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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평점 :
이 책은 독특하다.
사료에 근거한 논픽션을 쓰면서 상상력을 동원한 픽션을 동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팩션이라고 하기에는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너무 강해서 망설여진다.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소개에 의하면 ‘유례없이 문학적인 저널리즘식 글쓰기’라고 하는데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속시원한 명칭은 아닌 것 같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구성도 희한한데, 책을 쓰기 전의 상황과 책을 쓰고 난 이후의 상황까지 모두 담겨 있는 점이 그렇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까지 모두 책의 내용이긴 한데, 또 읽다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작가의 개인사도 엄청나게 들어가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량이 상당히 두꺼워졌다.
도입부도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작가의 개인사로 시작된다. 이런 도입부는 저자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독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책은 소위 말하는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를 중심으로 신약성경을 파헤쳐보는 내용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본이야기로 잘 들어올 수 있도록 (한때 가톨릭 신자였지만) 회의론자, 불가지론자인 저자가 완전한 내부자(신자였던 시절)이자 완전한 외부자(현재의 불가지론자)로서의 심경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독자는 자연스럽게 출발점에 서서 본이야기로 들어갈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이게 진짜 독자를 위한 효율적인 방식이었는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일단 나의 경우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저자의 목소리가 굉장히 강한 글쓰기이기 때문에 저자에 대한 소개나 적응이 필요할 것 같다. (저널리즘식 글쓰기라고 하면 굉장히 객관적인 논조일 것 같지만 이 책에 있어서만큼은 전혀 아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한 명의 작가와 치열하게 토론이라도 벌인 것 같은 기분이다. 아는 것도 많은데 말까지 많은 지독한 작가와.) 그런 의미에서는 올바른 방식이었다고 여겨진다.
저자 본인을 위해서도 적절한 도입부라고 한 이유는, 저자가 성경이라는 책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 때문이다. 필립 K. 딕의 전기(傳記)를 쓰기도 했던 저자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더욱 이해가 되기도 하는데, 저자는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인물을 하나 정하고 그 인물을 따라 책 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어가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선택한 인물은 ‘루카(개신교에서는 ’누가‘)’다. 루카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면서, 성경에 포함되는 책을 쓴 ‘작가’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모든 것이 낯선 관찰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적절한 동반자가 되는 셈이고, 독자 입장에서도 가장 편안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루카를 따라 들어가는 저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셈이다.
보통은 루카를 쫓아가도록 저자가 보이지 않게 돕는 역할을 하겠지만, 저자가 워낙 작품 전면에 드러나다 보니까 생기는 재밌는 특성 같다. 즐겁게 읽었으니 뭐가 어떻든 상관은 없다.
즐겁게 읽었다는 고백은 사실이다.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몰입해서 읽었고 허투루 읽을 만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거다. 확실히 성경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즐겁게 읽을 것 같다. 내용 자체가 성경이 믿을만한 내용인지 한 번 끝까지 가보자 하면서 달려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애초에 읽을 생각을 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점프해가며 읽어도 대단한 수준의 작품이고, 성공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훌륭한 ‘문학적 다큐멘터리’를 접하기에 이보다 좋은 예는 드물 거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번 도전해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인물과 한 종교에 대한 통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독서가 될 거다.
우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전기 작가로서의 장점이 빛이 난다. 성경의 저자들과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거기 등장하진 않지만 동시대를 살아간 각 인물들 속으로 깊숙이 내려가 내면의 속속들이(당연히 사료에서는 절대로 나와 있지 않은 부분이다)를 들여다보는 솜씨는 대단하다.
절대로 그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고 저자의 의견일 뿐이라고 밝히는데도, 듣다보면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서 나중에는 그 인물들마다 나름의 인간상이 그려진다. 픽션에서처럼 캐릭터가 보인달까. 등장인물들이 굉장히 많은 셈인데 다들 제각각으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대단하다.
그 얘기는 성경을 보면서 ‘개인’을 봤다는 말인데, 이건 상당히 놀라운 경험이다. 나름 성경을 보려고 노력하면서도 이 정도까지 선명한 인물 개개인을 의식했던 적은 없다. 의식했다고 해도 아주 개성이 강한 베드로나, 바오로(바울) 정도? 성경은 번역되면서 한 가지 톤으로 정리됐기 때문에 여러 가지 책들의 묶음(개신교의 경우 신구약 합쳐 66권으로 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 개인의 목소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개인들을 하나하나 살려낸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성격이 보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도 한 명의 인간이었다는 아주아주 당연한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었고, 그들도 나처럼 고민했고, 그들도 나처럼 걱정했고, 의심했고, 기뻐하고 실망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신령해 보이는 그들의 신앙심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혹독한 과정으로 인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걸 얻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고 목숨까지 바쳤다는 사실. 이미 어렸을 적에 읽어서 알고 있던 사실들이 모두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그들의 후광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와 같은 인간일 뿐이기에 더욱 위대해 보인다.
저자가 회의주의자이기 때문에 얻는 장점도 분명하다. 신자였다면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접근방식을 보인다. 모든 각도에서 사료를 의심하고 재정립한다. 모든 걸 해체했다가 다시 쌓으며 굉장한 유연함을 보여준다. 이런 방식에서만 볼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그 새로운 부분들이 이 전 성경 내용들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아주 훌륭한 성경 이해하기 길잡이 같은 느낌이다.
워낙에 방대한 자료 조사, 연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일 것이다. 내가 그 정도를 판단할 수준은 전혀 아니지만 읽는데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았을뿐더러 차고 넘친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읽다보면 저자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도 한다. 그만큼 그는 집요한 작가다. 거기에 대해 초반에 이미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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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일을 그녀의 관점에서 고찰해 본다면, 난 그때 그녀를 아주 난감하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나 내가 끔찍하게도 똑똑한 인간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는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교만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씁쓸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대모가 사용하곤 하던 의미로, 그리고 C 여사가 내 뒤의 안락의자에 앉아 절망적인 어조로 <왜 당신은 항상 그렇게 똑똑해야만 하죠?>라고 푸념했을 때 사용했던 의미로 말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단순하지 못하며, 생각이 배배 꼬였고, 항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아무도 제기할 의도가 없는 반론을 미리 앞질러 생각하고, 무언가를 생각할 때는 꼭 그것의 반대 항을, 또 반대 항의 반대 항을 생각하고, 이런 정신적 쳇바퀴 속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고갈되어 가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p.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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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작가 개인의 풍부한 문학적 재능과 주변 지식들이 더해지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텍스트가 더 풍성해 진다. 분량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
바오로의 조수 역할을 해냈던 루카는 이스라엘 성전에서부터 제국의 심장부 로마까지 두루 돌아보며 바오로의 활동을, 그리고 동시대 사도들과 장로들의 활동들을 지켜본다. 특별히 극적으로 꾸미지 않아도 그의 지적, 영적 탐험은 흥미진진하다. 그 사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하나가 사라지고, 로마의 황제는 계속해서 바뀐다. 말 그대로 기원(紀元)이 된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 이후의 1세기라는 시대는 우리에게 정말 매력적인 시대로 다가온다.
저자가 제시하는 모든 가능성(성경에 대한 또다른 해석들)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명석한 통찰력과 근거들을 토대로 한 것이니 만큼 생각해볼 만한 문제들이다. 단지 그 가능성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저자에게 동의하지는 않을 뿐이다. 거기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갈리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비기독교인은 ‘그렇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한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확신이 생긴다’고 답하고 싶어진다. 저자와 나의 차이는 여기서 분명해진다. 저자는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지만 충분히 찾지 못했던 것이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게 성립하지 않는다. 우르르 무너진다. 믿음의 영역은 그래서 파악하기가 힘든 영역이다. 저자가 책의 초반에서 의구심을 가지듯이 이런 ‘믿기 힘든’ 종교를 2천년 넘게 믿어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세계를 좌우할 만큼 많은 수의 신자들을 거느린 종교로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성경에 대한 권위도 추락하고, 얼핏 성경이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정도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수많은 저자들은 그들이 아는 부분을 썼다. 그리고 굳이 모르는 부분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작은 조각보가 모여 큰 그림을 이루었다. 루카는 자기가 맡은 조각보를 완성한 것뿐이다.
그리고 저자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코끼리 다리를 만진 셈이다. 정체를 밝혀 보려 했지만 완전히 파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실체의 일부를 접한 것만 같은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뭔가를 만졌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뭔가가 분명히 있긴 있다. 그렇게 저자는 큰 그림의 또 다른 작은 조각보 하나를 완성했다. 어느 순간 저자는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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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날, 왕국이 무엇인지 잠깐이나마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p. 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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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각도로 다시 보는 성경’이라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이것은 혹시 작가가 쓴 새로운 버전의 ‘신약’ 성경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회의주의자가 쓴 복음서. 불가지론자가 쓴 일종의 신앙고백인 셈이다. 그것이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한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또 다른 증언을 남기고 있으니 그렇게 심한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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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과 작별하는 이 순간 자문해 본다. 이 책은 과거 나였던 그 젊은이와 그가 믿었던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p. 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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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열심히 탐구하고 나서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면 신자인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태반은 그것이 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뭔지도 모르는 걸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 이건 비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너무 익숙한 성경 말씀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새로운 언어로 다시 읽기. 일종의 낯설게 하기. 물론 대단히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위험천만한 순간이 산재해 있긴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아주 방대한 연구 조사 자료들로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웠다. 픽션과 논픽션의 장점을 모두 취하려는 전략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정반대의 악효과가 날 위험성을 안고 출발했지만, 두 마리 토끼를 정확하게 잡았다.
책을 덮고 나면 이 작품의 복합적인 면을 따로따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 이야기는 논픽션인 동시에 픽션이어야만 했고, 저자의 주관적 해석과 개인사가 들어갔어야만 성립하는 이야기다. 적어도 이 정도 분량은 되었어야 하는 이야기다. 그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하나의 복잡한 덩어리가 화려하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그런 것을 예술이라고 하던가. 맞다. 아주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접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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