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리처드 리브스 지음, 김승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짜 사회적 격차는 상위 1%와 나머지 99%가 아닌,

중상류층 20%와 그 외 80% 사이에 존재한다는 주장.


익숙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초점이 다른 주장이다.



∥ 지금쯤 당신은 어디서 다 들어 본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부유하고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사회 계층적으로 뚜렷이 분리되는 현상을 다룬 책이 이미 많은데 계급과 불평등에 대한 책을 또 한 권 내놓는 것은 쓸데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 주제를 다룬 몇몇 주요 저서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계급 분화를 부정확하게 진단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자들은 슈퍼 리치나 상위 1퍼센트에만 초점을 두어 중상류층의 (그러니까 나나 당신의) 책임을 쏙 빼놓는다.  p. 39



최상위층의 책임에만 집중하다 보면, 중상류층의 책임을 간과하게 된다는 말.

사실 가장 큰 격차는 20%와 그 아래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새로울 뿐 기본적인 원리는 1:99나 20:80이나 마찬가지다.



- 사회적 계급은 점점 더 고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 그러다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한 위치에서 출발하게 되고,


- 타고난 것과 환경적인 부분 모두에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적인 능력만으로 그것을 극복하거나, 책임을 지기에는 불가능해진다.



사실 이 정도는 한국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상식적인 문제들이다.

단지 우리에게 익숙한 문제를 미국의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한 기시감이 들긴 한다.



저자 자신이 중상류층인 상위 20%를 자처하고 있고,

자신과 같은 20%의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조목조목 설득한다.


문제의 핵심인 중상류층이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위 80%에서도 한참 아래쪽에 위치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남의 얘기일 뿐)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가진 자들의 자발적인 선의에 기댄다는 것도 이미 익숙한 논리.


어쩌면 그것이 민주주의-자본주의의 최대 맹점인지도 모르겠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들의 선의를 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거지도 그렇게 하다간 굶어죽고 말 거다.

법적인 제도의 중요성이 절실한 부분이다. 

하지만 법적 강제력을 강조하다 보면 다시 자유와 개인의 성취를 침범한다는 우려가 생긴다. 그래서 해결은 쉽지 않다.


저자는 골고루 해결책을 시도해야 한자고 제안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이 유서 깊은 불공정 관행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우리에게는 세 가지 무기가 있다. 법, 돈, 염치. 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 210



이 책은 익숙한 논리들을 새로운 프레임(20:80)에 대입하고 있다.

거기다 첫 번째 장에 저자의 주장 전부를 압축해서 소개하고 있다.

나머지 뒷부분은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들로 구체적인 뒷받침을 하는 모양새.


그래서 엄청나게 놀라운 새로운 이야기로만 채워진 건 아니다.

미국의 사례이지만 우리나라에 그대로 대입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위화감이 없다.

짧은 분량으로 저자의 새로운 시각을 습득하고 문제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장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최상위층과 중상류층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상위 1퍼센트는 고정된 집단이 아니라 구성원이 계속 달라지는 집단이다.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의 마크 랭크에 따르면 최상류층은 별도의 집단이라기보다 상위 20퍼센트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랭크는 연 소득 25만 달러 이상인 가구를 조사했는데 매년 이 집단은 인구의 2퍼센트에 못 미치는 정도를 차지했다. 그런데 평생 중에 적어도 1년 이상 여기에 속하는 사람은 인구의 20퍼센트나 되며, 이러한 ‘일시적인 최상류층’의 대다수는 생애 대부분의 기간을 상위 20퍼센트 속에서 살아간다. 다른 말로 하면 상위 1퍼센트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 중 잘나가는 시기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p. 46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애매한 위치는 중상류층에게 자유로운 포지션을 선사한다.

그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익숙한 1:99 프레임 뒤에 숨을 수 있다.


2011년 월스트리트에서 발생했던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3분의 1 이상이 연 소득 10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p. 21)


최상류층의 독식에 분노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 독식의 혐의가 있고, 심지어는 빈번히 최상위층으로 올라가기도 하는 계급이라니. 필요에 따라 상류층 행세를 할 수도, 서민 코스프레를 할 수도 있으면서 독식에 대한 비난은 받지 않는 좋은 포지션을 가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발적인 각성과 선의를 바란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걱정이 앞선다.



두 번째로 재밌었던 부분은 계급 문제는 결국 제로섬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급 간의 이동성을 더 높인다는 말은 불평등한 기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위 계급으로 올라가는 사람만큼 아래 계급으로 몰락한 사람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가 지금보다 더 낮은 계급으로 내려가고 싶어 하겠는가. 때문에 중상류층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에 목을 맨다. 도태는 곧 죽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자녀를 위해 한 일도 그런 위기감 때문에 벌인 일일 것이다)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계급이라는 계단의 높이를 줄이자는 것이다(특히 20%와 80%의 경계에 있는 격차를). 아래 계급으로 떨어졌을 때의 타격이 심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낮은 계급으로의 이동이 그렇게까지 공포를 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이 단순히 계급 자체를 부정하고 중상류층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계급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저자가 영국인으로 오래 살다가 미국인으로 귀화한 사람이기 때문에 얻어지는 예민한 감각이다. (그는 영국의 계급 사회가 싫어서 미국으로 귀화했다)


유럽인들은 미국에 계급이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평등과 자유에 대한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계급에는 둔감하다. 오히려 그들은 부자들을 존경한다. 개인적인 성취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재미있게 여겨졌던 세 번째 부분이다.


 셰릴 키신이 저서 『인종이 아니라 장소』에서 지적했듯이, “민권 운동가가 인종적 불평등을 논하거나 진보적인 학자가 ‘백인 특권’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실제로 비교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유색 인종 대 부유한 백인이다. (다양성에 대한) 논쟁에서 노동자 계급 백인은 별도로 이야기되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 백인은 자신이 특권층이라고 느끼지 않으며 전 지구화된 경제에서 그들은 실제로 특권층이 아니다.”  p. 178



물론 문제의 모든 부분을 설명해주지 못하겠지만, 미국 백인 보수층이 불만을 품게 된 배경도, 미국이란 나라가 지나치게 계급 문제를 감안하지 않고 인종 문제에 매몰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은 봉건국가도 아니고 입헌군주제도 아니다.

일찌감치 왕조는 끝이 났고 물밀듯 밀려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지탱되고 있는 나라다. 아마 어느 나라보다도 계급에 대한 경계심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사회적 계급은 존재한다. 그리고 중상류층의 위상은 공고하다.


우리는 저자가 영국과 미국을 비교하며 느꼈던 것과 같은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

단순한 예로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에 비교해 더 평등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입헌군주제로 일왕이 존재하는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말이다.


 미국이 내게 언제나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개방성과 평등에 대한 약속이었다. 나는 영국에 팽배한 상류 계급의 우월 의식과 계급 구분을 늘 싫어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나의 새 조국을 더 잘 알게 될수록 여기에서도 계급이 고착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특히 계급 사다리의 위쪽은 영국보다도 경직성이 심했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주된 차이는 미국인들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p. 230



책의 말미에 실린 저자가 제시하는 해답들은 보통 그전에 미국에 존재하는 시스템을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미 해답의 실마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실마리들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 봐야 할 때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bouvar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의 양들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세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네 번의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에 대한 이미지들이 철저하게 배신당한다.

작가는 그곳을 완전히 추악한 범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다.

작품 속에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경건한 종교의 도시가 아니다.

온갖 범죄로 얼룩진,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하드보일드 세계 그 자체다.


∥ 인간이 다스리는 로마가 그토록 정연하고 이성적인데 신이 다스리는 땅은 어찌 이토록 시끄럽고 혼란하단 말인가? ∥ - 1권 p. 115



익숙한 스릴러 장르를 1세기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인데, 그것이 왜 꼭 예루살렘이어야만 했는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정명 작가의 전작들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에 비해 상당히 새로운 시도를 한 것 같다.


확실히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연쇄살인 스릴러 한복판에 서 있는 건 묘한 광경이다.

어울리지도 않은 조합일뿐더러, 죄와 죗값이라는 닳고 닳은 하드보일드/스릴러 소설의 근본 논제부터 뒤집어버리기 때문이다.


스릴러 소설 속에서는, 이 더러운 세상에 희망이 있건 없건 간에, 누군가는 죗값을 치르고 사건은 해결된다. 영웅은 추악한 진실 앞에서 회의감을 느끼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정의는 실현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자만이 죄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같은 인간을 심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인공 마티아스가 여기에 반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하드보일드 세계 한복판에 있는 스릴러 소설의 주인공이자, 그 세계 자체기 때문이다.


∥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없을진대 누가 악인을 정죄하고 죄인을 벌하며 흉포한 자들과 대적할 것인가? 그자는 죄를 심판하지도 못하고 창궐하는 악을 막지도 못한 채 죄인만 득실거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 - 1권 p. 126



하드보일드 세계가 예수님을 만났으니 충돌은 불가피하다.

작품 내내 그 둘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한다.


∥ “(…)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기는 투쟁만 있을 뿐 신은 애초에 인간의 일에 관심도 없고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서로 욕하고 싸우고 굶고 병들고 죽어가며 발버둥 치는 인간들이오. 무언가가 바뀐다면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 개개인의 욕망 때문이지. 그렇게 본다면 신의 말이라는 토라도 모호하기 짝이 없고 해석자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건 믿음이 아닐까요? 인간이 선하며 세상이 더 나아진다는 믿음 말입니다. 유일신 여호와는 그런 인간의 의지가 집대성된 인식체계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믿음 속에 실재하며 그들의 행위와 삶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 - 1권 p. 193


∥ “전쟁에는 두 가지가 있어. 눈에 보이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이지. 로마군이 이 땅을 말발굽으로 짓밟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영토가 아닌 믿음을 두고 싸우는 전쟁, 공간 위의 전쟁이 아닌 시간 속의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인지 모르지. (…)" ∥ - 2권 p. 71-72


이 작품은 예수님이 개입하는 순간, 이전 스릴러 소설과는 다른 결말을 예고한다.

단순히 작은 정의에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죄인인 상황에서 인간들은 스스로의 정의를 실현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그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인간의 죄는 그 죗값을 치르는 대신 예수님을 통해 ‘공짜로’ 탕감 받는다. 

따라서 주인공 마티아스의 최종 목표는 연쇄살인범을 잡는 것에서 끝날 수가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죄를 탕감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작가가 예루살렘을 택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하드보일드/스릴러 세계와 대척점에 서 있을 것 같던 예수님은, 사실 그 세계의 핵심적 문제인 죄와 죗값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캐릭터인 것이다. 어쩌면, 그만이 유일하게 그 문제를 논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풀어나가기 쉽지 않다. 

예수님을 하나의 캐릭터로 활용하면서도, 그의 인간 구원에 대한 목표를 훼손시키지 않고, 스릴러 소설로의 클리셰와 재미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힘든 외줄 타기다. 예수님을 스릴러 소설의 캐릭터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드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작품도 그 외줄타기를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했다.


우선 마티아스라는 이야기의 주인공과 이교도라는 최고의 적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 이야기가 어느 정도 강렬함을 잃는다. 왜냐하면 원래 이 이야기의 영웅은 예수님이고, 악당은 가롯 유다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역할도, 악당의 역할도 나눠 갖게 되면서 유다는 상당히 비중이 사라져버렸고, 예수님은 때때로 현실 회피적인 얄미운 캐릭터로 보인다. 원래의 영웅과 악당보다 새로운 이들이 더 강렬해 보인다. 장점이자 단점이겠다.


이야기 속 악당인 피슈카르는 제 역할을 하긴 하지만 약간은 뻔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또 다른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진짜 재미있는 갈등 축은 현실적인 하드보일드 세계관과 이상적인 기독교 세계관 사이에 있는데, 또 다른 종교가 악당으로 등장해버리면서 그 재미가 조금 반감됐다.

(마티아스도 종교인이긴 하지만, 그가 믿는 유대교의 교리는 묘하게 하드보일드 세계와 동일시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누구나 지은 죄가 있으면 자기가 갚아야 한다는 것,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야 되고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한 놈은 제 눈에서 피눈물 흘려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을 피하려 해서도 안 되고 피할 수도 없다는 것. 그것이 그가 아는 율법이었다. 사람을 죽였으니 죽임 당하는 것이 공평한 처사였다. ∥ - 2권 p. 215-216


물론 작가는 후반부에 악당을 빠르게 제거하고, 마티아스의 심경 변화에 집중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용서를 받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심하는(정확히는 회개하는) 캐릭터만큼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힘든 것도 없다.


악당의 악행에 분노하고, 잘못된 문제를 바로잡는 주인공에 우리는 쉽게 공감하지만,

자신의 악행에 분노하고, 죗값을 치르려는 주인공에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너무 고귀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기독교적 감정에 호소해야 하는데, 죄책감을 느끼려고 스릴러 소설을 읽는 독자는 드물다. 기독교적 전통이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십자형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티아스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때문에 작가는 마티아스가 애당초 그런 희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라고 설정해 놓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원래 가지고 있는 성격에 기댄다면, 다시 반대로 회심의 극적 효과는 반감되어 버린다. 쉽지 않은 해결이기에 이해를 하면서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은 이야기 내내 잘못된 수사를 하다가 막판에 제대로 감을 잡는다.

보통 스릴러 소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패턴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잘못된 추리는 그것대로 일리가 있고 그럴듯한 느낌을 줘야 하는데, 언제나 독자의 추리보다 뒤처진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더군다나 중간에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계속 그러고 있다면 더더욱 문제가 될 수밖에. 누가 봐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범인이 아닌데 자꾸 범인으로 모는 것이 약간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인공이 종교적인 선입견에 휩싸여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신뢰하기 어려운 주인공을 내세운다면, 독자는 누굴 믿고 사건을 쫓아간단 말인가.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실제 역사 속에 가상의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어가는 콘셉트인데, 그것이 매끄럽지 못할 때가 많았다. 

특히 예수님이 말을 할 때마다 거의 성경 속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데, 혼자서만 이질적인 말투로 말하고 있어서 어색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반대로 작품 속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할 때마다 어색하기도 했다. 그만큼 예수님은 다루기 조심스러운 캐릭터다.


작품 속 인물들이 드러내는 역사관, 세계관, 종교관이 상당히 후대 사람의 시야에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당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려는 일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빌라도나 테오필로스가 로마라는 제국과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등장인물 각자가 품고 있는 음모나 계획이 지나치게 전체를 조망하는 느낌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은 극히 드문 법이다.


장르 자체를 다시 성찰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을 시도했으나 그 원대한 의도의 채 절반도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bouvar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 - 핵사이다 <삼우실> 인생 호신술
김효은 지음, 강인경 그림 / 청림출판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혹자는 말했다. 

‘현실에서 용히처럼 행동하다간 찍히기 십상’이라고. 

그런데 나는 되레 찍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쟤는 왜 저래?’라는 생각이 ‘쟤들이 왜 저러지?’라는 질문으로 확장하는 순간 갑의 잘못이 드러나고 을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 p. 8-9, 프롤로그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상상조차 하지 않으면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만약에 이랬다면?’하는 상상에서 시작된다.

소위 말하는 ‘발칙한 상상’ 말이다.



회사 생활을 다룬 비슷한 생활툰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삼우실’은 독보적이다.

공감과 위로를 지향점으로 하고 있는 다른 웹툰들은 현실에 안주한다.

그저 문제점을 묘사하고 뒤에서 투덜대는 걸로 끝이다.

‘오늘도 참는다… 부들부들…’ 하는 마무리.



하지만 진정한 공감은 거기서 멈춰 선 안 된다는 걸 삼우실이 알려주었다.

진짜로 공감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래.”라는 말은 “다들 똑같이 살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공감이나 위로가 아니라 체념이다.


삼우실은 언제나 “나도 그래.”에서 끝나지 않는다.

비현실적일지라도, 시원하게 복수를 하며 끝을 맺는다. 

부당함을 지적하고, 웃는 얼굴로 되갚아 준다.


물론 그 정도로 성에 안 찰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대단히 소심하고 여전히 답답한 대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독자의 추천사처럼 이것은 실화다.


삼: 삼자가 봤을 때 웃긴 글이지만

우: 우리가 겪고 있는 일

실: 실화들 

p. 252


먹고사는 문제에 감정대로 질러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신자유주의가 불어넣은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거기서 멈추게 만든다.

직장을 잃지 않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그 아슬아슬한 선,

삼우실은 그 정도 선을 계속해서 유지한다.

(그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무책임하게 쾌감을 주는 걸로 끝나서도 안 되고, 답답한 현실에 변화를 주지 못해서도 안 되니까)


그래도 그건 대단한 변화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는 딱 한 걸음, 그것으로 충분하다.


∥ 누구나 직장에서 용히가 되기를 꿈꾼다. 물론 쉽지 않다. 나 역시 직장에서 항상 용히일 수만은 없다. 때로는 꽃잎이었고, 때로는 일만이었다. 하지만 겹겹의 시간 속에서 깨달았다. 용기 내어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 p. 243-244


고소한 복수에서 머물지 않고 노동부나 인권위, 공공단체에 호소하는 방법을 제안한다든지, 근로기준법 등의 관련 법규를 알려준다든지, 

다른 관련 서적의 내용들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리 대단한 대처법이 아닐지라도, 저자가 진지하게 직장 내 문제점들을 고민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위로와 공감이 되어주는 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 직장이, 내 일이 나를 갉아먹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직업이나 직장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나답게, 너답게, 우리답게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면 용기가 솟는다. 

그런데 이것만큼 좋은 직장생활 호신술이 없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무례하고 부당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최고의 직장생활 호신술은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 당당히 맞설 수 있다. ∥ p. 236-237



그것은 80년대 생으로 대표되는 밀레니얼 세대가 이제 막 터득한 것이기도 하고,

90년대 이후 생으로 대표되는 Z세대가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발칙한 상상’이었던 삼우실의 태도가 앞으로는 상식이 될 거라는 말이다.



얼마 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꼰대들은 좋건 싫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본문 중에 한 구절로 대신한다.



∥ 그렇다고 해서 상사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잡무까지 막내 업무에 은근슬쩍 끼워 넣지 마시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당신이 영원히 막내로 남는 수가 있다. ∥ p. 33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bouvar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소한의 밥벌이 - 하루 한 시간이면 충분한
곤도 고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 우석훈 해제, 하완 그림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아사히신문 기자가 농사를 짓겠다고 시골로 내려가서 겪는 이야기.

저자는 자신을 ‘얼터너티브 농부’로 이름 짓는다.


∥ 얼터너티브 농부란 얼터너티브 록에서 따왔는데, 내가 만든 말이다. 다들 알다시피 ‘얼터너티브(alternative)’는 ‘또 다른’, ‘메인 스트림과는 다른’이라는 뜻이다. 얼터너티브에 속한 이는 우연히 변두리나 경계에 있을 뿐,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거나 변두리에 있으려고 굳이 애를 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변두리에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 p. 71



이런 기이한 일을 벌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계속해서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기 위해서(반대로 쓰기 싫은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 

생계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최소한 자신이 먹을 쌀을 자신이 기르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런데, 거기에는 좀 더 복잡한 의도가 깔려있다.



그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책 전체에 유머러스하고 허허실실 한 가벼운 톤을 유지시켰기 때문이기도 하고,

계속해서 몇 가지 이유를 들긴 하지만, 명확하게 ‘이거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혁명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며, 반자본주의나 자연주의도 아니고... 


워낙에 저자의 입장이 미묘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그에 따라 할 말도 많기 때문에 한참을 돌아가는 면도 있을 것이다. 


∥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여기서 오랜 촌락 공동체주의와 근대주의를 대치시켜 어느 쪽으로 가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 p. 208


∥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탈자본주의나 반자본주의 혁명 같은 것을 외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들 툭하면 ‘자본주의로는 안 되니 다음에는 ○○주의다’ 하며 거창한 사상을 주장한다. 나는 그런 사상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다. 철저한 ‘혁명 반대파’다. 반혁명이 아니다. 혁명 자체를 반대할 뿐. ∥ p. 287


∥ 혁명이고 유토피아고 개나 줘라. 내가 하려는 일은 그저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맥없이 묶여 살아서는 진짜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없다’는 가설을 스스로의 실험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다. ∥ p. 170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애매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다. 그런 애매한 것이 아닌 뭔가 분명한 입장이.



일단 분명한 건 저자는 곧 다가올 위기를 감지하고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심하게 벌어지는 계급 간의 격차, 그것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더 극심해질 것이다. 


∥ 자본주의는 틀림없이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단말마의 마지막 몸부림 때문에 앞으로 한 줌도 안 되는 부유층은 더욱 부유해지고, 선진국 정부는 더더욱 그 부유층에 의지하게 되는 동시에 부유층의 머슴이 되어갈 것이다. ∥ p. 337


그리고 끝내 이 사회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 ‘이런 불평등은 용서할 수 없다’가 아니라 ‘이런 불평등이 허용된다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p. 54



위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위기는 사회 전반의 기반을 뒤흔드는 대규모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 전쟁이란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공공사업이다. ∥ p. 167


∥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이나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날 때, 전쟁이라도 일으켜 밖에서 활로를 찾아야 하지 않겠냐는, 경기가 좋아진다면 전쟁이든 뭐든 하자는,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포자기에 빠질 때 전쟁에 대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런, 될 대로 되라는 분위기가 압력으로 변해 어느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전쟁이 일어난다. ∥ p. 172


그 위기에 대한 저자의 대처가 바로 ‘얼터너티브 농부’ 실험이다. 

노동문제를 해결하면서, 먹고 살 수 있으며, 자본주의에 묶이지 않으면서, 소비를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스타일을 구기지 않는 길.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쓰기 싫은 글을 쓰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자 쓰고 싶은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길. 

역시나 아주 미묘한 틈새에 놓인 미묘한 해결책이다.


∥ 내가 그렇게 쉽게 세상으로부터 내쫓길 줄 아는가? 이 세상을 살아갈 빈틈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말겠다. 

자아를 탐구하겠다느니, 뭐 그런 거창한 생각은 없다. 영원한 틈새 찾기. 나는 ‘구르는 돌’이다. 그래서 즐겁다. ∥ p. 350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협박해서 일을 시키고 있다. 그 협박의 근거는 ‘굶어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굶어죽고 싶지 않다면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참고 일하라는 것. 

저자는 그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자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살짝 벗어날 필요가 있다. 돈이면 다 되는 도시에서 살짝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살짝’이라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을 인정한다. 


∥ 그렇지만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농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기생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

기생하던 나 자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본질적인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나는 직장에서 벗어나려는 게 아니다. 어딘가에 기생하는 삶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 p. 252


그렇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부터 살짝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고, 고작해야 교환경제에 머물면서 말이다. 그것이 저자가 시골로 내려간 이유다. 그것은 일종의 벗어나기, 도주다. 다시 말해, 얼터너티브다.


∥ 굶어 죽기 싫다면 저임금이라도 감수하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신자유주의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회를 비웃어주고 벗어나면 된다. 도주. 다른 삶의 장소,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 떠난다. 이상한 조어기는 하지만 ‘얼터너티브 라이프’다. ∥ p. 336-337


∥ 사람은 쌀만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굶어 죽지 않는다. ∥ p. 73


저자는 짐짓 밝고 유머러스한 톤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사실 이만큼 우울한 이야기도 없다. 이건 어찌 보면 종말을 준비하는 노아의 방주 같은 이야기기도 하다. 영화로 치면 <테이크 쉘터> 정도가 되려나.



중요한 건 생존이고, 이 위기를 조금이라도 늦춰보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저자는 슬로우 라이프니 무농약, 유기농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얼터너티브 농부’에서 중요한 건 ‘얼터너티브’지 ‘농부’가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지속 가능하기만 하다면 뭐가 되든 상관없다.


∥ 앞으로 ‘알로하셔츠를 입은 사냥꾼’이나 ‘알로하셔츠를 입은 어부’, ‘알로하셔츠를 입은 나무꾼’, ‘알로하셔츠를 입은 베이비시터’ 같은 일도 생각하고 있다. ∥ p. 349-350


얼터너티브(대안)는 무한하게 많다. 저자가 선택한 것이 농사일뿐이고, 그래서 저자는 농사마저도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다시 오해를 피하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반드시 농사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우려한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면, 농본주의가 적으로 여기는, 적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농본주의가 백안시하는 ‘시장’이란 놈도 인류 문명사 안에서 보면 농업이 이끌어낸 시스템이라는 거다. ∥ p. 311



저자는 일종의 사상적 결벽증을 우려하는 것 같다. 순수주의, 근본주의 같은 것과는 분명한 선을 그으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진다. 그것이 다시 전체주의, 획일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가 신경 쓰고 있는 또 다른 부분이 바로 이 다양성이다. 


∥ 망상에는 어느 정도 개인차가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지닌 방향성, 벡터는 우스울 정도로 똑같다. 결국 욕망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캉의 유명한 발언을 빌리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나만의 욕망, 즉 나만의 자유를 추구할 의지를 잃어가는 것이다. ∥ p. 278


누구도 농사를 지으려고 하지 않는 시대다. 하지만 기자가 있어야 하듯이 농부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농사짓는 기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두의 노동형태와 생활 형태를 단일하게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태어났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단일해졌다. 

자본주의는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부와 자본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얼터너티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더더욱 ‘얼터너티브’의 위력을 강조한다.


∥ 어쩌다 얼터너티브 농부가 유행한다면 대자본과 국가가 박살낼 것이다.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런 건 아직 몰라도 괜찮다. 그냥 계속 움직이면 된다. 데굴데굴 구르듯 내가 변해가면 그만이다. 진짜배기 뮤지션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남았다. ∥ p. 347

저자가 문화부 기자로서 락음악에 심취해 있는 것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한마디로 러브 앤 피스다. 책 전체에 흐르는 여유와 유머, 허허실실의 근거는 바로 락스피릿에 있었다. 물론 저자에게 그런 소리를 한다면 그는 다시 ‘나는 락스피릿이 아니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첫 단추는 분명히 거기에서 기인한다.


∥ “그렇지만도 않잖아?”

모든 강압을 거부하는 펑크족의 입버릇도 실은 어느 세대나 똑같았다. 펑크족의 핵심은 음악적인 스타일이나 반권력, 반사회, 반체제를 ‘흉내’ 내는 것에 있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러면 펑크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DIY 정신. 이거면 된다. 


Do it yourself.


내가 원하는 것이 거기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라. 파괴가 아니다. 창조다. ∥ p. 336



이 모든 문제의식과 대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얼터너티브 농부 실험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한 가지 의도를 더 담고 있다. 바로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기성세대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면 젊은이들에게 단순하게 사과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이렇게 하라’고 충고해서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제로 그런 삶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삶도 가능하다고, 너만의 얼터너티브를 찾아보라고 말이다.

솔선해서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런 소리를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필요하지 않을까? 일반욕망에 얽매이지 않고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실제로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살아내고 있는 그런 롤모델이 필요하다. ∥ p. 308


이 실험이 요란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저자는 스타일을 중요시하며 포르쉐를 몰고, 유머감각을 유지하며 알로하셔츠를 고집한다. 하루에 한 시간만 일한다는 목표도 낮은 기준치를 마련해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저자는 그걸 실제로 구현했다. 증명해 낸 것이다. 


∥ 일단 1년 생활비와 별도로 20~30만 엔을 모아두면 된다. 회사가 없어지건 회사에서 잘리건,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논에 나가는 거다.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식량은 마련했다. ∥ p. 323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나름대로)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어떤 힘을 얻게 된다. 

저자는 절대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하지 않고 오로지 자본가들만 단결할 거라고 했지만, 그의 투쟁을, 그의 얼터너티브를 응원하고 싶다. 모두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 하지만 이건 출발선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겁먹거나 움츠러들지 말고, 쓰고 싶은 글, 써야 한다고 믿는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남은 일은 어떻게 사느냐다. ∥ p. 323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bouvar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이크 - 가짜 뉴스와 정보에서 진짜 돈과 자산을 지켜라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로버트 기요사키 지음, 박슬라 옮김 / 민음인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로 유명한 로버트 기요사키의 신작.

저자의 생각이 총집결된 책이기 때문에 이전 시리즈를 안 읽었다고 해도 읽는데 무리는 없다.


정규 교육 시스템을 거부하는 저자답게 아주 쉽고, 반복적으로 설명한다.

간단한 그래프나 도표로 설명하는 방식도 친절하고, 어려운 글들을 저자 나름대로 핵심만 짚어서 해설해 주는 것도 좋았다.


첫 번째 챕터인 ‘가짜 돈’이 이 책의 핵심이다.


전체 내용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나머지 두 챕터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반복한다. 첫 번째 챕터를 읽지 않으면 나머지 두 챕터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첫 번째 챕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가짜 돈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돈이 가짜 돈이다.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던 1971년부터 화폐는 가짜 돈이 되었다는 것.

이후로 세계의 중앙은행들은 필요할 때마다 돈을 찍어내고, 

그나마 그 가짜 돈도 대출의 마법을 통해 엄청나게 불어난다.

그것이 반복돼 오면서 이미 돈의 가치는 위태로울 정도로 추락했다. 

때문에 가짜 돈을 포기하고 진짜 돈에 집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부자들의 배만 채워주는 꼴이 된다.

아주 재밌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때론 충격적일 정도.


하지만 최상위 부자들과 정부는 이런 사실들을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가 교육, 그중에서도 금융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다.


가짜 교육과 가짜 선생을 다루는 두 번째 챕터는 때문에 저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이지만, 의외로 이 책의 가장 부실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미 첫 번째 챕터에서 다룬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기도 하고,

저자 자신만의 영적 생활(명상으로 대표되는)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기 때문에 약간 딴 길로 새는 느낌이다. 금융 교육과 더불어 영성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럼 진짜 돈은 무엇인가? 금과 은이다. 좀 더 넓게는 금, 은, 부동산.


그것은 인류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고,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돈이다. 실제로 주요 화폐 가치에 대비해 금의 가치는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저자는 시종일관 금과 은을 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재밌는 건 사 모으기만 하고 절대로 되팔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 나는 금과 은의 실물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구입한다. 남들과 거래하거나 팔 계획도 없다. 워런 버핏이 계속 주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나도 금과 은을 계속 갖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돈을 쓰고 싶은데요.” “난 돈이 필요해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 p. 79



그렇다면 이건 여윳돈이 있는 사람들의 투자 이야기다.

저자는 금이 비싸다면 은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쓸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실 저자의 금 모으기(?)는 재테크가 아니라 위기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위기 상황은 곧 몰려올 대재앙이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정도의 재앙이 아니라 훨씬 큰, 세계적 규모의 재앙이다.

그것은 시장의 붕괴, 계급혁명, 전체주의 정권의 등장, 그리고 어쩌면 전쟁까지도 동반할지 모른다.


∥ 시장이 붕괴하면─이는 필연적인 결과다.─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 p. 435


∥ 역사적으로 볼 때, 최상위 부유층과 다른 계층과의 경제적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지면 혁명이 발발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러시아와 쿠바, 베네수엘라의 경우에도 부유층과 나머지의 빈부 격차가 극심해졌을 때 혁명이 발발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새로운 혁명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닐까? ∥ p. 136



∥ 이 거대한 눈사태가 전산 시스템을 강타하기라도 한다면 정부의 돈과 대중의 돈은 둘 다 끝장이다. ATM 작동이 중단되고, 월스트리트가 사라질 것이며, 월드와이드웹이 무너지면 대중의 돈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 p. 505


저자는 얼마만큼의 현금을 따로 보관하고 있고, 금을 계속 사들여 해외의 사설 금고에 보관하고 있으며, 도시에서 떨어진 곳에 집을 사두기도 했다. 그는 위기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세 번째 챕터에서는 자산과 자산 늘리기에 대한 개념을 바꾸기를 촉구하는데, 의외로 영적인 각성을 요구한다.


책 전체에 걸쳐서 영적인 이야기를 다루기도 하고, 종교적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성경 말씀을 돈 문제에 직접 적용시키기도 하는데, 사실 저자의 말은 종교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자신의 말을 뒷받침할 근거로서 종교의 일부분을 가져다 쓰는 정도다.


오히려 투자 전략 자체가, 시장 경제를 내다보는 혜안 자체가, 그리고 금과 은 자체가 저자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배금주의(拜金主義)처럼 보인다. (저자는 금을 ‘신의 돈’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냥 ‘금이 신’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엄청난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다.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무엇을 믿어야 하나. 어디서 안전을 구할 것인가. 저자는 자신의 몸을 숨길 피난처를 마련한 것이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피난처. (저자의 방식에 의하면 적어도 돈에 있어서만큼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게 가능해 보인다)


결국 그가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각자가 능력을 키워야 하고, 각자가 ‘진짜 돈’인 금본위제를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갖추기 위해 평생에 걸쳐 ‘진짜 선생’을 찾아가 ‘진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과감히 배움을 실천했다. 투자에는 용기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고, 그래서 그는 교육과 영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못난이처럼 징징거리고 우는소리하는 걸 금지한다. 


∥ “나는 그럴 형편이 못 돼요.”

“말도 안 돼.”

“난 돈에 관심이 없어요.”

“난 결코 부자가 되지 못할 거야.”

“난 저런 걸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아.” ∥ p. 566


믿을 건 자신밖에 없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그는 자기만의 도를 깨우친 자기만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것을 다시 나눠주는 진짜 선생이 되고자 한다.


그의 이런 의도들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겁이 났다.

그가 예측하는 끔찍한 위기가 실제로 벌어졌을 때, 나와 내 가족이 얼마나 무기력할지를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런 상황에서도 부자들은 살아남을 것을 생각하면 더 끔찍하다.

세기말도 훌쩍 지난 지금,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종말은 그야말로 ‘도적같이’ 우리 앞에 왔다. 


저자는 ‘진짜 선생’이다. 그래서 그가 갖는 조바심과 걱정이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이 주는 가장 중요한 점은 그런 경각심이 아닐까 싶다.

진짜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당신은 피할 곳을 마련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