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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ㅣ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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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중인 연극 <오이디푸스>의 대본 일부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해당 텍스트 비교를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강변이나 해수욕장, 혹은 유치원 야외 놀이터 등 모래가 있는 곳이면 할 수 있는 놀이가 있다. 그러나 ‘모래성 쌓기’와 같이 이 놀이에 알맞은 이름을 간명하게 붙일 수가 없다. 해서 ‘거 있잖아’라는 말로 시작하거나 ‘말하자면 일종의 보드게임인데’로 설명하는 놀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은 작은 모래성 한가운데에 막대기를 꽂고 참가자들이 모래를 한 움큼씩 원하는 만큼 덜어내다가, 막대를 쓰러뜨리는 이가 꼴찌를 하는 놀이 말이다. 물가에서 하는 놀이라는 교육 관련 게시물에 이 놀이를 ‘막대 쓰러뜨리기’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적절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다.
일단 이 놀이 설명은 다음과 같다. ‘여러 명이 모래밭에 앉아 젓가락 길이의 막대기를 세우고 번갈아 가며 모래를 자기편으로 모은다. 막대를 쓰러뜨리면 탈락한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규칙은 여기까지였다. 지는 사람은 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어쨌든 이긴 자들이 된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 가운데 모래를 더 많이 모은 사람이 이긴다.’가 더 있다. 이 한 문장을 적용하면 이 놀이에서 꼴찌만이 아니라 1등에서 꼴찌까지 서열화가 가능한 것이다. 딱히 참가자 중 누구 한 사람의 전적인 책임이 아닌데, 그러한 과실의 책임을 서열화할 수 있다는 것이 좀 씁쓸하다.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원인은 개인에게도 있고, 그것을 도운 사람에게도 있고, 알면서도 모른 체 방관한 사람, 사회가 나아가 나라가 제 때에 조치하지 못한 기관의 책임까지 따지고 보면 가해의 주체는 복합적이기 마련이다. 저마다가 “나 때문이야”라고 과실을 인정하면서 발생한 문제에 접근한다면 그 해결은 원만하고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너 때문이야’로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쪽으로 흐르고, 그러다가 유사한 사건일 재발되는 것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이솝우화(전체 258편)마다 따라 붙는 ‘교훈’처럼 한마디 하자묜, 이 놀이 이름을 ‘내 탓이야 놀이’쯤으로 붙렀으면 한다.
얼마 전에 연극 <오이디푸스>를 보았다. 관람 전 예습으로 번역가 천병희의 최근 번역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다. 2500년 전 비극경연에서 상연될 때도 이 작품은 작품이 다루는 사건들(스토리)과 관련된 배경을 시시콜콜히 설명하지 않았다. 가령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가 낸 어떤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카드모스 성)를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구했는지를 작품은 얘기해주지 않는다. 특히, 그 수수께끼가 무엇이었는지를. 그 괴물이 스핑크스였다는 것도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의 대사에서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가'[129행]). 대신 스핑크스는 '가혹한 여가수'(35-36행), '저 날개 달린 소녀'(508행)와 같이 암시될 뿐이다.
이 비극의 원전번역(‘텍스트’라 하자)을 기억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연극의 실제 대본(희곡보다는 ‘대본’이라고 하자)과 많이 다름을 곧바로 느겼다. 출판 과정의 중 교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교정(校訂)과 교정(校正)이다. 전자는 오탈자를 바로잡는 과정이고, 후자는 그 과정을 거친 1차 교정지와 교정을 반영한 2차 교정지를 비교(比較)하면서 지적한 내용이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교정(校正)하듯 ‘텍스트’와 ‘대본’의 해당 부분을 비교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둘은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각색 정도에 따라 그 차이는 비례할 것이지만. 비극의 최초공연과 지금의 연극 상연까지 2500년가량의 시간차가 있을뿐더러, 번역을 통해 원작을 재현한다는 점에서(누가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발생하는 차이도 크기 때문에) 이중삼중의 굴절과정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개봉영화로 치면 기자 시사회에 해당하는 '연극 <오이디푸스>의 연습실 공개' 영상(3~6장)이 유투브에 올라 있었다. 한 부분을 골라 공연 대사를 입력한 것(대본)과 옮긴이가 최근에 '언어란 끊임없이 바뀌기도 하거니와 예전 작업의 오류를 바로잡을 때가 되어 새롭게 번역을 손을 본"(옮긴이 서문) 원전번역 텍스트(『<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일대일 비교를 해보았다. (이러한 비교에 따른 고려사항 등을 실제 사례에 맞게 정리했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상식 차원에서 짐작하는 선에 맡기고 실제 사례를 소개하는 데 집중하기로 하자) 다만 한 가지, 그리스 비극은 비극경연에서 공연된 상태라야 비로소 ‘썼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공연용 대본이었고, 지금 공연 중인 연극의 대본도 마찬가지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드라마의 기원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라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또한 그리스 비극도 상연을 전제로 한 것으로서 알맞은 ‘길이’(특히 공연시간)라는 제한을 받았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연극 <오이디푸스> 대본(대사 중심으로 그대로 타이핑한 것으로, 비극 <오이디푸스 왕> 텍스트를 기준으로 707-734행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오카스테-IO/ 오이디푸스-OI/ 코러스장-CO)
IO(배해선 분): 그런 일이라면 마음 상하지 마세요. 지금부터 제 말을 들어주세요. 테이레시아스가 언젠가 라이오스 왕과 제게 신탁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OE(황정민 분): 신탁.
IO: 신탁으로 포장한 저주였어요. 끔찍한 저주, 그 저주는 라이오스 왕이 자신의 아들 손에 살해당할 운명이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라이오스 왕께서는 엉뚱한 곳에서 도둑들에게 목숨을 잃으셨어요. 스핑크스한테 당했을 수도 있지요.
OI: 또 스핑크스.
IO: 스핑크스가 자주 노리던 곳은 라이오스 왕이 죽은 삼거리였으니까요.
OI: 삼거리.
CO: 삼거리,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삼거리.
IO: 왜 그러시죠?
OI: 나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삼거리에서 라이오스 왕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지금 당신에게 들은 것 같소. 대체 어디였소. 왕이 죽은 그곳은.
IO: 델포이와 포키스와 다울리아로 나뉘는 삼거리.(까악~)
CO: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IO: 나뭇잎 줄기처럼,
CO: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다음은 원작, 비극 <오이디푸스 왕>(천병희 옮김)의 원전번역(해당 부분)이다. 파란색으로 지정한 부분은 대강 위 대본과 텍스트가 일치하는(음절 단위) 부분이다.
(이오카스테-IO/ 오이디푸스-OI
IO: 그런 일이라면 조금도 염려 마세요. 그대는 [707]
내 말을 듣고 명심해두세요.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미래사를 예언할 수 없어요.
이에 대해 내가 간단한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710]
전에 라이오스에게 신탁이 내린 적이 있었어요.
아폴론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사제로부터 말예요.
그 신탁이란 운명이 그를 따라잡아 그이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손에 그이가 죽게 되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소문대로라면 라이오스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715]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느 날 다른 나라 도적들 손에
살해당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들은 태어난 지
사흘도 안 돼 라이오스가 두 발을 함께 묶은 뒤
하인을 시켜 인적 없는 산에다 내다 버렸어요.
그리하여 아폴론께서는 아이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720]
라이오스는 아들의 손에 죽는다는, 그이가 두려워한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셨답니다.
그렇게 되도록 신탁이 미리 정해놓았던 거예요.
그러니 신탁이라면 염려하지 마세요. 신께서 필요해서
구하시는 것이라면 몸소 쉬이 밝히실 거예요. [725]
OI: 여보, 이제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 갈피를 잡지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구려.
IO: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두렵단 말예요?
OI: 나는 마차가 다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라이오스가 살해되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들은 것 같구려. [730]
IO: 그런 말이 떠돌았고, 지금도 떠돌고 있어요.
OI: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대체 어디요?
IO: 그 나라는 포키스라고 불리며, 델포이에서 오는 길과
다울리아에서 오는 길이 서로 만나는 곳이지요. [734]
대본(연극이 원전을 많이 벗어났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쓰는 글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이오카스테의 대사를 주고받는(대화) 효과를 내기 위해 잘라내고, 코러스까지 개입해서 구두점을 찍듯이 그러해야 하는 부분을 강조하기도 한다. 삼거리가 '나뭇잎 줄기처럼' 세 갈래로 나뉜다는 비유까지 덧붙였다. 삼거리는 스핑크스가 출몰하는 우범지대였다는 설명도 새로운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공연 시간은 100분이다. 2500년 전 비극경연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상연시간은 이보다 길었을까, 짧았을까? 천병희의 번역기준으로 비극 텍스트는 1530행으로 연극보다는 길었을 것(코러스는 합창 곧 노래로 가사를 전달하니까)이다. 현대의 대본은 제한시간에 맞춰 특히 원작의 앞뒤를 가리지 않고 어떤 대사는 배제(선택)하고, 위치를 옮기고,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설명용 대사를 추가할 수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이다.
이번 연극(대본)에서 두드러지는 ‘집중’은 오이디푸스의 ‘트라우마’를 작동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대사를 재구성하고 배사의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관객들을 (오이디푸스의 트라우마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시간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건 현장인 ‘삼거리’(2),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범죄(근친상간)으로 자신을 초대한 수수께끼를 낸 ‘스핑크스’(3), 그리고 ‘부은 발의 오이디푸스’(0)라는 그의 이름 자체에 깃든 비극의 시작이 그것이다. 연극에서 오이디푸스는 누군가 이 말들을 문득 언급해도 움찔하고 무너진다.
결론은 대본은 대본이고 비극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연극 또한 그리스 비극이 그러하듯 행동의 모방이고, 대사는 행동의 모방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주재료이다. 어쨌든 대사 위주로 비교한 것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앞서 글머리에서 ‘막대 쓰러뜨리기’ 놀이를 언급했다. “네 탓이야!”라는 말을 듣는 게임에서 꼴찌를 면하려면 아무리 원전 비극을 재구성하더라고 건드리면 안 되는 ‘핵심 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다. 인용한 부분에서는, 라이오스 왕 일행을 살해한 살인범이 ‘한 사람’인가 ‘여럿’인가 하는 점이다. 두 번째 이오카스테의 대사에서 "도둑들에게"는 반드시 '도둑에게'로 대체될 수 없다. 그 살인자가 '혼자'이냐 '여럿'이냐는 오이디푸스가 범인이 될 수도 있고('도둑'이라면), 혐의를 벗어날 수도 있는('도둑들'이라면) 이 비극의 ‘발견’(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오이디푸스 자신이 그 범인임을)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연극(대본)이 무너뜨릴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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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택과 집중’에 따라 대본은 삼거리 를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도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강 언급하는데, 텍스트에 집중하면 상황은 다르다. 텍스트에서 오이디푸스는 "마차가 다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이 어디냐 묻고, 이오카스테는 (삼거리가 있는 곳은) "그 나라는 포키스라고 불리며, 델포이에서 오는 길과 다울리아에서 오는 길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전해들은 이야기므로 그 지점을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연극) 대본에서 이오카스테는 "델포이와 포키스와 다울리아로 나뉘는 삼거리."라고 한다.
이제, 그 지점이 어디이며, 어떤 의미인지 문학기행을 떠나보자. 구글지도를 따라 가는 인터넷 기행이다.(사진은 펠포폰네소스전생사 부록, 일대의 고지도> 그런데 해당 삼거리를 끝내 특정할 수 없었다. 델포이(델피) 다울리아(=다우리스?), 포키스(현대 그리스어로 Foks), 등 지명들이 혼재되어 장소 검색이 힘든 경우가 있다. 왜 이런 ‘답사’를 하나, 그만하자 하면서도 끝까지 가보았다. 결국 그 시대를 전후하여 저술된 그리스 저작들과 위키백과(다음)의 도움을 받았다.
델포이는 그리스의 포키스(Phocis) 협곡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해발 2457m)의 남서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만약 델포이를 등지고 정남향으로 걷는다면 코린토스만 바다와 만난다. 건너편이 코린토스이기는 하나 코린토스 지협에서부터 코린토스는 시작된다. 오이디푸스가 양부 슬하에서 자란 나라다. 델포이에서 코린토스만을 끼고 동쪽 아테니아 방면으로 가면 오른편이 코린토스지협이다. 배로 아테나이와 살라미스 섬이 있는 만(灣)에서 코린토스만으로 가려면 펠로폰노소스반도를 돌아가야 했는데, 당시에는 배를 지상으로 올려 육상에서 코린토스 지협을 통과하기도 했다.) 델포이는 포키스(나라)에 속하는 곳이다. 그 '삼거리'도 포키스라는 나라의 어느 지점으로 델포이에서 멀지 않다. 그런데 (텍스트와 대본에서) 포키스라고 할 때는 ‘포키스라는 도시’를 지칭하는 것이 되는데 델포이를 기준으로 할 때 포키스(수도/시)는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파르낫소스 산기슭에 위치한 델포이에서 해변(코린토스만, 남쪽으로)으로 내려와 우측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야 포키스(시)로 갈 수 있다.
문제는 다울리아의 위치다. 다울리아는 아테나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정도로 위치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델포이에서 해안(코린토스만)으로 내려오다 좌측 길(동쪽)로 접어들어야 갈 수 있는 어디쯤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다울리아 쯤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테바이(카드모스 성이 있는)고, 직진하면 아테나이이며, 아테나이 방면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코린토스지협에 이르면 코린토스다. 다시 정리하면 그 ‘삼거리’는 파르낫소스 산의 남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델포이보다는 낮은 곳이며, 해안으로(코린토스만의) 가다가 세 갈래로 나뉘는 길인데, 우회전하면 포키스(시)이고 좌회전하면 다울리아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신탁을 들은 이후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로는 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코린토스의 왕(폴뤼보스) 곧 아버지(실제는 양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거리'에서 라이오스 왕(사실은 친부)을 죽이고 그가 도착한 곳이 테바이(카드모스 성)다. 그러므로, 그 삼거리에서 오이디푸스는 델포이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남은 길은 포키스시 쪽이 아니면 다울리아 방면이다. 그런데, 그 삼거리도 다울리아도 포기스(나라)에 속한다. 라이오스 왕은 테바이를 떠나 델포이(신탁)를 찾아가던 길에서 죽음을 당한다. 사건 현장은 '삼거리'이지만 마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길은 두 대의 마차가 교행(交行)할 수 없는, 마차의 폭 정도의 길이다. 때문에 시비가 붙었고 살인까지 저지른 것, 라이오스 왕은 그 '삼거리'에 진입하기 직전이고,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오이디푸는 그 '삼거리'를 막 벗어나 다울리아 방면으로 진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지점은 이 삼거리 부근만이 아니다. 살해를 하고 다울리아 방면으로 가다가(혹은 지나서) 코린토스(시)로 가지 않기 위해 택한 좌측 방면에 테바이(카드모스)가 있었던 것. 두려운 신탁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만 아니면 어디든 찾은 곳이 테바이(사실은 자신의 진짜 고향)였다.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제2의 가해와 그녀와 낳은 그 자식들(2남2녀)의 아버지가 되는 제3의 가해가 이어지는 곳이니까. 오이디푸스가 친부를 살해한 그 삼거리는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으며, 그러므로 또 다른 '운명의 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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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울리아'가 정확히 어디쯤일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권 29장 참조)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인문지리’를 따르는 기행이다. 전설적인 아테나이 왕 판디온의 딸 프로크네가 테레우스와 결혼하는데, 테레우스는 '지금은 포키스라고 하지만 그때는 트라케인들이 살곤 하던 다울리아'의 왕이었다. 결혼한 테레우스는 처제인 필로멜레가 탐나 범하게 되고 그 범행이 탄로날까봐 그녀의 혀를 잘라버린다. 프로크네는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튀스를 죽여 그 고기(요리)를 테레우스에게 먹인다. 이 사실을 안 테레우스가 두 자매를 쫓아가 죽이려 하자 제우스가 그는 '후투티'로, 프로크네는 '밤꾀꼬리'로, 필로멜레는 '제비'로 변신시켰다고 한다(아폴로도로스의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도 나온다). 여인들이 이튀스에게 범행을 저지른 곳이 이곳 다울리아이고,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밤꾀꼬리를 언급할 때 '다울리아의 새'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판디온 왕이 딸을 테레우스에게 시집을 보낸 것은 다울리이가 아테나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사시 상호원조를 고려한 전략적인 선택인 것. '역사' 등 관련 저작에 따르면 '삼거리'는 포키스 영역 안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가급적 아테나이에 가까운 곳에 있다.
사는 동안 선택은 불가피하고, 세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듯이 그렇게 살아간다. 어쨌든 연극에서처럼 그런 인생의 ‘삼거리’만을 강조하는 데서 비극(텍스트) 읽기는 멈출 수가 없다. 삼거리의 세 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끝까지 가면 만나는 지명(나라)이 어느 곳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이 테바이라거나 코린토스라면 사정은 다르다.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선택지 가운데 하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 발생 시점(삼거리 부근)과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고 산자락을 내려왔을 때와는 시간차가 있다.
"오이디푸스: (신탁을 듣고) 난 뒤 나는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별들을 보고 멀리서 그곳의 위치를 재면서
내 사악한 신탁이 정해준 치욕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게 될 곳으로 줄곧 떠돌아다녔다오.
그렇게 방황하던 차에 나는 왕이 살해당했다고
당신이 말하는 그곳에 이르렀소." (<오이디푸스 왕> 794-799행)
‘부은 발의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신탁)에서 내려와 향한 곳은 서북쪽 포키스(시) 방면일 수 있다. 그러다가 문득 델포이 부근을 다시 지나게 되었고, 문제의 그 삼거리(사건 현장)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거기서 그는 다울리아로 가는 길을 선택했고, 곧이어 친부를 살해했으며 그 길을 곧장 가다가 또 하나의 삼거리를 만난 것. 그리고 그가 선택한 '(돌아)가지 않은 길'(코린토스 행)은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한 길이 '신탁을 따르는 길'(테바이행)이 돠었는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스 비극을 원전으로 하되 연극은 연극일 뿐이다. 그러나 비극(텍스트)은 비극대로의 고유한 독서의 대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 책에서 만나는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은 최소한 네 번째 오류를 바로잡고 현재의 어감(말 느낌)에 맞게 다듬은 번역이다(개정판이거나 새로운 책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창작자가 아닌 번역가가 져야 할 고역이다. 우리말로 오롯이 그 시대에 맞게 텍스트를 옮기는 것이 이러하거늘 연극 대본과 원전 텍스트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연극을 잘 이해하기 위해 원전 번역을 읽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고유한 영역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세 갈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곳. 하나의 길이 세 개로 나뉘는 곳, 삼거리"란 연극의 대사가 맴돈다. 사는 동안 끊임 없이 선택하는 인생을 길(road/way)로 시사점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로 만나는 삼거리에는
도 다른 본래의 길(road/way)의 의미가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때론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도 또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연극 <오이디푸스>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비교하면 발견한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