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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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단히 지루하고, 처진다. 많지 않은 분량에도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제가 뭘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악당인 마이가 너무 늦게 등장하고, 너무 늦게 활약(?)을 벌이는 게 핵심적이었던 것 같다.


악당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짜 악당들(익인들, 비오, 휴고 등)이 대신 활약을 하지만

진짜 악당이 아니기 때문에 동력이 약하고 자주 교체된다. 때문에 이야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진짜 악당(마이)을 제외한 모두는 선해야 한다는 규칙이 지켜지고 있다.

왜 선해야 하는가. 작가가 그리고 있는 엔딩이 모두에게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 전체에 나이브 한 가치관이 흐르게 된다.

나중에 가서는 악당조차 스스로 회심하고 용서를 받는다.


어쨌거나 이런 문제가 불러온 가장 큰 폐해는 

캐릭터들이 선명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건가 싶으면 이렇지 않고, 저런 건가 싶으면 저렇지 않고,

이건 캐릭터가 입체적인 게 아니라 이도 저도 아닌 것이다.

캐릭터의 입장이라는 게 불분명하다.


비오는 루를 사막에 버리고 가겠다는 건가 아닌가.

지장은 너그럽게 비오를 용납하겠다는 건가 아닌가.

익인들은 도시인들에게 분노를 가졌다는 건가 아닌가.


이러다 보니 인물들의 행동이 명쾌하지 못하고 집중도를 흐트러뜨린다.


또 이렇게 되면 각각의 캐릭터로서도 문제지만,

캐릭터 간의 대립각도 흐리멍덩해진다.

이 둘은 우호적인 관계인가 아닌가. 이 인물은 아군인가 적인가. 

이 이야기의 갈등은 어떤 축에서 이뤄지는가.

방향을 알 수 없게 이야기는 그저 흘러간다. 

마이가 진짜 악당이라는 게 드러날 때까지 말이다.


익인들은 시 청사를 습격하고도 역습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어떤 익인들은 도시로의 무역을 계속한다.

도시인들은 그런 무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태연하게 도시로 무역을 나온 비라이를 붙든 시행은

정중하게 익인들이 왜 청사를 습격한 건지를 묻고 있다.

도대체 이 세계는 어떤 논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걸까?

어떤 긴장감이나 갈등도 없다. 흐리멍덩할 뿐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목표, 캐릭터의 목표랄 것도 없다.

실종된 다니오를 찾는 것도 아니고,

인질로 잡혀간 루를 구해오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인공은 루와 비오로 보이는데, 

이들은 중반이 넘어갈 때까지 별다른 목표 없이 이야기 속에서 부유한다.

이야기는 늘어놓고 있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해결되어야 할 갈등이 애초에 존재했던가.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드는 이유다.


루는 익인들이 분주하다는 이유가 비오의 아버지 다니오와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으나 이어지는 지장의 말은 좀 달랐다.

“우리의 정직하고 충실한 구성원인 다니오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마다 준비하던 건 해야지요. 다음 주에 익인 청년들의 이행식이 있답니다.” p. 105(가제본)


이쯤 되면 헛웃음이 나온다.


문장들도 늘어질 때가 많은데,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성 작품처럼 보였다.

정식 출간본에서는 고쳐지리라 예상된다.



그 여자아이가 내미는, 뭔지 모를 뿌연 음료가 담긴 나무잔도 사양할까 하다가, 낯선 데서 깨어나선 적의를 담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는 게 앞으로 거취를 생각했을 때 그리 현명한 선택 같지 않아서 루는 약이려니 하고 잠자코 받아 마셨다. p. 65(가제본)


또한 벼랑 같은 데서 떨어져 바위에 부딪치거나 하여 완전히 머리가 부서진 동물도 고치지 못하고 다만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고통을 보살펴 준 뒤 묻어주었다고, 지요는 슬픈 낯빛으로 담담히 말했다. p. 116(가제본)


또 다른 커다란 문제는 가부장적인 성 역할이 전제됐다는 점이다.

두 남녀 주인공의 불행은 아버지의 외도에서 시작된다.

둘은 혼외 자식이다. 둘의 공통점을 만들어 주고, 같은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심지어 청소년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바람을 피우는 것은 보기 불편했다.


여자들의 역할이 모성적인 희생과 이해심으로 고정돼 있는 것도 문제다.

앞선 혼외 자식 문제도 그렇지만, 남자들이 저지른 모든 문제는 여자들이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 해결된다.


비오가 마이를 죽이려 총 쏜 것을 루가 대신 맞는다.

미친 과학자에 가까운 마이의 정체를 알고도 탄은 그를 용서하고 결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무능한 휴고는 아마라의 도움으로 시행이 될 수 있었으면서도, 

시행이 되고 나자 아마라와 루를 ‘과수원’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한다.

마치 대단한 시해라도 베푼다는 듯이 말이다.

사고를 치고 무책임하게 날아가버린 비오를 루는 이해하고 보내주더니만

나중에는 그를 찾겠다며 비행기를 타고 나선다. 


지요가 그런 루에게 하는 말이 가관이다.



그 어떤 새도 영원히 허공에서만 살 수 없고 언젠가 땅에 두 발을 디디고 내려앉아야 한다면, 네가 그의 영원한 영토이니까. p. 290(가제본)


거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수준이다.

그 노래가 나온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주인공인 루가 수동적으로 사건에 대처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계속해서 도움을 받기만 한다.


영 어덜트 소설이라고 엉성하게만 엮어놓은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청소년과 어른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니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청소년 대상이건, 성인 대상이건 재밌고 신선한 장르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어느 쪽도 아닌 싱거운 작품이 된 것 같다.

창비라는 브랜드 때문에 잘 팔릴 것 같긴 한데

다음 작품도 잘 팔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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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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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오빠에게 부족하지 않은 거라면 바로 설득력이었다. 30분만 주면 오빠는 당신의 동정심을 살 것이다. 

45분이 지나면 자신의 음모론으로 당신을 세뇌할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내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의심할 것이다. 한 시간 15분이 지나면 이 상냥하고 매력적인 신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시간 반이 지나면 오빠는 당신을 조종해서 여동생들에게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그를 불쌍하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p. 284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라고 한다.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한다.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의 『나의 살인자에게』는 가스라이팅으로 가족과 범죄조직, 시민들을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범죄자 오빠에 대한 고발의 기록이다.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저자는 어려움 끝에 오빠를 감옥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물론 저자가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를 쓰지도 않고 그 개념으로 자신의 경우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가스라이팅에 대한 설명보다도 생생한 사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마치 가스라이팅 개념을 토대로 작위적인 픽션을 만든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흥미진진한 전개까지 갖추고 있다.


모든 원인은 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간에 어떻게 됐다는 언급도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이 아버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개차반인 인간이다. 가정 폭력, 폭군, 가부장…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케이스인데, 여성 인권이 높다고 알고 있던 서유럽 국가에서 이런 유형을 발견한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들도 지난한 여성 투쟁의 역사를 겪었으리라. 

문제의 큰 아들 ‘빔’의 가스라이팅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게서 기인한다. 


엄마를 고립시킨 다음 아빠는 엄마를 세뇌시켰다. 엄마는 “그저” 여자일 뿐이고, 여자들은 열등한 존재이자 남편의 소유물이며, 본질적으로 창녀였다. 엄마가 “창녀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식료품을 사러 갈 때면 정확하게 어디에 가는지 알리는 쪽지를 써놔야 했다. p. 34


아버지에게서 그것을 물려받은 빔은 청출어람이다. 

그는 가스라이팅의 대상을 가정이라는 소박한 범위에서 더 나아가, 

범죄 집단, 지역 사회로 넓혀갔다.


그의 가스라이팅 방법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나온다. 

사이코패스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소시오패스는 된다.


우선 그는 절대로 자신이 나쁜 사람임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빔 오빠는 유치원생의 감정적 발달을 흉내 내서 자신을 작고 무해해 보이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오빠는 무해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p. 239


물론 그것은 일종의 미끼와도 같았다. 상대는 그 미끼를 물고 그의 위험성을 간과한다.


협박에 이어지는 것은 갈취일 것이다. 오빠는 경험 많은 성인 남자가 어린 여동생에게 해주는 선의의 조언으로 그것을 포장했다. p. 239


그리고 충분히 그물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면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오빠는 늘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 그게 오빠가 사람들을 자신에게 구속시키는 방법이었고, 확실하게 그들을 옭아매고 나면 그들을 이용했다. p. 252-253


“문제가 일어날 거야!”

오빠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오빠는 누가 그런 계획을 꾸몄는지 아니까. 그리고 친구로서, 오빠가 도와줄 것이다.

진심으로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빠는 당신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이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기꺼이 맡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지불’이 시작된다.

오빠가 전령이기 때문에 이쪽과 저쪽에 전달하는 내용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

아무도 오빠가 이 분쟁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p. 280-281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빔 오빠에게 1센티미터를 내주면 오빠는 1킬로미터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길 전체를 장악한다. 그리고 마음 내키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다. p. 285


이런 교묘한 방식을 통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냈다.

그렇게 그의 범죄는 공권력까지 농락하며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의 달변과 연기력, 매력은 재판에 유리했다)


그는 가족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단순 피해를 넘어서 ‘일체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야비하게도 가족, 그중에서도 여자 가족들에게 행해졌다.

바로 막내 동생인 저자가 가장 위험한 경우였다.

그녀는 자신이 오빠와 비슷한 존재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아이였으면 딱 오빠처럼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폭력과 허세에 빠지는 걸 막아주었던 건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대신에 내가 내 지적 능력을 사용해서 비슷한 삶을 걷는 것을 막았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우연을 갖고 내가 어떻게 오빠를 비난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과연 오빠한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오빠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꽤나 “똑같은” 사람들인데. p. 267



이것은 가스라이팅이 가진 최악의 폐해다. 

오빠에 의해 저자는 자존감이 급격히 깎이게 된다.

때문에 그녀가 오빠의 폭압을 견뎌내고 그를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은,

저자 자신이 오빠와는 다른 인간임을 증명해 보이는 투쟁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오빠를 향한 증명이자, 사회를 향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증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가부장 시스템 안에서 철저하게 가스라이팅 당한 여자에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본인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아는 것부터 희망은 시작된다. 

남자들이 후려친 상태 그대로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유사성이 나와 오빠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건 아니야. 오빠가 한 모든 일은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거였어.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피하려고 노력한 일이야. p. 524


그녀의 투쟁은 어렸을 적부터 시작됐다.

저자는 열심히 공부했고, 오빠와는 정반대로 정의를 다루는 법조인이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빠와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오빠에게 이용돼 범죄조직을 위한 변호사가 될 뻔하지만 분명히 선을 긋는다.

오빠와 같은 인간이 아님을 호소하기 위해 법무부와 은밀히 접촉하여 결백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끝내 그를 고발하는 데 성공하면서 오빠와 정반대의 인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고, 쉽게 끝나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오빠의 살해 목록 1순위이고,

이미 한차례 살해 사주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녀의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지나치게 오빠를 두려워하고,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조심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잉 충성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 기록이 실제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까지 충성했느냐고,

왜 진작 오빠를 고발하지 않았느냐고,

왜 도망가거나 오빠에게 맞서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수는 없다.

가스라이팅이란 것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여자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흑인 노예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고, 언제나 백인보다 하등하다는 세뇌를 당한 그들에게

왜 진작 봉기를 일으켜 권리를 쟁취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녀를 도운 것은 여자들이었다. 법무부의 직원들, 언니, 빔의 정부, 그리고 자신의 딸.


남자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빠와 오빠는 말할 것도 없다. 형부도, 남편도, 심지어 정의의 편도 마찬가지였다.

(한 검사는 오빠와 형부가 운영하는 윤락업소에서 찍힌 자신의 성관계 테이프를 찾기 위해 저자의 집을 불법으로 수색한다. p. 230) 그들은 어떻게 보면 한 패인 것처럼 보인다.

같이 증언해 달라는 여자 형제들의 요구에 작은 오빠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한다.


“우리 셋 다 죽을 필요가 뭐 있어? 둘 다 여기 없으면 최소한 내가 엄마를 돌봐드릴 수 있을 거야.” p. 435-436


그래서 끝내 빔에게 목숨을 잃은 형부를 놓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형부는 재밌는 사람이었지만 좋은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가부장 시스템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종종 그랬듯 코르 형부에게 도와달라고 빌었다. 형부는 형부의 살인으로 빔 오빠가 형을 받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는 동안 언제나 거기에, 배경에 있었다. 형부는 언제나 신호를 보내서 우리에게 계속할 힘을 주었다. 미신이라고 불러도 좋고 우리가 미쳤다고 해도 좋지만, 우리가 용기를 잃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면 항상 무슨 일인가 일어나서 우리에게 형부가 거기에 있고 우리를 지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p. 345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고도 훌륭한 가스라이팅 사례를 남긴 것처럼,

이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고도 훌륭한 페미니즘 사례로 남는다.

그래서 저자가 하는 말에는 힘이 실려 있다. 그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지만, 억압받는 모든 여성을 향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평생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 그게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나에게 정체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제 누가 자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만 징징거리고 해결을 하라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p. 448



자신의 겁쟁이 같은 사례를 적나라하게 들려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느니 지금 당장 행동하라고 저자는 종용한다. 그녀는 지금도 집안에 갇혀서 살해 위협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그 사슬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오빠는 자꾸 물어 대서 아이들에게서 떼어놔야만 하는 나쁜 개 같은 존재였다. 

죽이거나 남은 평생 우리에 가둬놔야 하는 그런 나쁜 개 같은 존재. p. 243


그것은 어쩌면 당사자들인 남자들은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강하다는 아버지도, 오빠도 그것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거부하지 못하고 물려줬고, 물려받았다.

결국 여자들이 직접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책을 읽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럼 언니는 그냥 앉아서 다른 사람이 뭔가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건 쉬운 일이지.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아무 결과도 안 나왔잖아. 우린 운명에 의존하고 있어. 난 내 운명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 안 해.” p. 265


저자가 오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모든 가부장 남성들을 향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빔 오빠, 내가 왜 오빠에게 이런 일을 했는지 궁금하다면, 이게 내 답이야. 코르를 위해서. 소냐 언니를 위해서. 리히를 위해서. 프란시스를 위해서. 오빠 때문에 아빠를 잃은 모든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그 고통에서 구해주고 싶은 모든 아이를 위해서. 

이제 살인을 멈출 때야. p. 525


분명히 이제는 살인을 멈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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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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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오랜만에 읽는 한국 현대문학이었다.

거기다 ‘젊은’ 작가들이라는 말에 기대가 컸다.

다 읽고 난 지금 느끼는 감정은 혼란스러움이다.

문단은 도대체 현실 세계와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 걸까 싶었다.



1. 

특히 대상을 받은 「세실, 주희」라는 작품은 이 작품을 쓴 작가가 여자라는 점도 놀랍고, 이 작품에게 대상을 줬다는 문단의 심사위원들도 놀랍고, 심사평은 더더욱 놀라웠다.


시작은 어떤 페미니즘적인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싶더니,

나중에 가서는 페미니즘 따위 중요한 게 아니라고 훈계질 하고 있는 느낌이다.


여성 서사 자체에 힘을 실어주려는 독자들이나 관객들이 많다.

워낙에 그 숫자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의 수준 여하조차 판단하지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준다.

여성 창작자들이나 여성 서사 자체를 북돋아

더 많은 여성 서사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세실, 주희」는 오히려 나와서는 안 되는 해로운 여성 서사를 보여준다.

소설은 세 명의 각기 다른 환경의 여성들이 나와 그들의 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문화적·국가적 차원의 수직적인 층위에 대한 문제를 말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상당히 괜찮은 수준의 여성 서사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여성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문화권이 아닌, 상위 문화권이라 여겨지는 타국의 문화권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 타국의 문화권에서의 2등 시민 자리에 만족한다.


그 2등 시민의 자리는 외국인이라는 핸디캡과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중의 핸디캡을 가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등 국민도 되지 않는 자리일 수도 있겠다.


주인공 주희는 세실이라는 일본인 여성의 ‘한심한’ 빠순이 짓을 바라보며,

뉴올리언스의 문화를 쫓아다녔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를 발견한다.


세실은 동방신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주희가 일하는 뷰티숍에서 일본인 손님을 응대한다.

그녀는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에 무지하고 관심도 없는 그냥 ‘빠순이’로 그려진다.


세실을 낮추어 보며 문화적 권력을 쥐고 있던 주희는

결국 자신도 하등 다를 바 없는 한심한 여자아이임을 인정한다.


남자는 주요 등장인물로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이 이야기에서

여성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속물스러움과 모순들은 여성들 스스로의 잘못된 생각 때문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남자 등장인물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여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자각하기만 하면 그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니까.


세상에 이상한 여성은 많다.

속물스럽고, 모순된 여성들도 많다. 동방신기 빠순이인 일본 여자들도 많고,

뉴올리언스 같은 이국에서 이미 그 문화의 일부라고 착각하는 여자들도 많다.

하지만 그 문제들이 온전히 그녀들만의 문제일까?


유독 여성들 사이에서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경우(특히나 국가 간의 역사적·문화적 위계 구조에서)가 많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가 깊숙이 개입된 것은 아닐까?


괴물이 된 ‘보편적인’ 여성을 그린다면, 괴물이 된 맥락을 그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사회적인 ‘여혐’을 재생산하는 것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변에 저런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래서, 그대로 그 모습을 옮겨놓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것만으로 소설의 의무는 끝난 것일까?

해로운 여성 서사라는 말은 이런 이유에서다.


젊은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서사가 이럴 수 있다는 게 대단히 놀랍다.

여성 작가라기보다는 중년 남성 작가가 젊은 여성들 보라고 써놓은 이야기 같다.

대단히 노골적으로 여자들을 탓하고 있는 느낌.


‘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렇게 한심하단다.’


더군다나 2018년에 말이다.


한국의 문단이란, 중년 남성 작가들의 마음을 대변해줘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인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뒤떨어진 수준을 보고 있자니 자꾸 그런 의심이 든다.



2.

나는 장르물에 익숙해서 그런지 몰라도 공포 장르에 가까운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과 판타지물의 느낌이 물씬 나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재밌게 읽었다.


특히 「회랑을 배회하는…」이 보여주는 ‘예술을 비판하는 방식’이, 

마지막 작품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비교되어 재미있었다.

기존 예술 판을 비웃고, 조롱하는 방식을, 장르적 장치들로 표현하는 것과

다시 순문학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의 차이를 보이는데,

확실히 전자의 경우가 담백하고 모순됨이 없어 보였다.


「자이툰 파스타」는 실컷 기성 예술인을 비웃고 비꼬는데,

그 기성 예술인의 모습이 너무 과장되어 있어서 속 좁은 악의만이 드러난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칭얼거림을 ‘젊음과 다양성의 미덕’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p. 338)

작품에 나오는 말대로 예술이란 ‘기록해 놓을 만한’ 자위일 뿐인가 보다.



3.

「자이툰 파스타」의 경우는 그 밖에도 비슷한 위태로운 지점들을 

상당히 약삭빠른 방식으로 돌파해낸다.


이를테면, 초반에는 영락없는 홍상수 영화처럼 진행되다가, 

독자들이 그렇게 판단할 즈음에 그런 독자를 오히려 지적한다.


세상천지에 술 먹고 싸우는 얘기는 다 홍상수 아류인 건가요? p. 287


고리타분한 퀴어 영화를 욕하다가 결국엔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그때의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모래바람처럼 한순간에 우리를 휩쓸고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신파는 영화로 족했다. p. 309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쓰다가(뭔가 메시지를 던져야 할 마지막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고 말해버린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p. 318


자신의 단점을 미리 알고 방비책을 마련한다는 점이 약간은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4.

「자이툰 파스타」가 재밌는 지점은 하나 더 있다.

한국 문단의 퀴어 소설 선두에 서 있는 작가답게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내세워 어떤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반복해서 ‘진짜 퀴어’임을 내세우며,

헤테로 남성이 퀴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가짜’로 규정한다.


나는 오감독의 영화를 보고 그가 동성애자가 아님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성애 섹스 전력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p. 284


그러는 오감독님이야말로 동성애가 뭔지 알기는 알고 하는 소리예요? 동성애자 한 번 본 적이라도 있어요? p. 288


보통 오감독 캐릭터에게 향하는 지적들인데, 오감독 캐릭터는 지나치게 과장돼 있고 과하게 희화화되어 있다. 그가 만취해서 빈 회접시에 머리를 박을 때, 흑채 가루가 떨어졌어야만 했을까. 여기서도 작가의 개인적인 분노가 느껴진다. 또다시 자위 얘기가 떠오른다.


단순하게 작가가 퀴어라는 사실만으로 (당연하게도) 좋은 퀴어가 나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퀴어가 쓴 것만 진짜 퀴어 문학이고, 이성애자가 쓰면 퀴어 문학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세실, 주희」의 박민정 작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훌륭한 여성 서사를 만들어냈다고 우기는 것과도 같다.


독자가 읽고 싶은 것은 저자의 성 정체성이 아니다. 작품 속에 설득될만한 인물이 있고, 그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5. 

마지막으로, 「자이툰 파스타」가 지향하는 남성성의 정체는 뭘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게이 남성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군대 이야기, 그중에서도 자이툰 파병 이야기가 내세워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자이툰 파병이라 함은 국내에서 군 복무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국내 군 복무는 그냥 군 복무라면, 자이툰 파병은 실제 전장, 즉 실전이다.

사격장이 아니면 실탄을 만져볼 수도 없는 한국 군대가 아니라

실제로 실탄이 지급되고, 생화학 무기가 터지는 전쟁터인 것이다.

그곳은 모래먼지가 날리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잠을 자야 하는 거칠고 남성적인 배경에, ‘왕샤’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남성미가 넘치는 육체까지.


나는 저자가 자신이 퀴어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 남자임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게이다. 하지만 나는 군대를 다녀왔으며, 지원-선발 되어, 

국내 군대와는 차원이 다른 실제 전장에서 구른 몸이다.


이것은 마치 남성들의 사회에 최소한의 인정을 요구하는 몸짓으로 읽힌다.

퀴어들에게 남성들의 인정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면에서 저자는 퀴어로서의 인정과 동시에, 한국 남성 사회에서의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왕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퀴어 남성에게 (한국적) 남성성은 죽지 않았다. 은밀히 살아서 숨 쉬고 있다. 혹은 그렇다고 믿고 싶어 한다.


다들 아버지가 납치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아닌 거 같아. 숨어서 어디선가 살아 숨쉬고 있는 거 같아. p. 269



6.

소설마다 평론이 하나씩 붙어 있는데,

평론이랍시고 줄거리 다시 요약하고 있는 인간들은 도대체 뭔가 싶다. 

소설을 읽고 난 직후에 다시 그 요약된 줄거리를 읽어야 할 정도로 

독자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분량 때우려는 꼼수인 건가. 

어느 쪽이든 문제가 많다. 한국의 문학 평론 수준이 심히 의심되는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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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발명 - 사후 세계, 영생, 유토피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
마이클 셔머 지음, 김성훈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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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스켑틱》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마이클 셔머의 신작이다.

원제는 ‘Heavens on Earth’인데, ‘지상의 천국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인간이 꿈꾸는 천국을 비롯한 영생, 사후세계에 대한 허위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과연 과학적 회의주의자로 유명한 저자다운 소재 선택이다. 


역시나 가장 먼저 격파 당하는 것은 종교적인 사후세계 개념들이고,

그다음으로는 환생이나 임사체험 같은 신비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례들.


종교에 대한 부분은 사실 ‘갈 길이 바쁘니 자세한 건 생략한다’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일신교들(유대교, 개신교, 이슬람교)이 

저자가 지적한 허점들에 대해 그렇게 허술한 논리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

그 종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완벽한 논리체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파고들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평행선만 그리게 될 테니, 

회의주의자 입장에서 문제점만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단 하나의 증거도 없다는 것.

그것으로 게임 끝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막연하게 사후세계를 상상하는데 익숙하고, 

그것에 대해 대충이라도 안다고 여기는 태도들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안다고? 어떻게?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이어지는 내용은 반대로 과학적으로 영생을 이룩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인데,

의외로 저자는 대부분의 시도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여기서부터 저자의 진가가 드러난다.


과학은 죽음을 아는가? 사후세계를 아는가?

절대로 모른다.

과학적 영생은 가능한가?

적어도 이번 세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앞서 종교 부분에서도 느낀 거지만,

회의주의는 일종의 겸손함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태도 때문에 우리는 저자를 더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겪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사건까지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 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냥 즐기면 된다. 그 안에 담긴 감정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미스터리를 받아들이자.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굳이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들먹이며 채우려 들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자연스러운 설명이 등장할 때까지 그 상태를 내버려 두어도 문제 될 것 없다. 그때가 올 때까지 미스터리를 즐기고 미지의 것에 귀를 기울이자. p. 201-202



앞에서 본 것처럼 중후반까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내용이라고 여겨지는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부분들이 흥미롭다.


사후세계를 꿈꾸게 만드는 심리적 오류들을 짚어내더니만, 

역사적·정치적으로 지상의 유토피아를 만들려던 과거 시도들과

그 결과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게 됐음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의외로 이 부분이 가장 공들인 느낌이고, 앞선 이야기 모두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문에 불과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고비노에서 바그너, 바그너에서 니체, 니체에서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히틀러까지.

결국 그 유토피아의 역사 끝에 트럼프와 대안 우파라는 집단이 있다.

저자는 과거의 그 어리석음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인류가,

다시 한 번 오류를 반복할 위기에 처했음을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이 모든 회의주의 여정을 통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탐욕이다.

죽을 운명의 존재로서의 불안감, 그것을 극복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들,

그 모든 것들은 천국을 약속하면서 사실은 지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사실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다.

‘유전자의 생존’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영생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유전자는 지구를 벗어나고, 

태양계를 벗어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그 수준에 다다른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유전자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까지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SF에서 많이 보던 결론이다.



그럼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차피 후손을 위해 죽을 운명이라면 

우리는 최대한 우리 자신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생존 조건을 넘어선 그 무언가다.

여기서 그 무언가를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것들이 의외로 상당히 종교적인 것들이다.


사랑과 가정, 삶의 의미, 초월과 영성, 그리고 사랑.


이것은 마치 이전의 종교가 선사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선사하지 못하는 것, 

한때는 과학이 종교를 대신해 선사해줄 거라 기대했던 것을 요약한 것 같다.


오늘날의 종교가 얼마나 그 본래의 기능을 잃고 있는지,

오늘날의 과학이 얼마나 기대치에 못 미치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저자는 절대로 인간의 영생이나 몇 백, 몇 천 년의 수명연장을 꿈꾸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그저 소박한, 하지만 실질적인 수준이다.


“당신은 200세, 500세, 1000세까지 살고 싶지 않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그럼 좋지요. 하지만 내 여생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그런 고상한 목표 대신 그냥 암에 안 걸리고 90세까지 살고, 알츠하이머병 없이 100세까지 살고, 노망나지 않고 110세까지 살고, 의식도 없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는 일 없이 120세까지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200세, 500세, 1000세가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하기 전에 이런 문제나 먼저 해결하자. p. 381-382


회의주의자 다운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일단 이 책은 포만감이 대단하다.

그 포만감은 분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소재에 대한 완벽한(혹은 그렇다고 느껴지는) 소화 능력에서 온다.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루고 결론을 내린다.

그 정도의 스펙트럼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그 모든 집대성이 담긴 한 권의 책을, 

편하게 앉아 읽고 있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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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클래식 수업 - 알아두면 쓸모 있는 최소한의 클래식 이야기
나웅준 지음 / 페이스메이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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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한 입문서다.

내용도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고 알찬 편이었다. 

친절한데 내용까지 알차니 즐겁게 읽을 수밖에.


클래식의 대중화에 애쓰는 저자의 애정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저자는 트럼펫 연주자(트럼펫터!)로서 클래식 공연 해설자, 뮤직테라피스트, 클래식 관련 네이버 오디오클립 운영까지 다방면으로 클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클래식들로 흥미를 돋우고, 기본적인 정보들을 소개하더니,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사를 훑고, 각 악기들을 설명해준다.

입문서로서 더 이상 친절하고 알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성이었다.


정보 전달도 전달이지만, 클래식에 대한 핵심적인 논점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언급해 줘서 깊은 이해를 도왔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QR코드를 통해 저자가 만든 오디오클립의 클래식 음악과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책 한 권으로 클래식을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시리즈화 되어 더 심화된, 혹은 특화된 후속작들이 나와 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저자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좋은 책이었다.


나는 클래식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클래식은 어렵고, 지루하고, 잘난 척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게 선입견인 것만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런 대중적인 클래식 입문서들을 보면 항상 느끼는 점은,

클래식 음악은 고정돼 있고, 듣는 사람이 클래식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온갖 음악들이 나 좀 들어달라고 아양을 떨고,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 안달인 상황에서, 관심도 안 가는 음악을 듣기 위해 ‘노력’까지 해야 한다는 게 어이없게 느껴졌다.


그 정도의 음악이라면 도태되어 사라지는 게 맞지 않을까?


게다가 클래식은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모습에서 바꾸려는 노력이 없이 고정되어버렸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기에 맞추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원래 모습에서 벗어나면 클래식이 아닌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클래식이라고 하면 베토벤, 모차르트 등 고전적인 작곡가들의 음악을 떠올리는 것처럼 당시에도 비슷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작곡가들은 작곡 형식도 그렇고 악기 역시도 과거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p. 198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예술은 없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전통이란 이름으로 유지해야 한다면, 판소리나 사물놀이를 듣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어쩌면 뮤지컬이나 영화가 시대에 적응해야 할 클래식의 의무를 대신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음악가 한스 짐머는 이렇게 말했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영화음악 작곡가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자주 관현악 연주를 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영화음악이 없었다면 값비싼 관현악은 사라질 겁니다.”

- 맷 슈레이더 엮음 『스코어 오리지널 인터뷰집』 p. 133


아이돌 음악처럼 신곡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마 과거의 유럽 사회에서는 지금같지 않았을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근사한 음악들이 쏟아져나오고,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퀸보다도 슈퍼스타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발전이나 변화가 없는 똑같은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 대단히 불운한 시기를 맞이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자기 젊었을 적 노래만 반복해서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서 저자는 클래식의 변천을 사람의 성장과 비교하며 오늘날의 클래식을 ‘꼰대’에 비유한 건 아닐까.


그럼 지금의 클래식은 과연 어떤 시기일까? 우리나라 클래식 시장을 기준으로 냉정하게 판단해본다면 인생의 황금기를 넘어 속된 말로 ‘꼰대’가 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p. 166


저자 본인이 이렇게 클래식을 스스로 ‘까’줬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이미 전성기가 끝나버린 퇴물 음악을, 우리가 그렇게까지 경직되어서,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같은 걸 느끼면서, 혹은 반대로 우월감을 느끼면서까지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정확한 출발점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작가의 자기 비판은 중요하다.


클래식의 높은 문턱을 넘는 것은 클래식이 문제가 있는 음악이라는 걸 전제하고 나서야 가능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에 권위가 있을 수 없다.


저자는 ‘클래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엔 너무 매력적입니다.’ 라는 태도로 클래식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수업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저자가 클래식이 꼰대가 된 시대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잘 생각해보면, 

클래식이라는 음악이 굉장히 성숙하고 완성된 음악 형태라는 말이기도 하다.


힙합 음악은 현재 역동하는 음악이고,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젊은 음악이다.

역사가 비교적 짧고, 어린 세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클래식은 고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클래식 또한 비슷한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발전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다듬어져 왔기 때문에 그 형태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도전해 가며 만들어온 끝에 비로소 지금의 ‘완성형’ 음악 체계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래식은 그 켜켜이 쌓인 성취들 때문에 도무지 얕볼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낸다. 확실히 듣지 않고 그냥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단히 운이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 시대의 사람들이 꿈꿨던 궁극의 클래식을 즐길 수 있다.


분명히 알고 들으면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내가 노력해서 듣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왜냐면 저자가 설득력 있게 주장했듯이, 정말로 클래식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클래식의 아우라를 우리 생활에 더한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근사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게 아무리 고되고 피곤한 퇴근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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