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역사'에서 다룬 그 전쟁이 발발한 진짜 원인은 따로 있어요, 그는 속삭이듯 그러나 세 차례나 강조한다(이 글에는 인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쐐기를 박는다.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에 따라 현대의 사가들에게도 역사기술의 모범을 제시한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의견'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 22장 3절.  그의 예감은 이후 역사, 특히 전쟁의 역사에서 예언이 되었고 적중했다. 인류의 전쟁은 갈수록 첨단무기에 의존하지만, 끝내 핵을 사용하여 공멸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전쟁이 없는 인간의 역사는 없다. 해서 전쟁은 무역전쟁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회적인 전쟁인 것 같지만 전쟁은 자금없이 행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피를 흘리지 않을 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경제력의 대결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삶은 전쟁이라, 일상의 인간이 마주한 삶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투퀴디데스의 '역사'는 지금도 작동한다.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가 환기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새로운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패권 국가가 두려움을 느끼고 무력을 통해 두려움을 해소하려 하면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 그러나 간단치 않은 개념이다. 

 

FT는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s trap)을 2018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FT는 파이낸셜타임스로 영국의 경제 전문지다. 2019년에도 올해의 단어가 될 수 있을까, 전망은 그럴 것 같다. (오늘은 베트남 하노이 제2차 북미정삼회담 첫째날, 두 정상들은 지금 회담 첫날 일정인 만찬을 하고 있다.) 2018년의 미중무역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어 특히 주목을 받은 이론이다. 이러한 흐름과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가 묘하게 맞물렸다. 제1차 북미정상회담(싱가폴),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오랜 기다림 끝에 '실시간으로' 진행중이다. 이 정상회담이 열리는 곳이 왜 하필 베트남(하노이)일까? 패전국의 대통령이 그 현장에서 승리라고는 할 수 없는 전쟁의 또 다른 상대, '불편하기 짝이 없는' 나라의 정상을 만나고 있다. 북한과 베트남. 제2차 세계대전(특히 태평양전쟁)의 승전국 미국이 아시아 변방의 그렇고 그런 나라쯤으로 여기고 참전했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본 전쟁의 상대국이다. 두 차례 연이어 패배한 전쟁, 아픈 손가락이다.

 

한국전쟁이야 객관적으로 시작 전의 균형(대립) 상태로 돌아간 것이니 '비긴' 전쟁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16개국이나 참전한 UN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면서도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국으로서는 '실패한' 전쟁이다. 실제로 미국은 오래된 전쟁의 종지부를 찍느니 마느니 평화선언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의 결과를 두고 미국은  전승기념행사를 단 한 차례도 연 적이 없다고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그때그때 곳곳에서 격돌한 세력들이 저마다 승리했다면서 승전비를 세우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한반도에 평화의 이정표를 찍는다면, 이야말로 그들의 전승기념행사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의 평화를 운운하면서 그리는 밑그림은 우리의 바람과는 다른 것 같다. 그간 오랜 세월 동안 '한미동맹'을 굳건히 유지해 온 까닭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태평양에서의 제해권(制海權)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며, G2 운운하며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또한 미국이 원망(怨望) 관계인 베트남을 안고 가는 것도(2차 북미회담 장소가 그곳인 것도) 중국 견제의 일환이라고 읽는 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작년 이맘때 특별한 번역서 한 권이  '조용히' 발간되었다. 『예정된 전쟁』(세종서적, 2018.1.31.)이다. 부제에서 언급하는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이 국제 정치판에서 전문가들의 입에서, 그것을 다룬 언론에 회자되먼서 주목받기 시작한 책이다.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이란 용어를 만든 그레이엄 앨리슨의 저작이다. 원제는 <Destined for War: 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인데, 한글판 부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이다. 원서의 부제를 직역하면 "어떻게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은 '미·중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방법' 쯤으로 정리할 수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한반도의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번역서의 부제에 '한반도의 운명'이 추가된 것이다.
앞서 그런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비핵화 프로세스는 2018년 1월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로부터 촉발되었다.『예정된 전쟁』은 신탁이라도 받은 듯 기다렸다는 듯이 출간되었다. 예정된 전쟁처럼 '준비된 출판'이었다. 해외의 저자와 출판계약을 하고, 번역자를 섭외하고 번역하고 그 원고를 받은 이후 한 권의 책을 펴내기까지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이 있다. 이를 감안할 때, 김 위원장의 신년사를 대단한 변화의 조짐으로 보고, 실제로는 2018평창동계올림픽(2018.2.9~25.)을 전후한 시점에야 한반도의 평화가 무르익었음을 감안하면 이 책의 출간 시점은 미묘하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영문판 원저는 2017년 5월(5.30.)에 출간되었다. 원전이 출간된 이후 우리말 번역본 출간까지 8개월이 소요되었다. 원서와 번역서가 동시출간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다룬 책은 아니었다. 어쨌든 저작권이 있는 책의 번역출판에 주어진 8개월은 결코 넉넉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번역의 아쉬움을 지적하는 소리가 들린다. 출간 일정을 너무 서두른 결과인 듯히다. 세계 유수의 지도자들, 유명인들의 찬사가 추천사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번역본이 출간된 2018년 한 해, 국내외 언론은 '투키디데스 함정'을 인용한 기사를 마구 쏟아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와 맞물리고 매스컴의 요란한‘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판매량은 그에 비례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전적으로 추정이다). '예정된 전쟁'은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개정판을 낸다면, 저자와 협의하여 ‘투키디데스 함정’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새로운 언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깊이 읽는 가운데 탄생했다. 오래된 새로움이다. 그런 발견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발견이려면 대중(독자)들의 독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건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당사자 중 하나인 우리(국민 독자들은)는 과연 '투키디데스 함정'을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정된 전쟁'에 대한 국내에서 반응이 시들하다면 그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숙독한 독자들이 그리 많지 않음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작년과 올해 '전쟁사'의 판매 부수에는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개략적인 내용을 숙지하는 딱 그 지점에서 생각도 행동도 멈춘 것은 아닐까? 원전 텍스트를 제대로 읽은 독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현상은 그런 짐작을 하게 한다. 사실, 전자책을 포함하여 종이책 읽는 독자층이 줄어든 시대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인은 늘 보다 근본적인 데에 있다. 이러다가 대학입시나 입사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는 시사용어쯤 하나로 '투키디데스 함정'이, 투퀴디데스의 '역사'까지도 가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오이디푸스 콜픔헥스나 플라토닉 러브처럼.

 

"투퀴디데스(기원전 460~400년경)는 상류계급 출신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장군으로 선출되어(야전사령관으로) 참전하지만 작전에 실패한 전투(기원전 424년)의 때문에 장군직에서 해임되고 추방되어 무려 20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그 동안 스파르테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여행하면서 사실(事實)을 수집하고, 확인했는데 이런 자료가 '전쟁사' 집필에 밑바탕이 되었다."

 

"깊은 산 작은 연못 예쁜 붕어 두 마리~" 『펠로폰네스 전쟁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김민기가 노래한 <작은 연못>의 멜로디와 가사가 떠오른다. 저자는 이 전쟁의 주인공들, 아테나이인들과 라케다이몬인들의 입장에 얽매이지 않고 제3의시선으로 살핀다. 이들 그리스 세력을 제압하려던 두 차례의 쓰라린 전쟁에서의 패배를 딛고 지중해의 주도권을 쥐려는 영원한 제국 페르시아가 있다. 그들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양대 세력 모두의 몰락을 부추긴다. 전쟁자금이 고갈된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하면서, 용병처럼 부리며 '밀당'을 한다. 그러나 어부지리(漁夫之利)를 하는 세력은 따로 있으니 필립포스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마케도니아다. 그들 또한 가만히 기회만 엿본 것이 아니었다. 이 전쟁 시기에 아테나이인들과 스파르테인들 사이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작업'을 하였다. <전쟁사>는 대충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금껏 나타난 역사가들 중 가장 위대한 역사가", 이렇게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머콜리는 투퀴디데스를 평가한다. 19세기 독일의 랑케 등은 투퀴디데스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의 이상으로 추앙했다. "나는 주워들은 대로 또는 내 의견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든 남에게 들은 것이든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투퀴디데스는 자신이 참가한 전쟁임에도 객관적인 제3자의 시선으로 서술했다. 함축적인 문체와 날카로운 분석으로 역사의 교과서를 썼다. 그는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를 주제에서,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사료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에서 극복하였으며 너무도 일찍 '역사의 완성자'로 자리매김했다. 절제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역사가의 '의견'까지 담아 역사 저널리스트의 면모도 보이는데, 그의 예언과도 같은 메시지는 섬뜩하다.


 

"헤로도토스는 두 차례 치른 그리스의 대(對) 페르시아전쟁을 중심으로 '역사'를 쓴다. 헬라스(희랍:그리스)인들로서는 두 차례 비헬라스인(페르시아제국)들의 거센 침공을 막아냈다. 그러나 저들의 힘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의문을 풀기 위해 발품을 팔면서 탐사하고 기록한다."

 

두 차례(기원전 480/489)의 '위대한' 그리스인들의 전쟁이 끝났을 때, 한 편의 ‘특별한’ 비극이 경연무대에 오른다.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456/5)의 「페르시아인들」(472년)이다. 비극의 배경은 살라미스해전에 패배한 페르시아 궁전, (승리자인 그리스의 입장이 아니라) 패배자인 페르시아 인들, '전범'인 그들의 왕이 전쟁에서 겪은 불행을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오만’했다. '교만' 때문에 자제하지 못하였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끝내 쓰라린 패배를 안게 된 것이라고. 이 작품이 헤로도토스에게 끼친 영향(집필 동기와 <역사>(전반부에서)에 담은 내용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투퀴디데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보여주었고, 배웠으며, 그리 실행했다. 투퀴디데스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통해 아테나이인들에게 인류에게 경계하고자 한 바가 그렇다. 아이스킬로스(비극 시인)와 헤로도토스(역사가) 같은 선배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투퀴디데스는 차분하게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가급적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또 하나의 비극 작품(역사)을 쓴 것이다.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진 해(기원전 431년)에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53세인데 처음 몇 년 동안 전쟁을 체험한다.  『역사』는 기원전 424년에 이미 간행되었고, 그는 곧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한다."

 

팝콘 영화와 같은 일회용 읽을거리가 아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채 서가에서 장기투숙중인 역사는 더욱 아니다. 세계는 왜 지금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 에 주목하는가? 2018년 그레이엄 앨리슨의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이 국제사회에 울린 '경종'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인 것 같다. 당동행 전용열차에 오른 김 위원장이 중국 변방에 위치한 한 역사에 잠시 내려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는데, 그 답뱃불을 라이터로 붙였든 성냥으로 붙였든 그것이 그리도 대단한 뉴스가 되어 전파낭비를 일삼는 것일까? '전쟁사'의 한 대목이나 그 고전을 깊이 읽는 가운데, 우리가 당면한 비극을 예견하는 텍스트를 이야기하면서 김 위원장의 구상이나 트럼프가 쥔 카드를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일까?

『펠로폰네스 전쟁사』를 제대로 읽었다면 그 경고('투키디데스 함정')가 사전이 아니라 사후에 보낸 재난문자에 지나지 않음을 절감할 것이디.『펠로폰네스 전쟁사』정독한 국내 독자들이 많다면 그와 비례하여 번역서인 『예정된 전쟁』의 판매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펠로폰네스 전쟁사』를 제대로 읽어야, 드센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당사자인 남한이나 북한이 한반도 평화의 길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다. 그에 필요한 살아있는 팁(Tip)을 ‘득템’할 수 있으리라. 청와대를 비롯하여 관련 부처의 고위공무원들, 국정을 입안하는 이들부터 읽어야 할 책이다. 세종대왕처럼 독서휴가라도 줘서 읽게 해야 할 고전인데, 이런 얘기까지 꺼내는 것이 좀 슬프다. 과도한 기대는 금물! 그럼에도 내일의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과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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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2-2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글을 오늘 올리고 보니,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마무리된 모양이다. 강자는 논리는 늘 정의라는 이름으로 펼쳐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통용되는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