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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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82년생 김지영』이 생활밀착형 사례 모음집 같은 느낌이라면,

『사하맨션』은 사회 밀착형 사례 모음집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근래에 겪어왔던 사회적 사건들을 재조합된 상태로 다시 읽게 되는데, 

기시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 사고 실험이 아니라 그냥 현실 그 자체로 읽힌다. 


메르스 사태, 물 대포 진압, 세월호, 촛불집회 그리고 공공 시스템의 민영화 등등.

픽션으로 치부해도 될 정도의, 지나친 망상처럼 보일 수도 있을 일들이 사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사실. 그 사실에 거꾸로 과거의 현실을 감탄(?) 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SF로 다루기에 적합하다. 

시치미 뚝 떼고 현실의 이야기를 신랄하게 그릴 수 있으니까.

작가는 소설 초반에 가상 도시의 설정을 디테일하게 공을 들여 설명한다.

현실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는 이 설명은, 이 소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나타날 수 있는, 혹은 이미 나타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SF적 설정이 디테일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디테일이 무조건 내적인 리얼리티를 말하지는 않는다. 현실의 사건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해서 현실성이 확보되지는 않는 것이다.


『김지영』 때는 사례들이 더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면,이번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김지영의 사례들은 (사례들이 ‘픽션이라 과장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만,)실제로 보편적인 공감대가 있었다.

『사하맨션』은 좀 더 현실과의 이음새가 엉성해 보인다.

그 사건들을 하나의 그릇 안에 담기에는 좀 답답한 느낌이 있다.

사건들이 간략하게 설명되기 때문일까. 현실에서의 복잡한 인과관계를 싹둑 잘라버렸기 때문일까. 작위적인 느낌이 먼저 든다.


캐릭터들의 사연도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어딘지 모르게 ‘비극을 위한 비극’을 만들어 놓은 느낌.

『사하맨션』은 비극을 겪은 불쌍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맞지만,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 아닌가.사회적 사건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현실성이 생기지 않듯이, 

‘현실은 더하다’라는 말로 작위성을 변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개인의 욕망을 비추기보다는 시스템적으로만 접근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 아쉬웠다.

계급투쟁으로만 인물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느낌.

때문에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착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워야 하고, 지나치게 서로를 보살피고 지나치게 진지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하맨션은 현실 속에서 좌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 같아 보이기도 한다.


││ ‘타운’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이상한 도시국가.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국가에서 사하맨션은 유일한 통로 혹은 비상구 같은 곳이다. ││ p. 33 


실제로 입주자 선정을 위해 공동으로 머리를 맞대거나, 공동 수도, 공동육아, 

공동 텃밭, 공동 방범(?) 등 대안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개별 호수가 부여되면서 공동성을 빠져나와 개인성이 확보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너무나도 쉽게 그 개인성이 침범돼서 놀라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곳은 보이지 않는 공동의 목표가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하맨션은 그냥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인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서는 필히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나와야 하고, 목소리가 나와야 하고,

어떤 ‘영웅’이 나와야만 한다. 

우리가 도경이나 우미에게 기대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진경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감정이다.


가난과 범죄, 출산과 생계. 그 무게만으로도 힘겨운 사람들의 어깨 위에 

다시 사명감이 지워진다. 이것은 너무 무겁다.


앞서 지적한 부분들이 분명히 작품의 주제의식에는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오래된 스타일인 것도 사실이다.

사하맨션과 관련된 두 노인이 반정부 운동 경력이 있었다는 과거가 드러나는 부분은 그래서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 공동의 목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희생되는 사람과 저항에 동조하는 사람만 있을 뿐.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인 건 아닐까.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한 전체주의인 것인가.


저자는 그런 면을 의식하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 덤덤히 읊는 남자에게 우미는 그들이 왜 도와주는 거냐고 물었다. 남자는 그들이 왜 도와주는 것 같은지 되물었다.

“연구소의 일에, 반대하는 분들인가요?”

잠시 정적. 그리고 남자가 대답했다.

(…)

─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 283-284



하지만 계급 문제를 다루고, 최하위층 계급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누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나 닐 블롬캠프의 〈디스트릭트 9〉, 〈엘리시움〉 같은 영화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혁명이나 게릴라, 반정부 같은 낡은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저자의 바람대로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 속에서 동화나 신화들이 직접적으로 끼어들고 있는 이유는 

이 소설이 노골적인 비유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백설공, 토끼와 자라, 판도라의 상자… 

그렇게 이 소설을 하나의 거창한 우화로 생각하다면, 

앞에서 얘기했던 문제점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SF를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우화를 위한 SF에 가까웠던 것 같다.


││ 이 소설을 SF라고 생각하며 쓰진 않았어요. SF 영화에서 많이 다루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는 부분은 있지만, 미래 사회를 상상하며 쓴 소설은 아니에요. ││  _조남주, 예스24와의 인터뷰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 읽고 난 전체적인 인상은 

작가의 야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그 시도 자체로 감탄하게 했다.


작년에 읽었던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낀 바 있다.

한 권의 소설 안에 그 많은 이야기와, 그 많은 담론을 담겠다는 의욕과 시도는 독자들에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그것도 여성작가들에게서 이런 시도들이 계속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성 작가들의 야심찬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들의 야심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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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실험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한 어느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
딜런 에번스 지음, 나현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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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실험은 문명의 붕괴 이후를 가상으로 설정해서 

생존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일종의 역할극이었다. 

하지만 실험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이 책은 그 자초지종을 담은 일종의 실패담이다. 


저자는 실패의 원인이 뭔지를 계속 되묻고, 그 원인들을 파고든다.

특히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인 자신에 대해 혹독하고 잔인할 정도로 파고든다.

(실험을 중도 하차하며 정신병원까지 입원했던 그로서는 물론처음부터 이렇게 냉철하게 실패를 바라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난장판이 되어가는 유토피아를 보다 보면 코믹하면서도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머쓱한 자기변명 같은 느낌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유토피아란 단어가 워낙에 거창해서 그렇지 

사실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이루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저자가 유토피아 실험과는 별도로 새로운 가정을 거의 동시에 꾸린 것은 그런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독립된 모든 유형의 가정은 유토피아의 본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케일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유토피아를 꿈꾼다.


저자는 스케일이 남달랐다. 

직장도 때려치우고 전 재산을 처분하고 나선 실험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저자가 ‘1세계 백인 남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고학력에, 직장과 집도 있는 건장한 영국 남자가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망해버린 문명을 실험한다는 게 

일종의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진다.

제정신을 차린 저자도 그런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 실험 전체는 사기극 내지 엄청 긴 캠핑 여행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본 서구인 한 무리가 도시 생활을 과시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강인한 오지 사람이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 같았다. ││ p. 233


││ 부유한 서구인들이 재미 삼아 이런 것들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남들에겐 불쾌한 일이었을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 p. 261


조한혜정의 『선망국의 시간』을 보면, 

유럽의 청년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실험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이 있다며 부러워한다. 

젊은이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위해 기꺼이 땅을 제공하고 

자본을 투자할 여유가 우리에게 있을까. 

물론 저자는 자비를 털어 실험을 한 것이긴 하지만, 

유토피아 실험장 주변에는 다른 대안적인 공동체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겁내지 않는 것 같았다.


││ 북유럽의 특징은 무엇보다 공터가 많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다음 7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인디언 추장의 말을 이곳 주민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공유지 곳곳에서는 날마다 채식 그린 마켓 등이 펼쳐지고 임시 텐트극장과 수리하여 고친 놀이기차가 다니는 임시 놀이터가 차려졌다. 버려진 옥상 주차장을 텃밭으로 가꾸어 독특한 자신들만의 쉼터로 만든 곳은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세계 유명 클럽으로 변한다. 청년들의 실험장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방황과 실업으로 고민이 많다는데 막상 이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시민’처럼 살고 있다. 널널한 시간 속에서 의논하면서 사는 삶 말이다. ││ p. 53, 조한혜정 『선망국의 시간』


그렇담 실패한 유토피아 실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당연히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유토피아 실험은 시민사회와 도시생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문명과 동떨어진 유토피아 공동체는 나쁜 것들의 집합체 같다. 

일상생활의 편리성이 사라진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한적한 시골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부대껴야 한다는 점은 

도시보다 더 심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곳은 기대만큼 순수하지도 않았고, 자유롭지도 않았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도시와 사회는 우리들의 예상보다 부패한 것도 아니고,

억압적인 시스템도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실험은 이제껏 인류가 겪어온 과정을 다시 겪어보려는 시도다. 

그리고 이전 인류가 포기한 삶을 내가 성공시켜 보이겠다는 꿈이다.

그것은 터널밖에 보지 못하는 현대인이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모험이다.


││ 여기서 터널 시야를 가진 사람이란 “전체 결과를 몰라도 또는 전체 결과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도, 현대 사회의 부를 창출하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사업에서 자기 역할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만일 모두가 글로벌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나 연필 한 자루라도 혼자 만드는 법에 골몰한다면 전체 시스템은 서서히 작동을 멈출 것이다. 우리 모두 생각만 많아져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상태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 p. 305


우리는 과정의 한 부분밖에 보지 못한다.딱 그만큼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체를 조망해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경험하고 싶은 욕망은 더욱 커진다.


이는 조급한 어린아이의 욕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유토피아 실험을 벌인 저자의 동기는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좁은 보호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만의 힘으로 

삶을 영위해 보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과 닮아있다. 

이 실험이 치기 어린 젊은이의 시도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40대에 들어서 이 실험을 시작했다. 

중년이 넘어서도 이런 돈키호테 같은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저자가 부러워진다.

우리나라의 한계는 〈나는 자연인이다〉 속 자연인들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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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닮은 너에게 애뽈의 숲소녀 일기
애뽈(주소진) 지음 / 시드앤피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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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봤던 동화책을 떠올린다.
줄거리 없이 상황만 나열된 그림책.

글도 물론 있지만 상당히 부실하다.
글에 맞는 그림을 그린 거라기 보다는
그림에 맞는 글을 적당히 붙인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좀 억지스러울 때도 있다

본문 마다 느닷없는 영문 번역이 딸려있는데
이건 분위기 조성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명작동화 같은 낭만적 분위기를 위한 장치가 아닐까.

이 모든 게 작가의 그림을 살리기 위한 장치들이다
어찌보면 글은 그림을 책으로 엮기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 같기도 하다. 그림의 분위기에 푹 빠지기 위해서 약간의 글과 영문본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실로 명작동화집을 떠올리는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공주풍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수입된 공주풍 이야기들이 의례히 그렇듯이, 어딘지 모르게 국적과 시대를 알 수 없는 스타일이다.

숲소녀 캐릭터는 동양인 같기도 하고 서양인 같기도 하다(눈동자가 파란색).
아이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하다.
숲은 외국 같은데 산은 우리나라 같다.
과거의 어느 순간 같다가도 현재 같기도 하다.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판타지의 공간 아닐까.

엄지공주, 헨젤과 그레텔 같은 동화나 소공녀, 빨간머리앤, 작은아씨들 같은 작품을 보고 자란 성인들이 다시 그 시절의 분위기에 푹 빠지고 싶을 때 읽는 책으로 보인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하드커버로 엮어낸 그림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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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문보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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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일기이자 소설인 글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이것이 작가가 받은 상처들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상처는 사소한 연애부터 본질적인 창작론까지 다양하다.


││ 특히 나처럼 시를 쓰는 사람들은 

“예술 하는 놈들이 꼭 아픈 걸 티내더라.”랄지 

“아파야 예술을 하나?”라는 추궁을 받기 십상이므로 더욱 그랬다. 

그런 시선들은 나를 아프게 했다. ││ p. 124-125


그래서 내가 얻은 결론은, 그는 더 아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계속 창작을 할 것이고,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시를 계속 쓰고, 책을 내고, 브이로그를 하고, 글 딜리버리를 할 테니까 말이다.그게 독자들에게는 훨씬 유익하다.

독자는 좋은 글을 더 보기 위해 그의 고통을 바라게 된다.

창작물을 즐기는 건 그런 가학적인 행위인가 보다.


하지만 그런 독자들의 반응이 없다면 

작가는 글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독자의 반응 때문에 작가는 다시 살 수 있다.

독자와 작가는 그렇게 공생한다.


││ 어느 날 이상한 글을 썼는데, 

그러니까 나는 개떡같이 말했는데 누군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게 시구나 싶어서 시를 썼다. 

개떡같이 말했기 때문에 찰떡같이 알아듣는 누군가 생겼구나, 믿으며. 

그러면 앞으로 훌륭한 개떡이 되도록 애쓰자. 

독자가 찰떡이기를 바라면서.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해심이 아니라 이해력이기 때문에. ││ p. 121


이 모든 게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돈을 벌고, 돈을 쓰고, 돈이 없어 고생하고...

그 모든 게 고통이고 상처다. 

알고 보면 독자와 똑같은 종류의 상처.

시인의 상처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 반면 나는 상어형 인간이다. 

부레가 없어서 멈추면 죽는 상어처럼, 

그래서 잘 때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상어처럼, 

가만히 있으면 죽어버린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 딴짓을 시전할 뿐인데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산다고 생각한다. ││ p. 130


시인의 글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종의 과정이다.

최소한 치유는 하지 못할지언정, 그 상처를 예쁘게 포장해 준다.

포장은 중요하다. 사람은 최소한의 포장만으로도 견딜만한 힘을 얻는다.


그런데 시인이 자기 치유는 독자의 상처까지 보듬어주게 된다.

거기에 공생의 비밀이 있다.

시인에 의해 예쁘게 꾸며진 상처는 

흉터가 남더라도 예쁜 문신처럼 남는다.

우리는 고통마저 아름답게 추억하게 될 것이다.


시인이 하는 일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의 상처를 더 예쁘게 만들어 주는 것.


││ 구원은 이상하다. 

한 번 끝난 인생이 다시 끝날 때 그 사이에 구원이 낑겨 있다. 

구원은 늘 막간에만 드러난다. 

아코디언처럼 죽음이 쫙 펼쳐질 때 주름 사이사이에 구원이 숨어 있다. 

오호라. 구원아, 너 거기 끼어 있었구나? ││ p. 240


시인에게 구원은 언제나 살아가는 사이사이에 순간적으로만 존재한다.

시인이 독자에게 해줄 수 있는 구원도 그런 것이다.

상처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예쁘게 꾸며줄 수는 있다. 

어차피 독자가 시인에게 줄 수 있는 것도 그런 일시적인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다. 

이게 다 상처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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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죽어도 지키는 사소한 습관
스가와라 게이 지음, 노경아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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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약간 오해를 불러올 수 있겠다.

여기 소개된 습관들을 실천하면 당장에 돈이 생긴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인데,

부자가 되는 마음가짐이라기에는 무리가 있고,

가난해지는 마음가짐을 피해보자는 쪽에 가깝다.


││ 여기까지 읽고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뭐야, 절약에 관한 책이었어? 티

끌 모아 태산이라고 푼돈 아껴서 돈을 모으라는 거였군.”

이렇게 단정 짓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원래 꼼꼼한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티끌 모으기’는 오히려 내게 제일 맞지 않는 방식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편의점이나 균일가 매장에서 생각 없이 푼돈을 쓰는 것은 마음이 해이해져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우리 생활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느슨해져 있을지 모른다.  ││ p. 52


마음가짐만으로 부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소한 습관에 드러나는 흐트러진 마음가짐의 예를 보다 보면

저렇게 살다가는 가난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어진다.

가난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구질구질하다’는 말이 아쉬운 대로 가장 근접한 표현 같다.

실제로 그렇게 살면 돈이 줄줄 세고 모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가난한 사람의 원인이 사실은 가난한 마음에 있다고

주장하고, 품격 있는 고상한 사람을 지향하자고 말한다.

당장 부자는 될 수 없지만, 부자처럼 품위 있게 살 수 있다는 주장.

그래서 제목만 보고 다른 걸 기대하다가는 실망감이 클 것 같다.


││ 그렇다. 행복은 돈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돈에 대한 시선도 크게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부자보다 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 p. 177


하지만 부자들이 모두 고결한 것은 아니다.

천박한 부자도 널리고 널렸다.

최근에 벌어진 재벌가의 사건들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부자들의 격이 일반인보다 더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가난뱅이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품격에는 돈이 안 든다. 


││ 풍족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우선 그런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해보는 게 어떨까? 

돈 한 푼 들지 않는 방법이니 지금 바로 실천해보자.  ││ p. 62


저자라면 천박한 부자들을 가리켜 그들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 같다.


단점이라면 모든 주장이 저자 개인의 주관적인 가치관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관이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때로는 다분히 미신적이기까지 하다.

(출판사도 마케팅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는지 부자 되는 부적을 부록으로 껴줬다)


││ 지폐 방향에 관해서는 

초상화의 머리가 아래를 향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위를 향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사람을 물구나무 세우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머리를 위로 두는 편이다. 

그걸 보고 어떤 부자가 “그렇게 하면 서 있는 자세라서 돈이 나가기 쉬워. 머리를 밑으로 해야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 p. 156


그저 중요한 건 ‘기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부자가 되고 있다는 기분. 이미 부자가 될 준비가 됐다는 기분.

인간은 기분에 크게 좌우된다.

계속해서 돈을 벌고, 희망을 가지고 생계를 이어나갈 힘을 얻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거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이 사소한 생활 태도들이 정말 중요한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이 책이 진짜로 누군가를 부자로 만들어 줄지도.

자꾸 그런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신중하게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것이다. (→제일 슬픈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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