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클래식 수업 - 알아두면 쓸모 있는 최소한의 클래식 이야기
나웅준 지음 / 페이스메이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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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한 입문서다.

내용도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고 알찬 편이었다. 

친절한데 내용까지 알차니 즐겁게 읽을 수밖에.


클래식의 대중화에 애쓰는 저자의 애정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저자는 트럼펫 연주자(트럼펫터!)로서 클래식 공연 해설자, 뮤직테라피스트, 클래식 관련 네이버 오디오클립 운영까지 다방면으로 클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클래식들로 흥미를 돋우고, 기본적인 정보들을 소개하더니,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사를 훑고, 각 악기들을 설명해준다.

입문서로서 더 이상 친절하고 알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성이었다.


정보 전달도 전달이지만, 클래식에 대한 핵심적인 논점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언급해 줘서 깊은 이해를 도왔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QR코드를 통해 저자가 만든 오디오클립의 클래식 음악과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책 한 권으로 클래식을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시리즈화 되어 더 심화된, 혹은 특화된 후속작들이 나와 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저자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좋은 책이었다.


나는 클래식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클래식은 어렵고, 지루하고, 잘난 척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게 선입견인 것만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런 대중적인 클래식 입문서들을 보면 항상 느끼는 점은,

클래식 음악은 고정돼 있고, 듣는 사람이 클래식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온갖 음악들이 나 좀 들어달라고 아양을 떨고,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 안달인 상황에서, 관심도 안 가는 음악을 듣기 위해 ‘노력’까지 해야 한다는 게 어이없게 느껴졌다.


그 정도의 음악이라면 도태되어 사라지는 게 맞지 않을까?


게다가 클래식은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모습에서 바꾸려는 노력이 없이 고정되어버렸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기에 맞추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원래 모습에서 벗어나면 클래식이 아닌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클래식이라고 하면 베토벤, 모차르트 등 고전적인 작곡가들의 음악을 떠올리는 것처럼 당시에도 비슷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작곡가들은 작곡 형식도 그렇고 악기 역시도 과거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p. 198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예술은 없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전통이란 이름으로 유지해야 한다면, 판소리나 사물놀이를 듣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어쩌면 뮤지컬이나 영화가 시대에 적응해야 할 클래식의 의무를 대신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음악가 한스 짐머는 이렇게 말했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영화음악 작곡가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자주 관현악 연주를 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영화음악이 없었다면 값비싼 관현악은 사라질 겁니다.”

- 맷 슈레이더 엮음 『스코어 오리지널 인터뷰집』 p. 133


아이돌 음악처럼 신곡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마 과거의 유럽 사회에서는 지금같지 않았을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근사한 음악들이 쏟아져나오고,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퀸보다도 슈퍼스타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발전이나 변화가 없는 똑같은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 대단히 불운한 시기를 맞이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자기 젊었을 적 노래만 반복해서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서 저자는 클래식의 변천을 사람의 성장과 비교하며 오늘날의 클래식을 ‘꼰대’에 비유한 건 아닐까.


그럼 지금의 클래식은 과연 어떤 시기일까? 우리나라 클래식 시장을 기준으로 냉정하게 판단해본다면 인생의 황금기를 넘어 속된 말로 ‘꼰대’가 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p. 166


저자 본인이 이렇게 클래식을 스스로 ‘까’줬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이미 전성기가 끝나버린 퇴물 음악을, 우리가 그렇게까지 경직되어서,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같은 걸 느끼면서, 혹은 반대로 우월감을 느끼면서까지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정확한 출발점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작가의 자기 비판은 중요하다.


클래식의 높은 문턱을 넘는 것은 클래식이 문제가 있는 음악이라는 걸 전제하고 나서야 가능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에 권위가 있을 수 없다.


저자는 ‘클래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엔 너무 매력적입니다.’ 라는 태도로 클래식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수업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저자가 클래식이 꼰대가 된 시대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잘 생각해보면, 

클래식이라는 음악이 굉장히 성숙하고 완성된 음악 형태라는 말이기도 하다.


힙합 음악은 현재 역동하는 음악이고,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젊은 음악이다.

역사가 비교적 짧고, 어린 세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클래식은 고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클래식 또한 비슷한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발전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다듬어져 왔기 때문에 그 형태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도전해 가며 만들어온 끝에 비로소 지금의 ‘완성형’ 음악 체계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래식은 그 켜켜이 쌓인 성취들 때문에 도무지 얕볼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낸다. 확실히 듣지 않고 그냥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단히 운이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 시대의 사람들이 꿈꿨던 궁극의 클래식을 즐길 수 있다.


분명히 알고 들으면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내가 노력해서 듣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왜냐면 저자가 설득력 있게 주장했듯이, 정말로 클래식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클래식의 아우라를 우리 생활에 더한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근사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게 아무리 고되고 피곤한 퇴근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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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브루스 고든 지음, 이재근 옮김 / IVP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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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이를 잇는 존재였다. 

구교와 신교, 중세와 르네상스, 학계와 신학계,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외국인과 자국인, 루터와 루터 이후...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는 양쪽 모두와는 구별되는 자기만의 시선을 갖게 되었다.그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가 성찬에 대한 칼뱅의 입장이다.


사실상 칼뱅은 성찬 논쟁에서 다른 진영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입장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대한 그는 미사를 우상숭배로 비난하는 프로테스탄트 합창단의 일원이 되었다. 츠빙글리파에 반대한 그는 이들이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면서 버린 것이 너무 많다고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칼뱅은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육체로 임재한다고 주장하는 루터파의 편재설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p. 305


그리고 그런 중간자적 역할은 양쪽 모두를 설득하고 만족시켜야 했기에 고도의 지적 능력과 확신, 그리고 사명감을 필요로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칼뱅의 고민은 그리스도가 성례 안에 물리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성찬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표현할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츠빙글리파와 루터파를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이것을 성취해야만 했다. p. 305


종교 개혁의 문은 열렸지만, 이후의 상황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복잡해진다.

반대할 때는 뭉치기가 쉽다. 하지만 지지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박근혜 탄핵을 거치면서 똑똑히 보아오지 않았나.


책은 그런 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칼뱅이, 자신이 믿었던 교리를 유럽 전체에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생을 꼼꼼하고 균형 있게 담아내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방대한 분량이 필요했다. 그것을 다 읽어낸 후에야 어렴풋하게 그림이 그려진다.


처음에는 칼뱅이란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지만,

칼뱅의 사역들을 보면서 계속해서 한국 교회의 개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부패하고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면에서 종교 개혁 당시의 가톨릭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칼뱅을 비롯한 개혁가들의 노력도 무색하게, 오백여 년 만에 다시 교회는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칼뱅의 사역들은 ‘우리의 개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거울로 삼아 보게 된다. 칼뱅이 이스라엘 백성의 교훈을 거울삼았듯이 말이다.


다윗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예표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은 16세기 사람들에게 교훈과 지식을 준다. 칼뱅의 말로 하면, 이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 p. 507


재미있었던 점은,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칼뱅 본인마저도 수없이 많은 이단 논쟁에서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아직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단이 아님을 증명하는 과정이 칼뱅의 사상을 단단하게 만든 것 같다. 


우리는 ‘가짜’와 어떻게 다른 ‘진짜’인 걸까. 

한국 교회가 개혁을 미루고 있는 동안 ‘신천지’같은 이단이 개혁의 탈을 쓰고 기존 교회들을 비판하고 나서는 판이다. 우리는 그들이 틀렸고 우리가 옳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결국 근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칼뱅은 다시 1세기 초대 교회와 교부들에게로 돌아갔다. 특히 그는 사도 바울의 적자를 자처했다. 바울과 자신 사이에 있는 천오백 년의 시간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근본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부터가 중요했다. 예수님에게로, 성경에게로,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칼뱅에게 가톨릭의 그 휘황찬란한 장식들은 모두 무의미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기초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기초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입니다.” p. 519


칼뱅 개혁의 또 다른 교훈은 타협 없는 고집이다. 

물론 칼뱅도 수없이 많은 타협을 했다. 전략적인 고지를 선점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칼뱅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고집스러운 신학자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타협을 극도로 싫어했고, 어쩔 수 없을 때만 우회적으로 했다. 수많은 친구들과 등을 돌렸다. 개혁은 기본적으로 기성과의 충돌이고 전복이다. 그런 역동적인 변화를 온건한 방식으로 이루려는 건 안일한 생각이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칼뱅도 조국에서 쫓겨나 망명인이 되었다. 개혁은 전쟁을 동반했고, 일상생활을 불안으로 물들게 했다. 그 모든 것들을 걸고서라도 이뤄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칼뱅은 거침이 없었다.


설교자와 예언자의 몫은 건전한 교리로 훈련받는 것뿐만 아니라, 공격과 거절도 버텨 내는 것이다. 칼뱅은 저항을 바른 설교의 표지로 여겼다. 설교자는 청중과 대적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거친 말도 자주 필요하다. p. 521


개혁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칼뱅의 주변에도 그를 돕는 지지자나, 동료들, 비서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혁파 교회 공동체가 있었다. 칼뱅은 온 생애를 바쳐 개혁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바턴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맡기고 눈을 감아야 했던 모세처럼 말이다. 


유언에서 칼뱅은 자신의 약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아아 슬프다, 내가 그렇게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 욕망과 열정이 너무 식고 줄어들어서 이제 나는 내 존재와 행동이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다는 것을 잘 안다.” p. 590


그래서 그에게는 교육이 중요했다. 

젊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은 그에게 마지막 사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칼뱅의 이론을 배우고 익혀 더욱 발전시켜줄 후계자들, 그들은 개혁 교회가 세워지는 전 유럽으로 파송되어 개혁 교회의 기틀을 잡았다. 

칼뱅의 역할은 거기까지였고, 그의 이론이 완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셈이다.


그는 제네바를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는 데 아카데미는 필수라 보았기에, 새 건물들을 짓고 도서관을 만들고 수준 높은 교사를 임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했다. 아카데미가 너무 늦게 설립되어 칼뱅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남긴 유산의 핵심 부분이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성직자를 가르치기 위해 집필한 『기독교강요』와 함께 제도적 뼈대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강요』 라틴어 최종판이 등장한 해에 아카데미가 문을 연 것은 우연의 일치라 하기 어려워 보인다. p. 531


마지막으로 얻은 교훈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개혁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누구라도 칼뱅이 직접 시편을 해설하면서 한 말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교회는 망했지만, 그[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분의 놀라운 능력으로 교회를 죽음에서 새로워진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교회가 항상 외형적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보이도록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이는 때도 언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순식간에 새로 창조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놀라운 구절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어떤 황폐한 상황도, 하나님이 이전에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사망의 흑암에서 불러내시는 것이 그분의 합당한 일하심이라는 소망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한다. p. 510


확신을 가진 다음 필요한 것은 오직 인내뿐이다. 칼뱅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역할을 다 해냈다. 


반면, 인내는 숨겨진 목적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능력이다. 순례는 세상의 악에 저항하는 투쟁이며, 고통은 그리스도인에게 할당된 몫이다. 오직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이들만 승리할 것이다. p. 591 


오백여 년이 흐른 지금, 바턴은 우리에게 넘어온 것 같다. 칼뱅의 16세기를 ‘거울’로 삼은 우리의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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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의 대한민국 입시지도
심정섭 지음 / 진서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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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SKY캐슬>을 보질 않아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얼핏 듣기로는 드라마 속 학생들이 최상위권 학생들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책에 의하면, 최상위 학생들은 보통 영재고나 유명 과학고에 있다.

문과 학생이라고 해도 수시 비율이 70퍼센트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뛰어난 인재들은 정시 이전에 각 대학에서 데려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수능과 내신은 중요하다. 

하지만, 최상위권 학생에겐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아마도 드라마는 상위 0.1%의 학생들이 아니라

상위 0.1%의 상류층 가정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그 둘이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부모가 명문대 출신이어도 자녀들은 공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공부란 우리나라 입시에서의 ‘문제지 잘 풀어서 선호하는 대학을 가는’ 좁은 의미의 공부를 말한다.서울의 대치동이나 목동 같은 명문 학군에도 이런 자녀들이 많다.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자사고나 강남 일반고를 다녔는데도 Top30위권 혹은 인서울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p. 278-279


이 책은 영어유치원부터 유학, 대안학교까지 

입시의 거의 모든 걸 망라했다.

특히 그 속에 입시에 대한 핵심을 찌르는 통찰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통찰대로라면 입시는 무의미해진다.

‘어떻게든 일단 대학에 집어넣는 방법’부터

‘대학에 꼭 가야 할까?’까지 모두 아우른다.


입시가 무의미해진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대학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대학이 아니라 대학 이후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 가다.

원래는 상위 10% 대학을 나오면 상위 10%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이름 있는 대학에 적성도 맞지 않는 아이를 보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그러면 대학이 더 풍성하고 행복한 어른이 되게 만들어 줄까?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아직도 이전 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대학 생활은 해봐야지, 남들 눈도 있는데, 남들 다 가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입시는 전략의 문제에 앞서 소신의 문제고 용기의 문제가 된다.


책을 보면서 놀란 것은,

전반적으로 이 사회가 너무 빨리 완성형 인간을 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대학이(그리고 모든 기업이) 뛰어난 인재보다는 

완성된 인재를 뽑기 원한다.

어차피 뛰어난 인재는 소수이기 때문에 그들이 채우고 남는 자리를 위해서는

완성된, 혹은 뛰어난 척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이었던 청소년들이 

어떻게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어떤 확신을 가져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그 방법에 대해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실패(재수 이상)도 몇 번 허용되지 않는 판에서. 선택에 대한 책임도 개인이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수능 한 번, 혹은 두 번으로 결정되고, 낙인찍히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일까.

그러니까 자꾸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서 입시 전략을 짜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이 혼자서, 혹은 가정 내에서 소화할 수 있는 실행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확고한 미래관을 가진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은 정규 교육과정에 특화된 

공부머리가 좋은 아이들일 뿐이고,

당연히 그런 아이들은 소수인 게 상식 아닌가.

우리나라는 소수의 공부머리가 좋은(공부머리가 두뇌 전체의 평가를 말하진 않는다)사람들만을 우대하는 사회인가?


슬프게도 그렇다.


우리에겐, 우리 아이들에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더듬더듬 찾아가는 건 열등한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원래 그렇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듯 자소서를 쓰게 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인간은 원래 변덕도 심하고 관심사가 이동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해 쥐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건 죄가 아니다.


어떻게 모든 인간이 같은 시기에 대학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기를 바란단 말인가그건 정부가 꾸는 꿈같은 거다. 규격에 맞춘 삶.

아이들이 왜 정부의 꿈을 이뤄주려고 자기 인생을 구겨 넣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교육 제도 자체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됐다.

신용등급이 나란 인간의 실제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은행들의 편의를 위해 지들 멋대로 등급을 매긴 것과 같이,수능 등급과 내신 등급은 진정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국가와 대학, 기업들의 편의를 위해 나의 일부를 단순하게 수치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게 마치 그 사람을 말해주는 모든 것인 양 사람들은 생각한다. 입시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이 과연 ‘나’를 위한 교육일까? 

학교 교육은 ‘나’를 위한 것을 주지 않는다. 

나는 ‘나’를 위한 교육을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한다. 

그것도 시험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말이다.

나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가장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맞춤형 교육은 독서다. 

지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교과서가 아니라 독서에 투자하고 있을까. 

불행한 일이다.


공교육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한 인간으로서 자라는 데 필요한 교육도 제공해주지 못하고,그렇다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족집게 학원도 되지 못한다.

교사들의 권위가 떨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엎드려 자는 것도 일리가 있듯이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해법도 결국에는 각자도생이다.

모든 가정이 공부를 하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와 함께 고민해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큰 흐름을 파악하고도 중심을 잡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기는 정말 쉽지 않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입시 레이스에 뛰어들지, 소신을 가지고 아이에게 맞는 다른 대안을 찾을지는 순전히 각 가정의 선택이다. p.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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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국의 시간 - 당신은 지금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나요?
조한혜정 지음 / 사이행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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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도 느꼈던 점인데,

진보적 이야기를 논하면서 과거의 한순간을 이상향으로 그리는 면이 있다.



먼저 <어디서 살 것인가>를 보면,

보행자 중심의 건축을 말하면서

갑자기 70~80년대 골목길 풍경을 가져온다.

저자가 회상하는 그 당시의 골목길은 이상적이기만 하다.

때문에 과거로의 회기만이 골목길 살리기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처럼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강북 골목길은 사람이 정주하는 공간이었다. 동네 주민의 거실이라고 할 만큼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콩나물 다듬고 할머니들이 담소 나누는 장소였고,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공간이었다. 골목길은 무엇보다도 ‘자연이 있는 외부 공간’이다. 하늘이 보이고, 1년 365일 24시간 달라지는 자연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p. 132


골목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정주하는 공간이 되었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가 지금 그리워 하는 것은 사람을 만날 수 있던 사람 냄새 나는 골목길 같은 공간이다. p. 133-134


아이들을 ‘천재 건축가’로 치켜세우면서 ‘새로운 공간 발견’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저자가 예로 드는 건 산업화 시대 버려진 공간에서 뛰노는 위험천만한 아이들의 모습이다.


도시를 좋게 만들려면 추억이 만들어질 만한 장소가 많아야 한다. 그런 장소를 만드는 데 가장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이 어린아이들이다. 어릴 적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숨겨진 공간과 버려진 땅을 찾아서 재미난 놀이터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 60



<선망국의 시간>에서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대안적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산업화 시대의 ‘이상화된' 동네에 가깝다.

물론 개인주의의 시대를 지나 ‘부족’의 시대가 다가온다고는 하지만,

과연 새로운 세대가 그런 ‘살 부대끼는’ 공동체를 원할까.

공동체는 항상 과거의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 걸까?


그냥 동네에 한군데 솥 걸어놓고, 누구든지 와서 밥을 먹을 수 있게 하자고 저는 계속 주장해왔어요. 그냥 밥값만 주고, 동네에서 국 잘 끓이는 사람, 반찬 잘 하는 사람 모여서 매일 밥을 해서 먹으면 거기서 공동체가 생겨나는 거거든요. p. 107


이들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과거의 경험에 묶여 있는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 같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간적 이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단지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그들과 잘 통하리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심지어 과거에도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나를 도울 수 있는 거리에 산다고 해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이웃사촌이 될 수 없다.

심지어 <선망국의 시간>도 그걸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런 프로그램을 동네마다 한다? 그건 또 아니고요. 어디서는 해봤는데, 사람들이 밥 먹으러 안 오기도 해요. 근대적 인간이 까다롭거든요. ‘내가 갈 가지인가?’하고 따지는 거죠. 차라리 돈 내는 거면 당당하게 가서 먹을 텐데, 약간 불편하게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밥 먹고, 이런 거 잘 못해요. 사실 그런 건 옛날 달동네 살던 친구들이 잘했어요. 그 친구들이 사회성도 머리도 좋고 훌륭했는데, 학원만 다니면서 자란 친구들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죠. p. 107


내가 더 대안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숨 좀 쉬며 살아볼까 합니다>에 등장하는 관계들이다.


약물의존증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이들과 그들의 도우미들에게 전하는 ‘다양한 거리에 자신의 응원단을 만든다’는 메시지이다. 핵심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강력한 응원단을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 수 없다. 중요한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의지하고 싶은’ 상대인 것은 아니다. 뜻밖에도 그리 가깝지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p. 184


하루에 씨 말대로 ‘다양한 거리에 응원단’을 만들려면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다양한 상황에서 조금씩이라도 자신의 단점이나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대상, 다시 말해 안전 기지’는 굳이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만들어줄 수 있다. 당사자가 ‘이 사람이라면 의지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응원단을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도 가능하면 많이 만들어두는 편이 좋다. p. 187



앞의 두 책 모두 온라인이 발달한 현재 상황을 감안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굳이 거리에 얽매이는 건 불필요한 전제 같다.


한 남성 유튜버가 여성 유튜버를 죽이러 가겠다고 나섰던 사건이 떠오른다.

굳이 죽이러 그 먼 길을 감수하고 갈 정도의 시대라면,

사람 살리러 가는 정도의 거리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과거에는 좋은 면도 있었지만, 그 과거를 그대로 가져온다고 해서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그때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식인들이 자기 경험에 갇히지 말고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두 책 모두 좋은 책이었지만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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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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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이 질문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상대라는 ‘신세계’의 낯선 부분을 즐기고 싶은 동시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공통점(익숙함)을 기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상대의 가장 사적인 부분을 묻는 동시에,


그 외의 다른 어떤 사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


정중한 질문이 아닐까.



상대의 사생활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는 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독서 중독자들 앞에 붙은 ‘익명의’라는 단서가 참 좋다.


만화 속 중독자들은 서로의 독서 스타일에 대해 신랄하게 조롱할망정,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다. 굳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끝까지 서로의 실제 정체를 까발리려고 하지 않고, 알고도 묻어버린다.


(심지어 독서 모임 멤버 중에 ‘예티’가 있는데도!)


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뭔가를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만으로 재미있고, 편안해지는 것 같다.



나도 내 사생활을 전시할 생각은 잘 못한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타임 라인에 올라오는 인친님들의 책 사진이 좋다.


이 사람은 이런 책을 읽고 있구나, 그 정도가 관심이 가는 전부다.



그리고 그 정도 거리가 참 좋은 것 같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내가 읽은 책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았을 때,


누군가 나에 대한 낯섦과 익숙함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히 자신을 보여줬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회 부적응자’로 표현되기도 하는 독서 중독자들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중독돼 버린 것을.


앞으로도 익명으로, 중독자로서,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슬쩍슬쩍 내가 읽는 책을 내보이고, 다른 사람이 뭘 읽는지 훔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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