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실험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한 어느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
딜런 에번스 지음, 나현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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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실험은 문명의 붕괴 이후를 가상으로 설정해서 

생존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일종의 역할극이었다. 

하지만 실험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이 책은 그 자초지종을 담은 일종의 실패담이다. 


저자는 실패의 원인이 뭔지를 계속 되묻고, 그 원인들을 파고든다.

특히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인 자신에 대해 혹독하고 잔인할 정도로 파고든다.

(실험을 중도 하차하며 정신병원까지 입원했던 그로서는 물론처음부터 이렇게 냉철하게 실패를 바라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난장판이 되어가는 유토피아를 보다 보면 코믹하면서도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머쓱한 자기변명 같은 느낌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유토피아란 단어가 워낙에 거창해서 그렇지 

사실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이루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저자가 유토피아 실험과는 별도로 새로운 가정을 거의 동시에 꾸린 것은 그런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독립된 모든 유형의 가정은 유토피아의 본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케일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유토피아를 꿈꾼다.


저자는 스케일이 남달랐다. 

직장도 때려치우고 전 재산을 처분하고 나선 실험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저자가 ‘1세계 백인 남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고학력에, 직장과 집도 있는 건장한 영국 남자가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망해버린 문명을 실험한다는 게 

일종의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진다.

제정신을 차린 저자도 그런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 실험 전체는 사기극 내지 엄청 긴 캠핑 여행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본 서구인 한 무리가 도시 생활을 과시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강인한 오지 사람이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 같았다. ││ p. 233


││ 부유한 서구인들이 재미 삼아 이런 것들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남들에겐 불쾌한 일이었을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 p. 261


조한혜정의 『선망국의 시간』을 보면, 

유럽의 청년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실험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이 있다며 부러워한다. 

젊은이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위해 기꺼이 땅을 제공하고 

자본을 투자할 여유가 우리에게 있을까. 

물론 저자는 자비를 털어 실험을 한 것이긴 하지만, 

유토피아 실험장 주변에는 다른 대안적인 공동체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겁내지 않는 것 같았다.


││ 북유럽의 특징은 무엇보다 공터가 많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다음 7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인디언 추장의 말을 이곳 주민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공유지 곳곳에서는 날마다 채식 그린 마켓 등이 펼쳐지고 임시 텐트극장과 수리하여 고친 놀이기차가 다니는 임시 놀이터가 차려졌다. 버려진 옥상 주차장을 텃밭으로 가꾸어 독특한 자신들만의 쉼터로 만든 곳은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세계 유명 클럽으로 변한다. 청년들의 실험장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방황과 실업으로 고민이 많다는데 막상 이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시민’처럼 살고 있다. 널널한 시간 속에서 의논하면서 사는 삶 말이다. ││ p. 53, 조한혜정 『선망국의 시간』


그렇담 실패한 유토피아 실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당연히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유토피아 실험은 시민사회와 도시생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문명과 동떨어진 유토피아 공동체는 나쁜 것들의 집합체 같다. 

일상생활의 편리성이 사라진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한적한 시골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부대껴야 한다는 점은 

도시보다 더 심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곳은 기대만큼 순수하지도 않았고, 자유롭지도 않았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도시와 사회는 우리들의 예상보다 부패한 것도 아니고,

억압적인 시스템도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실험은 이제껏 인류가 겪어온 과정을 다시 겪어보려는 시도다. 

그리고 이전 인류가 포기한 삶을 내가 성공시켜 보이겠다는 꿈이다.

그것은 터널밖에 보지 못하는 현대인이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모험이다.


││ 여기서 터널 시야를 가진 사람이란 “전체 결과를 몰라도 또는 전체 결과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도, 현대 사회의 부를 창출하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사업에서 자기 역할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만일 모두가 글로벌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나 연필 한 자루라도 혼자 만드는 법에 골몰한다면 전체 시스템은 서서히 작동을 멈출 것이다. 우리 모두 생각만 많아져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상태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 p. 305


우리는 과정의 한 부분밖에 보지 못한다.딱 그만큼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체를 조망해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경험하고 싶은 욕망은 더욱 커진다.


이는 조급한 어린아이의 욕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유토피아 실험을 벌인 저자의 동기는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좁은 보호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만의 힘으로 

삶을 영위해 보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과 닮아있다. 

이 실험이 치기 어린 젊은이의 시도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40대에 들어서 이 실험을 시작했다. 

중년이 넘어서도 이런 돈키호테 같은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저자가 부러워진다.

우리나라의 한계는 〈나는 자연인이다〉 속 자연인들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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