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imals’ Rights 동물의 권리
헨리 스티븐스 솔트 지음, 임경민 옮김 / 지에이소프트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여름 복날에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개고기를 먹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의 문화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개고기를 먹는 것에 거부감을 많이 가지고 복날이라 할지라도 삼계탕을 많이 먹는 것 같다. 물론 개고기 대신 삼계탕을 먹는 젊은층에게 동물 감수성이 더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뭐 하지만, 외국처럼 개를 식용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매우 많은 것 같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마치 자신의 아들인 양, 딸인 양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반려동물의 아빠와 엄마인 것처럼 부르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낯선 일은 아니다. 

이 책은 무려 1892년에 영국의 언론인 헨리 S. 솔트가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쓴 동물권리선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운 점은 19세기 말에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쓰인 책이 이미 꽤 많이 출판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의 본문 이후에는 '동물의 권리에 관한 참고문헌'이 꽤 자세하게 소개되어있다. 서양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에 동물의 권리에 관하여 학문적 논쟁이 시작되었다. 동물의 권리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인권 역시 중요시하게 생각한다. 그 반대로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동물권 역시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산업현장과 농업현장에서의 동물해방을 야기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동물이 더 이상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지 않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영혼의 동반자로서 그 신분이 격상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그간 동물들의 몫이었던 엄청난 양의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과학적, 기계적 발명이 단순히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인도적인 목적으로 활용될 때,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반드시 적대적일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러한 아름다움을 가꾸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될지도 모른다. -57p.

현대사회에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육식에 저항하는 것을 포함한다. 동물의 권리를 가장 심각하게 박탈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육식이고, 인간의 육식 때문에 공장식으로 닭과 소와 돼지가 사육되어 주기적으로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유행한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닭 살충제 역시 육식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멀리 내다보면 동물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여러 가지 경제적 이유와 익숙한 삶의 방식으로 인해 우리가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것을 동물의 권리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아무쪼록 동물의 권리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국의 역사학자, 그들만의 세상 - 역사학계의 친일파는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어떻게 증식하고 있는가?
김명옥 외 지음 / 만권당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 정부에서 가장 공들였던 정책 중에 하나가 바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였다. 교과서를 국정화한다는 것은 한국사를 국가에서 공인한 한가지 사관으로 학생에게 가르치겠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다. 그러나 국정화 정책은 정권이 교체되면서 산산조각 나버렸고, 현재는 국정화 교과서를 출간한 출판사와 집필자 모두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 논쟁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의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매국의 역사학자, 그들만의 세상]은 한국 역사학계에 만연한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책이다. 이 책을 공동으로 쓴 4명의 저자들 중에 실제로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은 1명 정도이고, 나머지 저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독서를 통해 식민사관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비판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재야사학자들이다.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학계에 존재하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을 먼저 알아야 한다. 강단사학이란 서울대 국사학과를 중심으로 하여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 연구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주류세력을 말한다. 그에 반해 재야사학은 대학교에 속해있지는 않지만 한국사를 연구하며 강단사학이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비주류 세력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대립은 실제로 너무 치열하고, 강단사학은 재야사학을 사이비 역사학이라 비판하고, 재야사학은 강단사학을 매국의 역사학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강단사학이 옳은 걸까? 재야사학이 옳은 걸까?

나는 역사의 진실은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강단사학에서 말하는 재야사학의 비전문성과 비학문성은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학문이나 전공자들과 비전공자들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재야사학에서 아무리 많은 역사 책을 읽고, 혼자 공부를 한다고 할지라도 주류 역사학자들이  학위를 받기 위해 수십 년을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던 것만큼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국사가 일제 시절에 형성된 역사 실증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게 또한 비참한 현실이다. 즉 현재 한국사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사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식민사학자들이 쓴 책과 자료를 통해서 한국사 연구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야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강단사학이 식민사관에 길들여진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식민사관이 기분 나쁜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익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간도는 중국의 땅인가? 아니면 한민족의 땅인가? 역사적으로 독도는 일본의 땅인가? 아니면 우리 땅인가? 중국과 일본은 모두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명백한 역사마저도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하는데, 과연 그 사이에 낀 한국은 어떤 역사를 선택해야 할까?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갈등만큼 한중일의 역사문제도 섣부르게 해결하기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록 1 : 주홍색 연구 셜록 1
아서 코넌 도일 지음, 최현빈 옮김 / 열림원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 1]의 배경이 되는 셜록 홈즈의 원작을 새로운 번역과 각주를 달고 출간된 신작이다. 즉 한마디로 이 책은 코난 도일의 원작과 영국 드라마 [셜록]의 다리를 놓아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셜록 시즌 1]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편 소설 '주홍색 연구', '춤추는 사람 그림', '오렌지 씨앗 다섯 개', '프루스파팅턴호 설계도', '해군 조약문' 이 실려있다. 

스코틀랜드의 의사였던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를 쓴 것은 1800년대의 일이다. 어찌 보면 지금과는 수백 년의 시대 차가 느껴질 수 있지만, 여전히 셜록 홈즈를 읽으며  수억 명의 독자가 열광하는 이유는 명탐정 셜록 홈즈야 말로 모던 타임스를 대표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비록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를 쓰고 나서 심령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가 창조한 탐정 셜록 홈즈는 형이상학적 세계에는 별로 관심 없는 지식인이다. 그는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난제를 해결한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 그는 신과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경험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한다. 

소설에서 난제로 보이는 사건에 접근하며 셜록은 이렇게 말한다. "대자연을 해석하려는 사람이라면 생각도 대자연만큼 크게 해야지." 셜록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크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 역시 커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 자체에 집착해서는 문제의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문제는 여러 가지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연결돼서 탄생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개인의 삶에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정으로 부름받았다. 인생이라는 난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총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사소한 디테일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꼼꼼함이 필요하다.  그 어떤 난제도 종국에는 그 사소한 실마리로 인해 풀리기 마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이 말하는 윤리 - 옳은 일을 행하라 한림 SA: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4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편집부 지음, 이동훈 옮김 / 한림출판사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영어 원제는 'Ethics in Science'이다. 즉 이 책은 과학 분야 내에서 여러 윤리적 난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먼저 언급되고 있는 윤리적 난제는 과연 생과 사의 경계가 무엇인가이다. 예전에는 심장만 뛰지 않고,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여겨졌는데,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심장이 뛰지 않으면 다시 뛰게 하면 되고, 숨을 쉬지 않으면 다시 숨을 쉬게 하면 되어서 단순히 과거의 기준으로 죽음을 결정 내리기가 어려워졌다. 따라서 요즘에는 사람이 숨을 쉬고, 심장이 뛰어도 뇌가 죽었다고 의사가 판정을 내리면 그는 의학적으로 죽은 것이다. 현재 이건희 회장이 2년 넘게 병상에 누워있고 아무런 거동을 못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는 살아있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또한 이 책에서 주로 언급하는 과학계의 윤리적 문제는 표절과 도핑이다. 표절과 도핑은 과정은 전혀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표절과 도핑은 탁월한 실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된 방법을 동원한다. 표절을 하면 시간을 아껴 좋은 글을 쓸 수 있고, 도핑을 하면 나의 한계를 넘어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표절과 도핑은 너무나 쉽고 일반화되었다. 누구라도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면 쉽게 표절할 수 있고, 누구라도 유전자를 잘 조작한다면 도핑검사에 걸리지 않고도 좋은 기록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과학기술의 발달로 표절과 도핑이 만연하게 된다면 과연 과학기술의 발달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과학은 과학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고, 인문학과 종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문학과 종교 안에 윤리적 잣대와 기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윤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윤리성이 곧 실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악 혐오 - 공쿠르상 수상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
파스칼 키냐르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알렉스 로즈가 이 책을 추천하며 한 말처럼 [음악 혐오]는 철학과 소설 사이에 있는 책이다. 누구라도 이 책을 처음 읽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음악과 관련된 고유명사와 전문용어를 음악의 문외한인 독자가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난관을 뚫고 이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왜 이 책의 제목이 '음악 예찬'이 아니라 '음악 혐오'인지 알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눈에는 눈꺼풀이 있지만,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끝없는 수동성(비가시적인 강제된 수신)은 인간 청력의 근간이다. 내가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라고 요약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적 행위다. '듣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는 obaudire이다. 프랑스어의 복종하다라는 동사 obeir는 이 obaudire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라틴어로 귀 기울임은 즉 '복종'을 뜻한다. -104p.

시각이 인간의 능동성을 나타낸다면, 청각은 인간의 수동성을 나타낸다. 인간은 볼 것과 보지 않을 것을 눈꺼풀로 선택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가 들을 것과 듣지 않을 것을 선택하기 힘들다. 애당초 귀는 언제나 열려있다. 인간의 귀는 듣지 않을 의무가 없다. 저자가 음악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청각의 수동적 특성을 이용하여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아무런 공백 없이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떤 소리를 들을지 결정하는 게 바로  권력이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한다. -187p.


아우슈비츠에 감금된 사람들은 무엇을 듣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 일방적으로 들려지는 민속음악과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요즘 카페나 식당을 들어가면, 그 공간의 적적함을 없애기 위하여 주인이 음악을 튼다. 때로는 조용한 음악, 때로는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 가게에서 손님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 음악에 사로잡힌다. 요즘은 그러한 소음을 백색소음이라고 평하며, 일부러 그 백색소음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의 오감 중 가장 먼저 발달하고 가장 나중에 생을 마감하는 청각의 신비를 깨닫는 것은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리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