가 가득함), [25일]황 종사관이 와서 만나고는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였다. [27일]늦게 황여일(황 종사관에 대한 호칭이 달라지고 있다)이 와서 만나 한참 동안 이야기함. <7월> [7일]꿈에 원균이 나타남. 즐거운 기색인데 그 징조를 잘 모르겠다. [10일]황 종사관(여일)이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14일]황 종사관은 사람을 보내, 전황이 담긴 첩보를 보내와 공유함. "7일 왜선 오백여 척이 부산을 드나들고, 9일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두모포에 표류하여 대었고, 일곱 척은 간 곳이 없었다.", 달려가 점호 중인 황 종사관을 만남. [15일]우리 수군 이십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음. [16일]저녁에 7월 4일~6일의 해전에 참여했다가 단신으로 살아온 사노에게 전쟁 소식을 생생하게 전해 들음(전투가 벌어진 당일에 10여 일 전의 전황을 참전자에게 듣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수군에 있었는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또다시 가망이 없을 것이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18일]칠천량 패배 소식을 접함. 해안지방을 살피러 가겠다고 원수와 상의하고,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름. [21일]노량에서 거제 현령(안위)와 영등포 만호(조계종) 등 여남은 명을 만나, 자세한 소식을 듣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앞서 '배설'에 대한 언급은 두 번. 이후 기록을 읽는데도 그의 등장에 주목한다.

<7월> [22일]맑음. 아침에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아마도 이때 에 12척의 배에 대한 얘기와 충무공의 당부가 있었을 것임. 후주는 1597년, <선조실록> 30년 7월 22일 기록 중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 안골의 만호 등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많은 배들이 불에 타고 무수한 왜선은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고 소개한다.) [26일]정개산성 밑에 있는 송정 아래로 가서 황종사관 및 진주 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실질적인 대책회의로 보임. 도원수 권율의 뜻을 반영한) [29일]원수가 보낸 군사는 모두 말이 없고 활과 화살도 없어 쓸모가 없었다. 매우 한탄스러웠다. <8월> [2일]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3일]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4일]압록강원에 이르러 점심(압록은 보성강이 섬진강과 만나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 압록리), 오후에 고성고을 숙박. [6일]옥과 →[7일]곡성 강정(현 곡성 목사동면) →[8일]부유창(순천 주암면 창촌'을 거쳐 순천부 관사) →[9일]낙안→보성 조양창(보성면 조성리)까지 이동.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교서를 받은 이후(8월 3일) 충무공의 행보가 빨라진다, 우수영(전남 해남)으로 가면서 전투 준비를 하는 것. 무엇보다 12척의 전선을 인수하는 일이 급하다. 일단 보성군 조성면에 머무르며, 장계를 쓰고, 휘하의 장군들을 만나는 등 정비한다.

 

<8월> [12일]맑음. 장계의 초안을 잡았다. 그대로 묵었다. 거제 현령(안위)과 발포 만호(소계남)가 와서 만났다."(여기에서 '열두 척의 배' 관련 장계를 쓰기 시작, '삼도통제사'를 겸하는 직책을 수행 중이므로, 휘하의 장수들이 집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임) [13일]맑음. 거제 현령과 발포 만호가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일]비가 계속 오가다 늦게 맑게 갰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8월 7일에 성첩한 공문이었다.(영의정 유성룡이 보냄, 곧바로 답장) [17일]맑음. 일찍 아침 식사 후에 곧장 장흥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점심 후에 군영구미(軍營仇未)로 가니, 온 경내가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백사정'은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로 추정, '군영구미'는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로 추정. 일설에 '군영구미'는 1457년 수군만호진을 설치했던 곳, 현재 보성군 회천면 진일리에 소재한 군학(群鶴)마을, '백사정'은 회천명 벽교리에 소재한 명교해수욕장 일대라고 함)
[18일]맑음. 회령포(會寧浦)에 갔더니, 수사 배설이 배 멀미를 핑계 대므로 만나지 않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충무공 이곳에서 배를 인수하여, 우수영으로 떠날 계획인 듯, '회령포'는 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이곳에서 열두 척의 배의 정비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칠천량 이후 한 달이 흘렀다. '회령포에서 시작된 열두척의 기적!'이라는 주제를 내거는 등 해마다 9~10월, 장흥 회진항에서는 관련 축제가 열린다, 작고한 이청준 작가, 작가 한강의 아버지로 젊은이들에게는 알려진 한승원 작가의 고향마을이다. 이청준 원작 소설과 영화 <천년학>의 배경이기도 하다)
[19일]맑음.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배설은 교서를 위하여 지영(祗迎)하여 절하지 않았다. 그 능멸하고 오만한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그의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지영'은 공경하여 맞이한다는 뜻. 이날 비로소 충무공은 12척의 배를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수사 배설의 머뭇거림이 심상치 않다. 왜 그러는 것일까? 차마 수하 장수를 욕보일 수는 없고, 그의 부하에게 곤장을 내리는 마음을 편찮아 보인다.)

 

회령포(장흥 회진)에서 한 달 만에 무사히 12척의 전선을 인수

이후 배설과 관련된 '부분' 위주로 살핀다. 전후 과정은 영화 <명량>를 떠올려도 좋고, 후반부는 오늘날 이름난 포구기행의 여행지들이기도 한데(낚시 프로그램에 얼마나 자주 나오나), 충무공이 항해한 동선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 8월 27일, 해남 어란포에 머물 때다. 이미 12척의 배와 장수들이 이곳에 집결했고, 가끔 교전이 이루어진다.

 

<8월> [28일]맑음.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 않게 들어와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피하려고 하니, 경산 수사(배설)가 피하여 후퇴하려고 하였다. 나는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지휘하며 뒤쫓게 하니, 적선들이 물러갔다. 갈두(葛頭)까지 쫓아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는 장도(獐島)에 옮겨 머물렀다. [29일]맑음. 아침에 벽파진(碧波津)으로 건너갔다.('벽파진'은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9월> [2일]맑음. 정자에 내려가 앉았는데, 포작 전세가 제주에서 와서 인사했다. 이날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벽파정은 최근에 복원되었다. 이렇게 충무공과 수사 배설과의 인연은 끝난다) [14일]맑았으나 북풍이 거세게 불었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말하기를(이 첩보에 따라, 먼저 우수영 부근으로 전령선을 보내 피란민들을 이동하게 한다) [15일]맑음. 밀물이 들었다. 여러 배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들어가 거기서 머물렀다. 밤에 꿈에 이상한 징조가 많았다. [16일]맑음.(명량해전 당일) ……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우리를 에워싸던 적선 서른 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고 했으니 물이 빠져 배를 대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건너편 포(浦)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당사도로 옮겨서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

 

해전 당일 도착한 ‘'당사도'는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당사도(唐沙島)다. 8월 24일 회령포를 출발하여(마침내 수군의 지휘관으로 항해를 지휘한다), 해남 어란진에서 머물다가,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9월 15일 해전 하루 전에 해남 우수영으로 건너간다. 전투 준비가 벽파진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다만, 당일(9월 16일) 전투를 치르고, 곧장 신안군의 당사도까지 진을 물린다. 왜의 수군을 완파한 것은 아닐 것인데, 왜군들의 횡포(화풀이)는 오죽 했을까 싶다. 이후 <9월> [17일]여오을도(汝吾乙島:신안군 지도면 어의도) →[19일]칠산도(七山島:영광군 낙월면)→법성포 선창→홍룡곶(洪龍串:영광군 흥농읍 계마리), →[21일]고참도(古參島:부안군 위도면 위도) →[21일]고군산도(古群山島: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로 이동.

 

[해전 당일 신안군(당사도)까지 진을 물려, 왜군들의 횡포는 오죽 했을까?

이후 선유도에 며칠 머무르며, 대첩에 관한 장계를 작성하여 보낸다(27일). 10월 2일에는 아들 회가 고향으로 떠나고, 10월 3일 변산(邊山: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을 거쳐 법성포 선창에 이른다. 『난중일기』는 따로 요약할 것도 없이 길이도 짧고 문체도 간결하다. '난중(亂中)'인 상황에 쓴 일기이기에 그렇고, '9월 22일. 맑음'과 같이 날씨만 밝히고 끝맺은 날도 다수 있다. 이것을 '평화'라고 해야 할까? 병사들이 쉬어야 하고, 배들도 정비하고, 장계(보고서)도 써야 하니까, 특히, 9월 22일~25일, '맑음'이란 단어로 끝내는 일기에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많이 말하는 듯하다. 겨우 장례만 치르고(그것마저도 천행으로 '백의종군'의 길에서), 이후 그나마 고향 가까이(후방이긴 하지만) 항해한 데서는 아들 이순신의 죄책감과 회한이 느껴진다. 글머리에 인용한 충무공의 장계(이분의 「행록」)의 내용은 이러하다.

 

"임진년부터 5년, 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난중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유사시 보안 문제를 염두한 것처럼, 조심스럽다. 더구나 임금에게 보낸 장계를 일기에 수록할 수는 없는 일. '상유십이(尙有十二)'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 그리고 미신불사(微臣不死)다.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희망은 있다는 얘기다. 이제 비로소 영화 <명량>의 한 장면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저토록 몰염치한 임금한테 말입니까?"라고 재우쳐 묻는 아들 회에게 충무공은 대답한다.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쫓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임금이 아니고 말입니까?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잠시 고대 그리스로 가자. 펠론폰네소스전쟁 발발이 기정사실이 되었을 때,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 인들 앞에서 행한 연설이 있다. 그 유명한 전몰자를 위한 추도연설(전쟁사 Ⅱ권) 이전의 연설이다. 라케다이몬에서 온 마지막 사절단이 왔을 때다. 그들은 평화조약을 깬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명분을 쌓고 있다. 아테나이인들은 사절단을 물리고, 자기들끼리 대책을 논의하는데,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주목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은 집과 영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람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집과 영토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집과 영토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면, 여러분이 나가서 손수 여러분의 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여러분이 재산 때문에 펠로폰네소스인들에게 복종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보여주라고 권하고 싶소."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 143장(5)

 

“집과 영토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집과 영토를 만든다.”

 

스파르테는 육군이 워낙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차하면 우리 자신을 섬 주민으로 여기고 "영토와 집은 포기하되" (우리 아테나이는 해군이 주력이므로) "바다와 도시는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겨우' 열두 척이 아니라 '천행으로' 남은 '열두 척'의 배를 오롯이 인수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충무공의 마음을 읽었다. 그러나 어찌 배의 많고 적음이 문제이겠나. 누가 어떻게 지휘하느냐에 따라, 곧 전쟁의 승패는 사람의 문제임을 충무공의 장계는 은근히 주장하고 있으며, ‘압박’하고 있다. '열두 척의 전선'을 인수하기까지 충무공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신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경남우수사 근황과 심기를 살핀다. 정유년 8월 19일. 회령포에서 배설에게서 배를 인수하고는, 임금이 내린 교서에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구실로, 그의 부하에게 곤장형을 내리는 충무공의 지시, 충무공의 마음에서 배설은 그날 그 순간 사라진, 죽은 목숨인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 만지듯, 배설의 심기관리하며 12척 전선을 인수하는 충무공

광화문 광장의 이충무공의 동상과 세종대왕상의 위치를 옮기는 문제로 의견대립을 하는 모양이다. 중지를 모아야 하리라. 다만, 당신들의 유지를 기리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상징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충무공을 기리며 우선 추구할 것은 국가 안보다. 곧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갈등의 해결이 급선무인데, 이처럼 절호의 기회를 가로막는 남남갈등, 이를 부추김으로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일관하는 이들이 문제다. 두 분의 상징물이 어디에 있든, 한반도 냉전의 지속가능을 바라는 이들은 충무공의 유지를 거론할 자격이 없다. 이런 생각으로 『난중일기』를 일부나마 다시 읽었다. 속은 쓰리지만 겉으론 조심조심 백자 달항아리를 다루듯, 배설을 관리하며 열두 척의 배를 안전하게 인수하는 이충무공의 마음과 행보, 당면한 한반도 평화도 그렇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이어질 가제목 <서사시 『일리아스』 속 ‘열두 척의 배’들>에 대한 머리말을 쓰다가 길어진 글임을 다시 밝힙니다. 완성후 이 자리에 링크해놓을게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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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3-2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 지정, 크기 조절, 등으로 내용을 구분해야 하는 등,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일단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