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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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82년생 김지영』이 생활밀착형 사례 모음집 같은 느낌이라면,

『사하맨션』은 사회 밀착형 사례 모음집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근래에 겪어왔던 사회적 사건들을 재조합된 상태로 다시 읽게 되는데, 

기시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 사고 실험이 아니라 그냥 현실 그 자체로 읽힌다. 


메르스 사태, 물 대포 진압, 세월호, 촛불집회 그리고 공공 시스템의 민영화 등등.

픽션으로 치부해도 될 정도의, 지나친 망상처럼 보일 수도 있을 일들이 사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사실. 그 사실에 거꾸로 과거의 현실을 감탄(?) 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SF로 다루기에 적합하다. 

시치미 뚝 떼고 현실의 이야기를 신랄하게 그릴 수 있으니까.

작가는 소설 초반에 가상 도시의 설정을 디테일하게 공을 들여 설명한다.

현실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는 이 설명은, 이 소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나타날 수 있는, 혹은 이미 나타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SF적 설정이 디테일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디테일이 무조건 내적인 리얼리티를 말하지는 않는다. 현실의 사건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해서 현실성이 확보되지는 않는 것이다.


『김지영』 때는 사례들이 더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면,이번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김지영의 사례들은 (사례들이 ‘픽션이라 과장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만,)실제로 보편적인 공감대가 있었다.

『사하맨션』은 좀 더 현실과의 이음새가 엉성해 보인다.

그 사건들을 하나의 그릇 안에 담기에는 좀 답답한 느낌이 있다.

사건들이 간략하게 설명되기 때문일까. 현실에서의 복잡한 인과관계를 싹둑 잘라버렸기 때문일까. 작위적인 느낌이 먼저 든다.


캐릭터들의 사연도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어딘지 모르게 ‘비극을 위한 비극’을 만들어 놓은 느낌.

『사하맨션』은 비극을 겪은 불쌍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맞지만,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 아닌가.사회적 사건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현실성이 생기지 않듯이, 

‘현실은 더하다’라는 말로 작위성을 변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개인의 욕망을 비추기보다는 시스템적으로만 접근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 아쉬웠다.

계급투쟁으로만 인물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느낌.

때문에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착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워야 하고, 지나치게 서로를 보살피고 지나치게 진지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하맨션은 현실 속에서 좌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 같아 보이기도 한다.


││ ‘타운’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이상한 도시국가.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국가에서 사하맨션은 유일한 통로 혹은 비상구 같은 곳이다. ││ p. 33 


실제로 입주자 선정을 위해 공동으로 머리를 맞대거나, 공동 수도, 공동육아, 

공동 텃밭, 공동 방범(?) 등 대안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개별 호수가 부여되면서 공동성을 빠져나와 개인성이 확보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너무나도 쉽게 그 개인성이 침범돼서 놀라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곳은 보이지 않는 공동의 목표가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하맨션은 그냥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인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서는 필히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나와야 하고, 목소리가 나와야 하고,

어떤 ‘영웅’이 나와야만 한다. 

우리가 도경이나 우미에게 기대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진경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감정이다.


가난과 범죄, 출산과 생계. 그 무게만으로도 힘겨운 사람들의 어깨 위에 

다시 사명감이 지워진다. 이것은 너무 무겁다.


앞서 지적한 부분들이 분명히 작품의 주제의식에는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오래된 스타일인 것도 사실이다.

사하맨션과 관련된 두 노인이 반정부 운동 경력이 있었다는 과거가 드러나는 부분은 그래서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 공동의 목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희생되는 사람과 저항에 동조하는 사람만 있을 뿐.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인 건 아닐까.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한 전체주의인 것인가.


저자는 그런 면을 의식하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 덤덤히 읊는 남자에게 우미는 그들이 왜 도와주는 거냐고 물었다. 남자는 그들이 왜 도와주는 것 같은지 되물었다.

“연구소의 일에, 반대하는 분들인가요?”

잠시 정적. 그리고 남자가 대답했다.

(…)

─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 283-284



하지만 계급 문제를 다루고, 최하위층 계급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누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나 닐 블롬캠프의 〈디스트릭트 9〉, 〈엘리시움〉 같은 영화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혁명이나 게릴라, 반정부 같은 낡은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저자의 바람대로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 속에서 동화나 신화들이 직접적으로 끼어들고 있는 이유는 

이 소설이 노골적인 비유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백설공, 토끼와 자라, 판도라의 상자… 

그렇게 이 소설을 하나의 거창한 우화로 생각하다면, 

앞에서 얘기했던 문제점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SF를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우화를 위한 SF에 가까웠던 것 같다.


││ 이 소설을 SF라고 생각하며 쓰진 않았어요. SF 영화에서 많이 다루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는 부분은 있지만, 미래 사회를 상상하며 쓴 소설은 아니에요. ││  _조남주, 예스24와의 인터뷰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 읽고 난 전체적인 인상은 

작가의 야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그 시도 자체로 감탄하게 했다.


작년에 읽었던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낀 바 있다.

한 권의 소설 안에 그 많은 이야기와, 그 많은 담론을 담겠다는 의욕과 시도는 독자들에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그것도 여성작가들에게서 이런 시도들이 계속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성 작가들의 야심찬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들의 야심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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