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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ㅣ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오이디푸스 왕>의 공연연대를 기원전 430~425으로 추정한다. 소포클레스는 '그 해' 비극경연에서 2등을 차지한다.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 2등(엄선하여 출전한 3인 중)이라니, 좀 아쉽다. 그만큼 작품의 주제가 충격적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왜 공연 시기를 특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6년 중 어느 해의 가을이나 봄일 텐데, 추정되는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당시 그리스의 ‘역사’를 펼쳐야 할 때다. 공연연대로 추정하는 기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초기에 해당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참고하자.
무려 27년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지만 트로이아 10년 전쟁(『일리아스』가 다루는)이 그랬듯이 전쟁 기간 내낸 치열한 전투만이 이어진 것응 아니다. 당시 항구를 낀 아테나이시에는 거의 모든 아테나이인들이 도시를 성(城)으로 삼아, 변두리 농촌지역의 시민들이 파란을 온 상태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부터 거의 대부분의 전쟁기간을 그들은 그렇게 버텼다. 해군력에서 우위에 있는 그들은 넓은 바다가 피란처였고, 그들의 전쟁자금원인 식민시들이 지중해 곳곳, 특히 페르시아 연안에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수많은 함선에 올라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육상전에서 우위인 라케다이몬인들(펠로폰네소스동맹의 주도국)에 맞서 싸우는 전략이었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천재지변이 아니고는 아테나이 시 안에서는 일상적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리라. 봄가을 두 차례의 주요한 축제 기간에 열리는 비극경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극이 시작되기 전에 발생한 역병(疫病)으로 테바이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러나 당시 왕은 지혜롭기로 인류 최고로 추앙받는 오이디푸스였다. 그는 몇 해 전 테바이를 위기로 내몬 괴물 스핑크스의 위협으로부터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도시를 위기에서 구한 사람이다. 때문에, 시민들은 왕을 찾아와 그때처럼 이번 위기에서도 도시를 구해주기를 바란다. 비극의 초반 상황을 주목한 학자들은, 이처럼 역병으로 위기를 맞은 상황이 극 중 상황이, 비극경연이 이뤄지던 당시의 아테나이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27년 전쟁' 2년차(기원전 431)에 발생한 역병으로 아테나이인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다. 전쟁 기간 동안 라케다이몬인들은 수시로 아테나이를 침공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며 ‘도시라는 요새’를 박차고 나온 그들과 일전을 겨루기를 바란다. 역병이 창궐하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우외환, 아테나이는 안팎으로 위기 상황이다. 그해 여름이다.
"처음에는 무슨 병인지 몰라 의사들은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다. 환자들과 접촉이 잦으니 실제로 의사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인간의 그 밖의 기술도 전혀 소용없었다. 신전에 가서 탄원을 해도, 신탁에 물어도, 그 밖에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해도 소용없기는 매일반이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불행에 압도되어 그런 노력마저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2권 47장)
이 나라에서는 대지의 열매를 맺는 이삭에도,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 떼에게도, 여인들의 불모의
산고에도 죽음이 만연해 있나이다. 게다가 불을
가져다주는 신이, 가장 사악한 역병이 도시를 뒤쫓으니
(『오이디푸스 왕』5~8헹, 전체 1530행 중)
아테나이를 휩쓴 역병은 기원전 429년까지 이어져 그해 여름, 당면한 전쟁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의 황금시대를 지휘했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는데, 역시 역병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서 소포클레스는 테바이를 배경으로 한 「안티고네」(441년 공연)로 비극경연에서 수상한 바 있다. 이즈음 앞선 작품과 내용상 연결되는 <오이디푸스 왕>을 구상하고, 초안을 써놓았을 수 있다. 그러나 비극경연에 참가하여 발표되지 않으면 그것은 쓰이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공연연대가 곧 집필연대인 것이다. 그만큼 그리스에서 비극의 공연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 모두가 엄선한 그 해의 필독서 몇 권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경우랄까, 시민들은 기꺼히 관객으로 참여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기원전 430~425년에 해당하는 6년 가운데 어느 해의, 봄이나 가을에 공연된 것일까?
역병이 그해 여름에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하면 기원전 431년 가을(비극경연은 봄가을 한 해 두 차례 열림) 이전일 수는 없다. 역병 발생 초기의 어수선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듬해인 430년 봄쯤으로 공연 시기를 늦춰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430~425년 가운데 어느 해라고 하면 그 범위가 넓다. 그만큼 이 시기에 축제도 비극경연도 정기적으로 열리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그 어수선함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왕>의 공연 시기는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전일까, 이후일까? 단지 역병만이 아니라---. 테바이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비극이 공연되던) 아테나이인들에서 페리클레스의 존재감은 무척 컸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의 죽음이 가져온 아테나이인들의 상실감과 <오이디푸스 왕>은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인다’. 공연 시기가 그가 사망한 기원전 429년(여름) 이전일지 이후일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이 물음 하나를 가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초입 부분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작품은 작품이고 현실은 현실, 또한 비극은 비극이고 전쟁은 전쟁, 역사는 역사일 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속수무책으로 번지는 메르스를 제압하지 못하던 몇 년 전을 기억한다. 질병 확산을 막지 못해 온 나라가 뒤숭숭하였고, 지자체의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연기되거나 끝내 열리지 못하였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전쟁 중인 아테나이의 상황 또한 축제(비극경연)을 열기에는 '불편한' 상황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한편으로 역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전에 가서 탄원을 해도, 신탁에 물어도” 해법을 찾지 못했다는 ‘역사’ 기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비슷한 행위'는 또 무엇일까? 오히려 그런 방편으로 <오이디푸스 왕>은 무대에 오른 것은 아닐까?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개최한 축제에서 당시 시민들의 염원을 반영한 작품을 소포클레스는 쓴 것이 아닐까?
‘왕의 부덕한 소치’로 가뭄,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은 일어나고 나라는 위기에 처한다. ‘오이디푸스 왕’을 희생양으로 삼아 역병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닐까? 희생 제의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해석하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고전학자 베르낭(Vernant)이 대표적인데, ‘신들의 응징으로 집단이 위기에 빠질 때 규범적인 해결책은 왕을 희생시키는 것’이 한 방법이다. 『일리아스』는 역병(疫病)이 창궐하여 전멸 위기에 처한 그리스연합군 진영에서 시작된다. 신탁에 따라 역병의 원인을 밝히고 역시 신탁에 따름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역병의 원인제공자는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인간들의 왕의 교만 때문이다. 이 일로 하여 아가멤논의 리더십은 복구 불가할 정도로 훼손되며, 참혹한 비극이 이어진다. 일종의 응징이다.
베르낭은 ‘왕을 희생양 삼기’라는 점에서 그리스의 오스트라시즘(ostracism; 도편추방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기원전 6세기 아테나이에서 실행되던 이 제도는 독재자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추방하기 위한 제도였다. 공정한 재판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아고라에서 공동집회가 열리면 시민들은 질그릇조각(도편:陶片)에 자기가 생각한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그렇게 지목된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먀, 지목된 사람은 방어할 수 있는 절차도 없다. 떠나야 하고 떠나는 것이다. 아테나이의 입법자 솔론은 이러한 관행을 “한 도시는 그 도시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살라미스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도 그렇게 아테나이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을 찾아가 말년을 의탁하고 이국땅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뒤이어 아테나이를 해상제국으로 이끈 사람이 페리클레스가 아닌가, 물론 아테나이가 역병(과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페리클레스를 제거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희생양-왕’으로 해석할 때, 또한 관객(시민)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전쟁의 진짜 원인을 투퀴디데스는세 차례나 강조하는데 요지는 이렇다. 펠로폰네소스동맹이라는 육상세력의 주도국 라케다이몬인들(스파르테)이 해상 세력(델로스동맹)의 주도국 아테나이인들의 세력이 날로 확산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라고 단언하는 투퀴디데스의 진단을 저버릴 수 없다. 사망하기 반 년 전 초겨울 페리클레스가 행한 '아테나이인 전몰자들을 위한 추도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40여 편의 연설문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히며 가장 빈번하게 인용된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업적에 관해 들으면 샘이 나서 연사가 과찬을 한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 ’남들에 대한 칭찬은 각자가 자기도 들은 대로 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선까지는 용납되지만, 일단 그 선을 넘어서면 시기와 불신을 사게 됩니다.(이 책, 2권 35[2] ‘살아있을 때는 누구나 경쟁자들의 시기를 사지만 죽은 자들에게는 누구나 경쟁심이 없어져 따뜻한 경의를 표하기 때문입니다.’(2권 45[1])
페리클레스가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처럼 들린다. 페리클레스는 이 전쟁이 터지고 2년 6개월을 더 살다 죽었다. 그거 남긴 유언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은인자중하며 함대를 증강할 것, 전쟁동안에는 제국을 확장하지 말 것, 도시를 위험에 빠뜨릴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것임." 아테나이인들은 이런 경고를 묵살했고, 전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끝내 멸망의 길에 접어든다. 소포클레스가 말년에 쓴 또 하나의 명작「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오랜 기다림 끝어 '마침내' 추방되어 방랑하지만 곧 신의 구원을 받고 신적인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콜로노스의 수호신이 된다. 그가 영면하게 되는 그 땅을 그 도시를 그가 지킬 수 있는 일종의 선물을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중엽 페리클레스의 주요 정적을 배출한 귀족가문출신이고 스스로가 민주제의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었음에도, 아테나이의 민주제를 확립한 페리클레스를 열렬히 찬미자하였다. 미처 하지 못한 얘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희생양-왕-오스트라시즘’ 부분은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철학자 양운덕의 해설을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