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혐오 - 공쿠르상 수상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
파스칼 키냐르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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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알렉스 로즈가 이 책을 추천하며 한 말처럼 [음악 혐오]는 철학과 소설 사이에 있는 책이다. 누구라도 이 책을 처음 읽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음악과 관련된 고유명사와 전문용어를 음악의 문외한인 독자가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난관을 뚫고 이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왜 이 책의 제목이 '음악 예찬'이 아니라 '음악 혐오'인지 알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눈에는 눈꺼풀이 있지만,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끝없는 수동성(비가시적인 강제된 수신)은 인간 청력의 근간이다. 내가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라고 요약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적 행위다. '듣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는 obaudire이다. 프랑스어의 복종하다라는 동사 obeir는 이 obaudire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라틴어로 귀 기울임은 즉 '복종'을 뜻한다. -104p.

시각이 인간의 능동성을 나타낸다면, 청각은 인간의 수동성을 나타낸다. 인간은 볼 것과 보지 않을 것을 눈꺼풀로 선택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가 들을 것과 듣지 않을 것을 선택하기 힘들다. 애당초 귀는 언제나 열려있다. 인간의 귀는 듣지 않을 의무가 없다. 저자가 음악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청각의 수동적 특성을 이용하여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아무런 공백 없이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떤 소리를 들을지 결정하는 게 바로  권력이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한다. -187p.


아우슈비츠에 감금된 사람들은 무엇을 듣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 일방적으로 들려지는 민속음악과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요즘 카페나 식당을 들어가면, 그 공간의 적적함을 없애기 위하여 주인이 음악을 튼다. 때로는 조용한 음악, 때로는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 가게에서 손님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 음악에 사로잡힌다. 요즘은 그러한 소음을 백색소음이라고 평하며, 일부러 그 백색소음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의 오감 중 가장 먼저 발달하고 가장 나중에 생을 마감하는 청각의 신비를 깨닫는 것은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리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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