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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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을 참고하여,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 트로이아 전쟁의 ‘속살’을 살핀다. 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이 전쟁을 왜 일어났을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는' 독자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제1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나아가 '인간의 분노'인데, 10년 전쟁 가운데, 본격전투는 나흘(4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서사시는 당대의 거대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 트로이아 전쟁의 ‘속살’을 살핀다.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 1권에서 27년 전쟁(기원전 431~404)의 역사를 쓰는데,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이전의 그리스 역사를 살핀다. 그리고 이 전쟁(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난 배경, 아니 '인간들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지'를 고찰한다.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만나는 트로이아 전쟁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 그렇게 긴 내용이 아니므로, 『일리아스』읽기 전후에 한 차례 읽는 것이 적잖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이 힘들다면, 지금 소개한 내용들만 살펴보 아도 윤곽을 잡을 수 있으리라.(아래 내용 정리에서 ‘아티케’는 아테나이로, 헬라스는 '그리스'로 보아도 될 것임. 인용은 <전쟁사>1권이며, 가령 출처 [1(3)]은 1권의 1장 2절이다.괄호 안은 필자의 설명이다.)

'땅이 기름진 곳일수록 주민이 자주 바뀌었다.'[1(3)] (그러나) '땅이 척박한 앗티케(아테나이인들이 사는) 지방에는 옛날부터 파쟁이 없었고, 늘 같은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1(4)] '전쟁이나 내분 때문에 나라에서 쫓겨난 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자들이 헬라스의 다른 지방에서, 안정된 공동체인 아테나이로 망명하여 그곳 시민이 되었고, 그 결과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여 앗티케 땅으로는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아테나이는 이오니아 지방에까지 이주민을 내보내야 했다.'[1(6)] (그러나) '헬라스 공동체는 허약하기도 하고 서로 교류가 없던 까닭에 트로이아 전쟁 이전에는 어떤 종류의 집단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힘을 모아 트로이아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전에 바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3(4)]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인간들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지'를 고찰한다.

헬라스에서 최초로 함대를 창건한 사람은 미노스다. 그는 지금 헬라스 해(에게 해)라고 부르는 바다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퀴클라데스 군도(에게 해의 남쪽)를 정복하여 대부분의 섬에 처음으로 식민시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그는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통치자로 앉힌다. 그는 또 세수(稅收) 확보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해적을 퇴치하고자 했다. 트로이아 전쟁 이전이다. 식민(植民)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식민시', '세수 확보', '해적 퇴치'와 같은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당황스럽다.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리스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아테나이가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헬라스 전체보다는 '앗티케(아테나이)'의 역사처럼 다가온다(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사람이다).  당시 해적질은 오늘날 강도짓과 같은 불법(부정) 행위라기보다는 일종의 경제활동으로 취급되었다. 섬에 있는 도시든 육지에 있는 도시든 '장기간' '지속된' 해적질 때문에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야했다. 해적들은 자기들끼리도 약탈하고, 항해 여부와 상관없이 해안지대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을 약탈했다. <전쟁사>를 좀 더 읽어보자. 
 '옛날에는 헬라스인들과 대륙(아시아)의 해안지대나 여러 섬에 살던 비(非) 헬라스인들이 배를 타고 자주 왕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해적질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해적질은 유력자들이 주도했는데,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고 백성들 중 약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 이것이 그들의 주된 생계수단이었다. 또한 이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영광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다.'[5(1)] '…… 그리고 옛 시인들도 바다에서 상륙하는 자들에게 으레 "당신들은 해적이오?"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데, 이는 질문 받는 자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질문하는 자들은 그런 행위를 비난받아 마땅한 짓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5(2)] 

 

 '식민시', '세수확보', '해적퇴치'와 같은 용어들의 자연스러움이 당황스럽다. 

"당신들은 해적이오?"와 관련하여 『오뒷세이아』 3권 초입이 자주 거론된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오뒷세우스)의 생사 여부를 수소문하려고 트로이아 원정의 전우를 찾아 퓔로스를 갔을 때다. 네스토르(왕)가 식사를 대접한 후 나그네들은 누구냐고 텔레마코스 일행에게 묻는 대목이다.

 

"그대들은 뉘시며 어디서부터 습한 바닷길을 항해해 이리로/ 오셨소? 그대들은 장사를 하려는 것이오? 마치 해적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을 안겨주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떠돌아다니듯이 말이오."  -『오뒷세이아』 3권 71~74행.

직업이 장사요? 해적이요? 네스토르는 경계하는 빛이 없을뿐더러 대수롭지 않게 묻고 있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째에 이른 시점이다(오뒷세우스가 집을 떠난 지 20년째). 다시 <전쟁사> 1권. 그리스인들이 트로이아 원정에 나서기까지의 얘기다. 식민시 개척과 보호와 관련 있는 진술이다. '그러나 미노스가 함대를 장악한 뒤로 해상교통이 활발해졌다. 그는 대부분의 섬에 식민시를 건설하고 악명 높은 해적들을 몰아냈다.'[8(2)] '그리하여 바닷가 주민은 부를 축적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약자들은 이익이 될 것 같아 강자들의 예속을 받아들였고, 강자들은 획득한 자본에 힘입어 작은 도시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8(3)] '이런 상태가 제법 오래 지속된 뒤에야 헬라스인들은 트로이아 원정길에 올랐다.'[8(4)]

 

직업이 장사요? 해적이요? 네스토르는 대수롭지 않게 묻고 있다.

앞서 살폈듯 척박한 땅(아티케)을 가진 아테나이인들은 곡물을 비롯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했다. 이런 물품들은 주로 헬레스폰토스해협(아시아 지역) 일원에서 왔는데, 배편을 이용했다. 헬레스폰토스해협은 바로 트로이아(트로아스)의 앞바다다. 일리아스』에는 트로아스가 얼마나 풍요로운 그리고 축복받은 땅인지 자세히 소개한다. 헬라스인들에게 트로이아는 한마디로 '탐나는', 원정할 가치가 충분한 나라였다. 또한 헬라스의 해양국가들은 헬레스폰토스해협 일대에 출몰하는 해적들을 소탕할 필요가 있다. 생필품 공급선이 안정화를 위해서다. 물론 '파리스의 선택'(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또 하나의 전쟁 원인을 살필 수 있다. 스파르테의 왕 메넬라오스(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동생)의 아내인 헬레네를 트로이아(파리스)로부터 되찾아오기 위한 ‘명예회복 전쟁’이다. 헬레네의 구혼자들이 스파르테의 왕 튄타레오스에게 맹세했다. 까닭에 그리스 주요 국가들의 왕들이 함선을 몰고 전사들을 거느리고 종군했다. 그러나 이는 전쟁의 명분일 수 있다. 일찍이 미노스가 일군 해상도시들의 '안전' 도모, 어쩌면 이 원정 자체가 일종의 생계활동은 아니었을까? 거기다가 앗티케는 인구가 너무 많았다. 약탈하는데 세운 공과 그것을 배분하는 동안 발생한 '불공정'이 전쟁 중에 일어난 또 하나의 전쟁이다. 


트로이아는 한마디로 '탐나는', 원정할 가치가 충분한 나라였다.

트로이아 전쟁은 왜 10년이나 지속되었을까? 그보다 10년 동안 어떻게 그리스연합군은 수성전(守城戰)에만 집중하는 트로이아와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원정군은 늘 불리하다. 특히, 그 많은 전사들의 식량과 전쟁물자들은 어떻게 조달했을까? 『일리아스』 9권에서 그들의 절절한 사정을 살필 수 있다. 아가멤논과 화해하라며 사절단으로 온 오뒷세우스에게 아킬레우스가 거세게 쏘아대는 말들이다.

 

"꼭 그처럼 나는 숱한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또 낮은 낮대로 피비린내 나는 숱한 날을 적군과/ 싸우며 보내기 일쑤였소. 그자들의 아내들을 위해서 말이오./ 사람이 사는 열두 도시를 나는 이미 함선들을 타고 가서 파괴했고,/ 또 육로로도 기름진 트로이아 도처에서 열한 도시를 파괴했소./ 그리고 그 모든 도시에서 값나가는 보물들을 수없이 노획해 와서/ 모두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에게 갖다 바치곤 했소." -『일리아스』 9권 : 325~331행)
배를 타고 열두 도시를 파괴했고, 육지에 있는 도시는 트로이아 성 하나만 남겨놓은(열한 도시를 파괴했다) 상태다. 『일리아스』 곳곳에는 '12(열두)'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전체’ 혹은 '모두'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헬레스폰토스해협을 낀 바다와 육지, 인근의 거의 모든 도시들을 초토화했다는 얘기다. 그동안 아킬레우스의 맡은 역할은 피비린내가 가득하며 처절하다. "마치 어미 새가 저는 고생을 하면서도 구할 수 있는/ 모든 먹이를 아직 깃털도 나지 않은 새끼들에게 갖다/ 먹이듯이,"(9권 323~325) 해적질을 하여 그리스연합군의 전쟁 자금과 군량을 확보했다. 그가 선봉장으로서 나선 보급투쟁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멤논은.. 그가 오뒷세우스에게 하는 말을 더 살펴보자.

 

"유독 나에게서만 마음에 맞는 여인을 빼앗아 가졌소. 그녀와 동침하며/ 재미나보라지! 하나 무엇 때문에 아르고스인들이 트로이아인들과/ 싸워야만 했던가? 무엇 때문에 아트레우스의 아들은 백성들을 모아/ 이곳으로 데려왔던가? 머릿결 고운 헬레네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필멸의 인간들 중에 아트레우스의 아들들만이/ 아내를 사랑한단 말이오? 천만에! 착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는 법이며, 나 역시 비록/ 창으로 노획한 여인이긴 하지만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소." -9권, 336~343행

브리세이스를 진심으로 사랑한 '내 아내'로 표현하는 것이 흥미롭다. 결국 메넬라오스의 아내(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전쟁 아니냐, 그의 형 아가멤논에게 날리는 직격탄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묵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이 10년째인 점, 앞서 인용한 『오뒷세이아』가 10년 전쟁이 끝나고 다시 10년 후인 점을 고려한다. <전쟁사>의 기술을 따르면, 아킬레우스의 경제활동(해적 행위)은 『이솝우화』가 그러듯이 약육강식의 '정의'에 따른 공적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킬레우스의 어미 새 비유는 얼마나 그럴듯한가! 흔히 『오뒷세이아』를 한 편의 로비무비이며 '성장소설'로 이야기한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이 작품을 통해, 바다(항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 개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펠로폰네소스전쟁은 그러한 제국주의의 욕망이 극대화된 시기를 대변한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이전에 씌어진 『일리아스』의 배경이 식민지 (개척)전쟁의 일환이며, 안정적인 식민시 운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사> 1권 투퀴디데스의 진단에 따르면 그러하다.


『일리아스』의 배경은 식민지 (개척)전쟁의 일환, 식민시 운영과 관련되어

'호메로스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이라면'이라 전제하지만 <전쟁사> 1권 초반부에서 트로이아 전쟁 규모를 살피는 역사가의 시선은 예리하다. 원정군의 함선에 승선한 자들은 전사이면서 선원이어야 했다(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시에 선장도 선원들도 일정 급여를 주고 고용하였으며, 전사들의 역할은 따로 있다). 원정에 나서는 전사들 수를 최소한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갑판도 없이 옛날 해적선 모양으로 건조된 함선에 무구(武具)를 몽땅 싣고 난바다를 건너야 했으니까. 신들의 개입이 많을수록 인간의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을 많고 크다.

 

"그 이유는 인구(전사)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식량을 조달하기 힘들어 싸우는 동안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다고 예상되는 정도로 인원을 줄였던 것이다. 그들은 상륙 직후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도 모든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식량이 부족해 케르소네소스 반도에서는 농사를 지으며 해적질을 일삼은 것 같다." -<전쟁사> 1권 11(1)
케르소네소스 반도는 에게 해의 북동쪽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끼고 있는 트라케의 반도이다. 에게 해와 흑해를 있는 프로폰티스 해(海) 입구에 있으며, 건너편 트로이스(트로이아)와 비좁은 해협을 끼고 마주보고 있다. 농사가 한두 달에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연합군들이 이처럼 분산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무려 10년째 계속되었던 것,  원정군이나 성에 갇힌 트로이아 군이나 이 전쟁은 '생존투쟁'이기도 했던 셈이다. 먹어야 싸울 수 있고, 먹여야 싸우게 할 수 있는 그런 전쟁이었음을 <전쟁사>의 저자는 예리하게 분석하는데, 27년 전쟁을 살피는(읽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경제력은 예나지금이나 가장 든든한 전쟁의 조건이다. 또한 경제제재는 또 얼마나 ‘오래된’, 그들에게는 ‘확실한’ 전쟁무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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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3-2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팁1]해적의 역사는 참으로 오래 되었으며, 우리나라에도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조선시대, 남서해안은 ‘왜구들‘로 불리는 해적들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았다. 때문에 ‘진도(珍島)‘‘는 조선시대에, 유사시 섬 전체의 주민들을 소개(疏開)시켰다. 오늘날의 ‘진도군청‘쯤에 해당하는 관청이 전남 해남군 대흥사 입구에 ‘임시관공서‘로 설치되기도 했다. 이 부분을 언젠가 소개할 날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