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다음은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중 한 대목이다.


∥사회학자 아사노 도모히코(淺野智彦, 46세, 미야기 현)는 젊은이들 사이에 ‘거리감에 대한 갈망’이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사노 도모히코가 이런 주장의 예로 든 것은 ‘만남을 원하는 사람들(會いたい系)’로 불리는 일종의 ‘붐’이다. ‘만남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다.’라는 생각을 노래로 풀어낸 일련의 제이팝(J-POP)을 총칭하는 언어다.


(…)


아사노 도모히코는 이처럼 니시노 카나의 노래가 수많은 젊은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데는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다.’라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휴대 전화만 있으면 연인이든 친구든 언제 어디서나 연락을 취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라는 애틋한 상황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 p. 220-221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2006년 작 〈너의 이름은.〉이 이런 감각을 정확히 짚어준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미아키 스가루의 『너의 이야기』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단계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특히나 젊은이들 간의 인간관계가 점점 사라지는 시대상은 가속화되어(이른바 ‘무연사회’), 급기야는 존재하지도 않은 인간관계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저자인 미아키 스가루 본인도 그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고,

그것을 우려하면서 작품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계속 맞대야 하는 일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그로부터 한동안은 대학 생협이 소개해주는 일용직으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 일도 매일 처음 대면하는 인간들과 처음부터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영 불편했다. 이른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하면 대인관계를 구축하는 능력과 유지하는 능력으로 나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둘 다 갖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 p. 74


『너의 이야기』는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이라는 전형적인 장르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다.

별 볼 일 없는 남자 앞에 어느 날 하늘에서 여자가 뚝 떨어지듯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가 항상 꿈꾸던 이상형과 같은 존재다.

일본 서브컬처에서 빈번하게 소비되는 이 구조 때문에 이 소설에 대한 첫인상은 뻔하디뻔한 남성향 판타지였다. 시치미 뚝 떼고 남성 독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그리고 적당히 성적인 판타지까지 충족시켜주는.) 고전적으로는 〈오! 나의 여신님〉 같은 작품이 떠오르는 상황 설정.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게 맞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전혀 뻔하지가 않다. ‘보이 미츠 걸’ 이야기라는 한계에서 시작해, 그 한계를 깨고 장르 자체에 대한 성찰을 보이다가, 다시 ‘보이 미츠 걸’이라는 이야기로 돌아오는데, 이 마지막 결론의 보이 미츠 걸은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놀랍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감탄하고 말았다.


뻔하게 시작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예상을 뒤엎는 전개를 보인다. 

중반부까지 대부분의 분량이 남자 앞에 나타난 여자의 정체를 밝히는 미스터리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뻔한 선택을 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집요함이 대단하다. 

언제나 이야기의 전개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이러다가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물론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다음으로는 ‘의억’이라는 SF 장치를 최대한 활용한 점에 감탄하게 됐다.

가짜 기억(의억)을 머리에 심는다. 그리고 특정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

이 어찌 보면 익숙한 아이디어를 최대한 밀고 나가 가능한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이야기 속에 녹여 냈다. 소재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아마 비슷한 아이디어로 SF 로맨스 물을 만든다면, 이 작품과 전혀 겹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기란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작가의 치열하고 깊은 고민은 ‘보이 미츠 걸’ 장르에 대한 성찰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는 전형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별 볼 일 없는 남자 주인공. 그 앞에 갑자기 나타난 완벽한 여자. 

그녀는 주인공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인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기서 끊임없이 의심을 한다. 

그리고 절대로 이 판타지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나중에는 보이 미츠 걸의 남자 주인공이 스스로 반성을 하기에 이른다.


∥ ​그러나 나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의문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건성에 가까운 정도의 조사를 하고 난 뒤 

수수께끼를 수수께끼인 채로 방치했다. 왜? 

그녀에게 속는 것도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꿈에서 깨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결코 상처받을 일 없는 안전한 구역에서 시치미를 떼고 

도카의 애정만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 p. 322



이것은 장르 자체를 부정하는 반성이다.

자연스럽게 이 보이 미츠 걸 이야기는 삐걱대게 되고, 균열의 틈을 내보인다.

그 틈을 통해 우리는 판타지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판타지가 판타지인 것을 드러내며 판타지임을 포기하는 것 같던 이야기는 

결국 더 큰 판타지인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서 주인공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이런 행복은 내게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 

사람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준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이야기다.

나에게는 이성에게서 그런 마음을 끌어낼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만약 나에게 그런 헌신적인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를 등쳐먹으려는 사기꾼이 분명하다. 

나는 그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 아마가이 치히로는 내가 연출한 ‘나쓰나기 도카’를 사랑했다. 

그 점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감정을 인정하는 걸 완고히 거부했다. 

아니면 그 감정은 인정하더라도 잠깐의 변덕 같은 걸로 치부하려 했다. 

그에게 희망이란 실망의 맹아일 수밖에 없었으며, 

정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희망 같은 건 

철저히 배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믿고 안 믿고는 그 이전의 문제로, 그는 행복 그 자체를 의심했다. 

병에 걸리기 전의 내가 쓸쓸함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행복한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이다. ∥ p. 306-307


∥ 아무래도 도카는 내게 속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친밀해지는 걸 두려워하는 듯했다. ∥ p. 333



사랑을 무서워하고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서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재밌게도 ‘기꺼이 속아주는 것’이다.

위험부담을 모두 안고, 기꺼이 상대방에게 나 자신을 내던지는 것만이 사랑을 나누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상대방이 사기꾼일 수도 있다. 또 때로는 이별을 겪으며 나락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리스크조차 지지 않고는 어떤 관계도 성립될 수 없다.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시도할 정도로 행복을 주는 것이다.



∥ 나는 도카에게 속았어야 했다. 

연애 사기에 걸려서 고가의 그림을 강매당했는데도 

이케다라는 동급생의 실재를 계속 믿었다는 오카노라는 남자처럼, 

모든 것을 내 구미에 맞춰서 해석했어야 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행복하게 춤추면 됐던 것이다. ∥ p. 321



만약 두 주인공이 진작 그걸 알았다면 이 모든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는 남자 주인공 치히로와 여자 주인공 도카 모두가 사랑과 인간관계에 미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들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무 늦게 만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 거기서 오늘날 젊은이들(특히 일본)의 일면을 보게 된다.



∥ 바보. 그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택하지 않더라도, 

그저 ‘이력서’를 내게 건네며 ‘우리 두 사람은 운명이에요.’라고 

말하기만 했다면 그걸로 끝날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그녀의 ‘이력서’를 볼 수 있었다면 

나는 무조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거짓 기억 같은 게 중간에 끼지 않았어도 

처음부터 우리는 궁극의 두 사람이었을 텐데. 

그녀가 최후의 순간까지 허구의 힘밖에 믿지 않았다는 게 나는 슬펐다. 

비눗방울과 같은 연약한 행복을 좇는 데 몰두한 나머지 

눈앞의 확실한 행복을 놓치고 만 어리석음이 가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받는 게 너무도 두려워 

그녀가 보낸 구원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 p. 320



작가의 안타까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보이 미츠 걸의 의미가 다시 확장된다.


‘허구의 힘만으로 진정한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보이 미츠 걸 같은 서브컬처의 픽션에서만 이성 관계를 배우고, 그것에 열광하며 제대로 된 실제 관계는 소홀히 하는 젊은이들에게 작가가 직접 건네는 말이다. 

가상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실제로 걸(Girl)을 만나라. 

가상은 가상일 뿐 제대로 된 충족감을 선사하지는 못한다. 



∥ 공상 따위로 충족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안의 나는 지금까지도 계속 울고 있었다. ∥ p. 262-263


실재하는 인간이 실재하지 않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도 허무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인간이 실재하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도 똑같이 허무하다. 실재하지 않는 인간이 실재하지 않는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허무다.

사랑이란 실재하는 인간끼리 하는 것이다. ∥ p. 62



장르의 밖으로 빠져나와 장르에 빠져있는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장르에 대한 성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장르를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까지 드러낸다. 한 단계 더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의억’을 만들어내고 있는 ‘의억기공사’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에 대해 말한다.


의억기공사는 마치 작가가 ‘등단’하듯이 이야기를 지어 뽑히게 된다.

현실 세계의 작가들처럼 누군가는 대충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만들고, 

누군가는 심혈을 기울여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충 일을 하게 되면 일거리가 끊기기도 한다.

의억기공사와 그들의 작업을 묘사하는 모든 부분에서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 나는 열여섯에 의억기공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현재에도 열여섯 살인 의억기공사는 

열여섯 살인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드물다. ∥ p. 235


∥ 나 자신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공상을 계속해온 나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작업을 숨 쉬듯─아니, 그보다 훨씬 용이하게─행했다. 

나는 모든 것이 결락된 인간이었기에 수많은 결핍에 대응할 수 있었다. 

일종의 소망 충족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데 

결락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질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나는 어떤 것도 동경할 수 있었다. ∥ p. 237-238



저자는 서브컬처에서 인기를 얻으며 ‘보이 미츠 걸’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진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의 작업에 긍지를 보인다.



∥ 그래서 우리도 예술적인 야심 따위는 접고 오로지 마음 편안한 에피소드를 엮어나가는 데 집중한다. 

그런 이유로 이야기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 사이에서 

의억기공사는 패스트푸드점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차역에서 서서 먹는 가락국수도 회전초밥도 좋아한다. 

없어지면 쓸쓸하다. ∥ p. 250


∥ 패스트푸드 요리사에게도 패스트푸드 요리사 나름의 긍지가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일에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 p. 296



이 작품으로 온라인 출신 작가로는 처음으로 일본 주요 문학상 최종 후보까지 올랐다고 알고 있는데, 아마도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저자가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이미 훌륭한 패스트푸드 요리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패스트푸드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낸 요리사.



그는 거기에 더해 자신이 하는 일에 일종의 사명감을 부여한다.

그는 독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보이 미츠 걸이라는 패스트푸드로 진정성 있는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 내가 당신을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하는 이유는, 내 동료를 늘리기 위해서도,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것

-그것을 하나의 진리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리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믿게 되기를 기도한다. ∥ p. 369-370



재밌는 점은 작가 본인은 정작-마치 작품 속 두 주인공들처럼-현실이 아니라 픽션(보이 미츠 걸 이야기)으로 사랑을 경험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치히로와 도카 두 명의 인물은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 ​동료들은 다들 신기해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 10년간 연애다운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경험하지도 않은 행복을 그리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느냐고 묻는 이도 있다.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아마 그 대답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의무도 없기에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 p. 367


∥ “마지막으로 하나 묻고 싶습니다만.” 기자가 말했다. 

“아마가이 씨에게 의억기공사란 직업을 

한마디로 정리해본다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거짓말을 만드는 일입니다.”

나는 그 사실을 도카에게서 배웠다. ∥ p. 368



그렇다. 작가는 이것을 ‘도카(픽션 속 히로인)’에게서 배웠다. 

그는 이 장르를 파고 또 파다가 결국 이 장르로 사랑과 인생을 터득한 장인이다. 

어떤 장르의 작가든 이 수준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자기가 평생을 바쳐 쓰고 있는 장르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다가 그것의 밖으로 나와 그것을 바라보다가, 약 올리고, 비난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애정을 드러내는 정도의 수준. 겉과 속을 완전히 뒤집어 까서 모든 것을 탈탈 털어내는 수준. 이것이 진정한 고수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작가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픽션(보이 미츠 걸, 혹은 걸 미츠 보이)만 보지 말고 현실에서 ‘걸’(혹은 ‘보이’)을 만나라,

픽션은 제대로 된 충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 말이다.

저자 본인은 픽션에서 사랑을 배워놓고, 독자들에게는 픽션을 떠나라고 한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픽션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실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아니,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해도 될지 모른다. 

그건 동일한 제품에다 브랜드 로고나 보증서가 붙어 있느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등가인 것이다. ∥ p. 366-367



여기까지 오면 이 말이 모순되게 들리지가 않는다.

작가가 장르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장르에서 가장 멀리 있는 현실까지 언급하는 동안, 우리는 그것 모두가 진짜라는 걸 알게 된다. 픽션에서 현실을 논하고, 현실에서 픽션을 느낀다.


특히 사랑에서는 그것이 더더욱 진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은 허구이고 속는 줄 알면서도 서로 기꺼이 속아주는 사기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사랑이 그렇다면, 허구의 사랑이 현실의 사랑과 다를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작가는 현실과 판타지를 뒤섞어 버린다.


치히로와 도카는 이야기 속 캐릭터이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다.

작가는 픽션에서 벗어나라고 독자에게 픽션으로 말을 건다.

작가는 보이 미츠 걸 이야기로 사랑을 배우고, 독자에게는 현실에서 경험하라고 말한다.

작품 속 치히로는 의억기공사가 되어 의억 속에 저자가 의도한 것과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작가는 작품 밖에 있지만 작품 안에 있기도 하고, 

캐릭터가 작가 본인이기도 한 동시에 작가가 캐릭터이기도 하다.



∥ 신작 발표 후 아사히신문사 웹매거진 《좋은 책 좋은 날(好書好日)》과 가진 인터뷰에서 작가는 

“독자분들에게 제가 앓고 있는 병을 옮기고 싶어요. 

《너의 이야기》를 통해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지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

_출판사 책 소개 중



책의 띠지에 적혀 있던 ‘마법사’라는 일본 독자의 지적은 그래서 정확하다.

(‘미아키 스가루가 소설가라뇨? 말도 안 됩니다. 그는 마법사예요!’)

단순한 보이 미츠 걸 이야기는 마법사의 손을 거쳐 현실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걸 동원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장기인 ‘보이 미츠 걸’ 이야기의 모든 클리셰와, 그것에 대한 재해석과 반성, 그리고 그것을 쓰게 된 자신의 계기와 거기서 얻은 작가 본인의 성찰,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작업의 의의까지.


조심스레 그의 보이 미츠 걸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예측해 볼 수 있겠다.

이 이상을 쓰라고 하는 건 작가에게 지나친 요구다.



∥ 의심할 여지없는 걸작이었다. 

설령 다른 사람들처럼 남은 인생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세월 동안 이 이상의 의억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평생 단 한 번 허락되는 기적을, 나는 여기에 썼다.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내게 재능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또한 여기에 다 쏟아부었다. 

일을 계속하겠다는 의욕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 p. 295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는 다시 보이 미츠 걸의 전형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는 여자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한다.

심지어 여자 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 남자의 성장을 위해 희생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두 주인공을 공평하게 다루려고 했던 작가의 의도가 빛을 발하는 면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한계마저 보이 미츠 걸의 모든 걸 패러디 해버리는 작업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의 작업에 압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30살밖에 안 된 작가가 자기 장르를 완전히 해체했다가 다시 쌓아올리는 굉장한 일을 해냈다. 과연 그의 다음 작품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며 들었던 나의 걱정이 기우였듯이, 

이런 내 걱정을 비웃으며 아마도 더 놀라운 작품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책 한 권으로 그런 신뢰감을 준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의 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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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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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82년생 김지영』이 생활밀착형 사례 모음집 같은 느낌이라면,

『사하맨션』은 사회 밀착형 사례 모음집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근래에 겪어왔던 사회적 사건들을 재조합된 상태로 다시 읽게 되는데, 

기시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 사고 실험이 아니라 그냥 현실 그 자체로 읽힌다. 


메르스 사태, 물 대포 진압, 세월호, 촛불집회 그리고 공공 시스템의 민영화 등등.

픽션으로 치부해도 될 정도의, 지나친 망상처럼 보일 수도 있을 일들이 사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사실. 그 사실에 거꾸로 과거의 현실을 감탄(?) 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SF로 다루기에 적합하다. 

시치미 뚝 떼고 현실의 이야기를 신랄하게 그릴 수 있으니까.

작가는 소설 초반에 가상 도시의 설정을 디테일하게 공을 들여 설명한다.

현실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는 이 설명은, 이 소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나타날 수 있는, 혹은 이미 나타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SF적 설정이 디테일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디테일이 무조건 내적인 리얼리티를 말하지는 않는다. 현실의 사건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해서 현실성이 확보되지는 않는 것이다.


『김지영』 때는 사례들이 더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면,이번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김지영의 사례들은 (사례들이 ‘픽션이라 과장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만,)실제로 보편적인 공감대가 있었다.

『사하맨션』은 좀 더 현실과의 이음새가 엉성해 보인다.

그 사건들을 하나의 그릇 안에 담기에는 좀 답답한 느낌이 있다.

사건들이 간략하게 설명되기 때문일까. 현실에서의 복잡한 인과관계를 싹둑 잘라버렸기 때문일까. 작위적인 느낌이 먼저 든다.


캐릭터들의 사연도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어딘지 모르게 ‘비극을 위한 비극’을 만들어 놓은 느낌.

『사하맨션』은 비극을 겪은 불쌍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맞지만,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 아닌가.사회적 사건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현실성이 생기지 않듯이, 

‘현실은 더하다’라는 말로 작위성을 변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개인의 욕망을 비추기보다는 시스템적으로만 접근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 아쉬웠다.

계급투쟁으로만 인물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느낌.

때문에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착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워야 하고, 지나치게 서로를 보살피고 지나치게 진지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하맨션은 현실 속에서 좌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 같아 보이기도 한다.


││ ‘타운’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이상한 도시국가.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국가에서 사하맨션은 유일한 통로 혹은 비상구 같은 곳이다. ││ p. 33 


실제로 입주자 선정을 위해 공동으로 머리를 맞대거나, 공동 수도, 공동육아, 

공동 텃밭, 공동 방범(?) 등 대안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개별 호수가 부여되면서 공동성을 빠져나와 개인성이 확보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너무나도 쉽게 그 개인성이 침범돼서 놀라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곳은 보이지 않는 공동의 목표가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하맨션은 그냥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인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서는 필히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나와야 하고, 목소리가 나와야 하고,

어떤 ‘영웅’이 나와야만 한다. 

우리가 도경이나 우미에게 기대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진경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감정이다.


가난과 범죄, 출산과 생계. 그 무게만으로도 힘겨운 사람들의 어깨 위에 

다시 사명감이 지워진다. 이것은 너무 무겁다.


앞서 지적한 부분들이 분명히 작품의 주제의식에는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오래된 스타일인 것도 사실이다.

사하맨션과 관련된 두 노인이 반정부 운동 경력이 있었다는 과거가 드러나는 부분은 그래서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 공동의 목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희생되는 사람과 저항에 동조하는 사람만 있을 뿐.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인 건 아닐까.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한 전체주의인 것인가.


저자는 그런 면을 의식하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 덤덤히 읊는 남자에게 우미는 그들이 왜 도와주는 거냐고 물었다. 남자는 그들이 왜 도와주는 것 같은지 되물었다.

“연구소의 일에, 반대하는 분들인가요?”

잠시 정적. 그리고 남자가 대답했다.

(…)

─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 283-284



하지만 계급 문제를 다루고, 최하위층 계급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누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나 닐 블롬캠프의 〈디스트릭트 9〉, 〈엘리시움〉 같은 영화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혁명이나 게릴라, 반정부 같은 낡은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저자의 바람대로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 속에서 동화나 신화들이 직접적으로 끼어들고 있는 이유는 

이 소설이 노골적인 비유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백설공, 토끼와 자라, 판도라의 상자… 

그렇게 이 소설을 하나의 거창한 우화로 생각하다면, 

앞에서 얘기했던 문제점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SF를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우화를 위한 SF에 가까웠던 것 같다.


││ 이 소설을 SF라고 생각하며 쓰진 않았어요. SF 영화에서 많이 다루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는 부분은 있지만, 미래 사회를 상상하며 쓴 소설은 아니에요. ││  _조남주, 예스24와의 인터뷰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 읽고 난 전체적인 인상은 

작가의 야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그 시도 자체로 감탄하게 했다.


작년에 읽었던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낀 바 있다.

한 권의 소설 안에 그 많은 이야기와, 그 많은 담론을 담겠다는 의욕과 시도는 독자들에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그것도 여성작가들에게서 이런 시도들이 계속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성 작가들의 야심찬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들의 야심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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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실험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한 어느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
딜런 에번스 지음, 나현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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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실험은 문명의 붕괴 이후를 가상으로 설정해서 

생존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일종의 역할극이었다. 

하지만 실험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이 책은 그 자초지종을 담은 일종의 실패담이다. 


저자는 실패의 원인이 뭔지를 계속 되묻고, 그 원인들을 파고든다.

특히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인 자신에 대해 혹독하고 잔인할 정도로 파고든다.

(실험을 중도 하차하며 정신병원까지 입원했던 그로서는 물론처음부터 이렇게 냉철하게 실패를 바라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난장판이 되어가는 유토피아를 보다 보면 코믹하면서도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머쓱한 자기변명 같은 느낌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유토피아란 단어가 워낙에 거창해서 그렇지 

사실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이루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저자가 유토피아 실험과는 별도로 새로운 가정을 거의 동시에 꾸린 것은 그런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독립된 모든 유형의 가정은 유토피아의 본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케일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유토피아를 꿈꾼다.


저자는 스케일이 남달랐다. 

직장도 때려치우고 전 재산을 처분하고 나선 실험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저자가 ‘1세계 백인 남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고학력에, 직장과 집도 있는 건장한 영국 남자가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망해버린 문명을 실험한다는 게 

일종의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진다.

제정신을 차린 저자도 그런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 실험 전체는 사기극 내지 엄청 긴 캠핑 여행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본 서구인 한 무리가 도시 생활을 과시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강인한 오지 사람이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 같았다. ││ p. 233


││ 부유한 서구인들이 재미 삼아 이런 것들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남들에겐 불쾌한 일이었을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 p. 261


조한혜정의 『선망국의 시간』을 보면, 

유럽의 청년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실험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이 있다며 부러워한다. 

젊은이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위해 기꺼이 땅을 제공하고 

자본을 투자할 여유가 우리에게 있을까. 

물론 저자는 자비를 털어 실험을 한 것이긴 하지만, 

유토피아 실험장 주변에는 다른 대안적인 공동체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겁내지 않는 것 같았다.


││ 북유럽의 특징은 무엇보다 공터가 많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다음 7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인디언 추장의 말을 이곳 주민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공유지 곳곳에서는 날마다 채식 그린 마켓 등이 펼쳐지고 임시 텐트극장과 수리하여 고친 놀이기차가 다니는 임시 놀이터가 차려졌다. 버려진 옥상 주차장을 텃밭으로 가꾸어 독특한 자신들만의 쉼터로 만든 곳은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세계 유명 클럽으로 변한다. 청년들의 실험장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방황과 실업으로 고민이 많다는데 막상 이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시민’처럼 살고 있다. 널널한 시간 속에서 의논하면서 사는 삶 말이다. ││ p. 53, 조한혜정 『선망국의 시간』


그렇담 실패한 유토피아 실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당연히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유토피아 실험은 시민사회와 도시생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문명과 동떨어진 유토피아 공동체는 나쁜 것들의 집합체 같다. 

일상생활의 편리성이 사라진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한적한 시골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부대껴야 한다는 점은 

도시보다 더 심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곳은 기대만큼 순수하지도 않았고, 자유롭지도 않았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도시와 사회는 우리들의 예상보다 부패한 것도 아니고,

억압적인 시스템도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실험은 이제껏 인류가 겪어온 과정을 다시 겪어보려는 시도다. 

그리고 이전 인류가 포기한 삶을 내가 성공시켜 보이겠다는 꿈이다.

그것은 터널밖에 보지 못하는 현대인이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모험이다.


││ 여기서 터널 시야를 가진 사람이란 “전체 결과를 몰라도 또는 전체 결과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도, 현대 사회의 부를 창출하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사업에서 자기 역할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만일 모두가 글로벌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나 연필 한 자루라도 혼자 만드는 법에 골몰한다면 전체 시스템은 서서히 작동을 멈출 것이다. 우리 모두 생각만 많아져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상태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 p. 305


우리는 과정의 한 부분밖에 보지 못한다.딱 그만큼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체를 조망해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경험하고 싶은 욕망은 더욱 커진다.


이는 조급한 어린아이의 욕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유토피아 실험을 벌인 저자의 동기는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좁은 보호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만의 힘으로 

삶을 영위해 보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과 닮아있다. 

이 실험이 치기 어린 젊은이의 시도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40대에 들어서 이 실험을 시작했다. 

중년이 넘어서도 이런 돈키호테 같은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저자가 부러워진다.

우리나라의 한계는 〈나는 자연인이다〉 속 자연인들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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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닮은 너에게 애뽈의 숲소녀 일기
애뽈(주소진) 지음 / 시드앤피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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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봤던 동화책을 떠올린다.
줄거리 없이 상황만 나열된 그림책.

글도 물론 있지만 상당히 부실하다.
글에 맞는 그림을 그린 거라기 보다는
그림에 맞는 글을 적당히 붙인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좀 억지스러울 때도 있다

본문 마다 느닷없는 영문 번역이 딸려있는데
이건 분위기 조성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명작동화 같은 낭만적 분위기를 위한 장치가 아닐까.

이 모든 게 작가의 그림을 살리기 위한 장치들이다
어찌보면 글은 그림을 책으로 엮기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 같기도 하다. 그림의 분위기에 푹 빠지기 위해서 약간의 글과 영문본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실로 명작동화집을 떠올리는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공주풍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수입된 공주풍 이야기들이 의례히 그렇듯이, 어딘지 모르게 국적과 시대를 알 수 없는 스타일이다.

숲소녀 캐릭터는 동양인 같기도 하고 서양인 같기도 하다(눈동자가 파란색).
아이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하다.
숲은 외국 같은데 산은 우리나라 같다.
과거의 어느 순간 같다가도 현재 같기도 하다.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판타지의 공간 아닐까.

엄지공주, 헨젤과 그레텔 같은 동화나 소공녀, 빨간머리앤, 작은아씨들 같은 작품을 보고 자란 성인들이 다시 그 시절의 분위기에 푹 빠지고 싶을 때 읽는 책으로 보인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하드커버로 엮어낸 그림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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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문보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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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일기이자 소설인 글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이것이 작가가 받은 상처들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상처는 사소한 연애부터 본질적인 창작론까지 다양하다.


││ 특히 나처럼 시를 쓰는 사람들은 

“예술 하는 놈들이 꼭 아픈 걸 티내더라.”랄지 

“아파야 예술을 하나?”라는 추궁을 받기 십상이므로 더욱 그랬다. 

그런 시선들은 나를 아프게 했다. ││ p. 124-125


그래서 내가 얻은 결론은, 그는 더 아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계속 창작을 할 것이고,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시를 계속 쓰고, 책을 내고, 브이로그를 하고, 글 딜리버리를 할 테니까 말이다.그게 독자들에게는 훨씬 유익하다.

독자는 좋은 글을 더 보기 위해 그의 고통을 바라게 된다.

창작물을 즐기는 건 그런 가학적인 행위인가 보다.


하지만 그런 독자들의 반응이 없다면 

작가는 글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독자의 반응 때문에 작가는 다시 살 수 있다.

독자와 작가는 그렇게 공생한다.


││ 어느 날 이상한 글을 썼는데, 

그러니까 나는 개떡같이 말했는데 누군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게 시구나 싶어서 시를 썼다. 

개떡같이 말했기 때문에 찰떡같이 알아듣는 누군가 생겼구나, 믿으며. 

그러면 앞으로 훌륭한 개떡이 되도록 애쓰자. 

독자가 찰떡이기를 바라면서.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해심이 아니라 이해력이기 때문에. ││ p. 121


이 모든 게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돈을 벌고, 돈을 쓰고, 돈이 없어 고생하고...

그 모든 게 고통이고 상처다. 

알고 보면 독자와 똑같은 종류의 상처.

시인의 상처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 반면 나는 상어형 인간이다. 

부레가 없어서 멈추면 죽는 상어처럼, 

그래서 잘 때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상어처럼, 

가만히 있으면 죽어버린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 딴짓을 시전할 뿐인데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산다고 생각한다. ││ p. 130


시인의 글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종의 과정이다.

최소한 치유는 하지 못할지언정, 그 상처를 예쁘게 포장해 준다.

포장은 중요하다. 사람은 최소한의 포장만으로도 견딜만한 힘을 얻는다.


그런데 시인이 자기 치유는 독자의 상처까지 보듬어주게 된다.

거기에 공생의 비밀이 있다.

시인에 의해 예쁘게 꾸며진 상처는 

흉터가 남더라도 예쁜 문신처럼 남는다.

우리는 고통마저 아름답게 추억하게 될 것이다.


시인이 하는 일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의 상처를 더 예쁘게 만들어 주는 것.


││ 구원은 이상하다. 

한 번 끝난 인생이 다시 끝날 때 그 사이에 구원이 낑겨 있다. 

구원은 늘 막간에만 드러난다. 

아코디언처럼 죽음이 쫙 펼쳐질 때 주름 사이사이에 구원이 숨어 있다. 

오호라. 구원아, 너 거기 끼어 있었구나? ││ p. 240


시인에게 구원은 언제나 살아가는 사이사이에 순간적으로만 존재한다.

시인이 독자에게 해줄 수 있는 구원도 그런 것이다.

상처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예쁘게 꾸며줄 수는 있다. 

어차피 독자가 시인에게 줄 수 있는 것도 그런 일시적인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다. 

이게 다 상처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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