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밥벌이 - 하루 한 시간이면 충분한
곤도 고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 우석훈 해제, 하완 그림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아사히신문 기자가 농사를 짓겠다고 시골로 내려가서 겪는 이야기.

저자는 자신을 ‘얼터너티브 농부’로 이름 짓는다.


∥ 얼터너티브 농부란 얼터너티브 록에서 따왔는데, 내가 만든 말이다. 다들 알다시피 ‘얼터너티브(alternative)’는 ‘또 다른’, ‘메인 스트림과는 다른’이라는 뜻이다. 얼터너티브에 속한 이는 우연히 변두리나 경계에 있을 뿐,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거나 변두리에 있으려고 굳이 애를 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변두리에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 p. 71



이런 기이한 일을 벌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계속해서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기 위해서(반대로 쓰기 싫은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 

생계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최소한 자신이 먹을 쌀을 자신이 기르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런데, 거기에는 좀 더 복잡한 의도가 깔려있다.



그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책 전체에 유머러스하고 허허실실 한 가벼운 톤을 유지시켰기 때문이기도 하고,

계속해서 몇 가지 이유를 들긴 하지만, 명확하게 ‘이거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혁명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며, 반자본주의나 자연주의도 아니고... 


워낙에 저자의 입장이 미묘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그에 따라 할 말도 많기 때문에 한참을 돌아가는 면도 있을 것이다. 


∥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여기서 오랜 촌락 공동체주의와 근대주의를 대치시켜 어느 쪽으로 가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 p. 208


∥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탈자본주의나 반자본주의 혁명 같은 것을 외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들 툭하면 ‘자본주의로는 안 되니 다음에는 ○○주의다’ 하며 거창한 사상을 주장한다. 나는 그런 사상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다. 철저한 ‘혁명 반대파’다. 반혁명이 아니다. 혁명 자체를 반대할 뿐. ∥ p. 287


∥ 혁명이고 유토피아고 개나 줘라. 내가 하려는 일은 그저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맥없이 묶여 살아서는 진짜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없다’는 가설을 스스로의 실험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다. ∥ p. 170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애매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다. 그런 애매한 것이 아닌 뭔가 분명한 입장이.



일단 분명한 건 저자는 곧 다가올 위기를 감지하고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심하게 벌어지는 계급 간의 격차, 그것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더 극심해질 것이다. 


∥ 자본주의는 틀림없이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단말마의 마지막 몸부림 때문에 앞으로 한 줌도 안 되는 부유층은 더욱 부유해지고, 선진국 정부는 더더욱 그 부유층에 의지하게 되는 동시에 부유층의 머슴이 되어갈 것이다. ∥ p. 337


그리고 끝내 이 사회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 ‘이런 불평등은 용서할 수 없다’가 아니라 ‘이런 불평등이 허용된다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p. 54



위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위기는 사회 전반의 기반을 뒤흔드는 대규모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 전쟁이란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공공사업이다. ∥ p. 167


∥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이나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날 때, 전쟁이라도 일으켜 밖에서 활로를 찾아야 하지 않겠냐는, 경기가 좋아진다면 전쟁이든 뭐든 하자는,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포자기에 빠질 때 전쟁에 대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런, 될 대로 되라는 분위기가 압력으로 변해 어느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전쟁이 일어난다. ∥ p. 172


그 위기에 대한 저자의 대처가 바로 ‘얼터너티브 농부’ 실험이다. 

노동문제를 해결하면서, 먹고 살 수 있으며, 자본주의에 묶이지 않으면서, 소비를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스타일을 구기지 않는 길.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쓰기 싫은 글을 쓰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자 쓰고 싶은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길. 

역시나 아주 미묘한 틈새에 놓인 미묘한 해결책이다.


∥ 내가 그렇게 쉽게 세상으로부터 내쫓길 줄 아는가? 이 세상을 살아갈 빈틈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말겠다. 

자아를 탐구하겠다느니, 뭐 그런 거창한 생각은 없다. 영원한 틈새 찾기. 나는 ‘구르는 돌’이다. 그래서 즐겁다. ∥ p. 350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협박해서 일을 시키고 있다. 그 협박의 근거는 ‘굶어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굶어죽고 싶지 않다면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참고 일하라는 것. 

저자는 그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자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살짝 벗어날 필요가 있다. 돈이면 다 되는 도시에서 살짝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살짝’이라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을 인정한다. 


∥ 그렇지만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농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기생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

기생하던 나 자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본질적인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나는 직장에서 벗어나려는 게 아니다. 어딘가에 기생하는 삶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 p. 252


그렇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부터 살짝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고, 고작해야 교환경제에 머물면서 말이다. 그것이 저자가 시골로 내려간 이유다. 그것은 일종의 벗어나기, 도주다. 다시 말해, 얼터너티브다.


∥ 굶어 죽기 싫다면 저임금이라도 감수하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신자유주의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회를 비웃어주고 벗어나면 된다. 도주. 다른 삶의 장소,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 떠난다. 이상한 조어기는 하지만 ‘얼터너티브 라이프’다. ∥ p. 336-337


∥ 사람은 쌀만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굶어 죽지 않는다. ∥ p. 73


저자는 짐짓 밝고 유머러스한 톤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사실 이만큼 우울한 이야기도 없다. 이건 어찌 보면 종말을 준비하는 노아의 방주 같은 이야기기도 하다. 영화로 치면 <테이크 쉘터> 정도가 되려나.



중요한 건 생존이고, 이 위기를 조금이라도 늦춰보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저자는 슬로우 라이프니 무농약, 유기농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얼터너티브 농부’에서 중요한 건 ‘얼터너티브’지 ‘농부’가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지속 가능하기만 하다면 뭐가 되든 상관없다.


∥ 앞으로 ‘알로하셔츠를 입은 사냥꾼’이나 ‘알로하셔츠를 입은 어부’, ‘알로하셔츠를 입은 나무꾼’, ‘알로하셔츠를 입은 베이비시터’ 같은 일도 생각하고 있다. ∥ p. 349-350


얼터너티브(대안)는 무한하게 많다. 저자가 선택한 것이 농사일뿐이고, 그래서 저자는 농사마저도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다시 오해를 피하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반드시 농사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우려한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면, 농본주의가 적으로 여기는, 적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농본주의가 백안시하는 ‘시장’이란 놈도 인류 문명사 안에서 보면 농업이 이끌어낸 시스템이라는 거다. ∥ p. 311



저자는 일종의 사상적 결벽증을 우려하는 것 같다. 순수주의, 근본주의 같은 것과는 분명한 선을 그으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진다. 그것이 다시 전체주의, 획일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가 신경 쓰고 있는 또 다른 부분이 바로 이 다양성이다. 


∥ 망상에는 어느 정도 개인차가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지닌 방향성, 벡터는 우스울 정도로 똑같다. 결국 욕망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캉의 유명한 발언을 빌리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나만의 욕망, 즉 나만의 자유를 추구할 의지를 잃어가는 것이다. ∥ p. 278


누구도 농사를 지으려고 하지 않는 시대다. 하지만 기자가 있어야 하듯이 농부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농사짓는 기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두의 노동형태와 생활 형태를 단일하게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태어났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단일해졌다. 

자본주의는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부와 자본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얼터너티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더더욱 ‘얼터너티브’의 위력을 강조한다.


∥ 어쩌다 얼터너티브 농부가 유행한다면 대자본과 국가가 박살낼 것이다.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런 건 아직 몰라도 괜찮다. 그냥 계속 움직이면 된다. 데굴데굴 구르듯 내가 변해가면 그만이다. 진짜배기 뮤지션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남았다. ∥ p. 347

저자가 문화부 기자로서 락음악에 심취해 있는 것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한마디로 러브 앤 피스다. 책 전체에 흐르는 여유와 유머, 허허실실의 근거는 바로 락스피릿에 있었다. 물론 저자에게 그런 소리를 한다면 그는 다시 ‘나는 락스피릿이 아니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첫 단추는 분명히 거기에서 기인한다.


∥ “그렇지만도 않잖아?”

모든 강압을 거부하는 펑크족의 입버릇도 실은 어느 세대나 똑같았다. 펑크족의 핵심은 음악적인 스타일이나 반권력, 반사회, 반체제를 ‘흉내’ 내는 것에 있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러면 펑크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DIY 정신. 이거면 된다. 


Do it yourself.


내가 원하는 것이 거기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라. 파괴가 아니다. 창조다. ∥ p. 336



이 모든 문제의식과 대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얼터너티브 농부 실험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한 가지 의도를 더 담고 있다. 바로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기성세대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면 젊은이들에게 단순하게 사과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이렇게 하라’고 충고해서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제로 그런 삶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삶도 가능하다고, 너만의 얼터너티브를 찾아보라고 말이다.

솔선해서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런 소리를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필요하지 않을까? 일반욕망에 얽매이지 않고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실제로 자신의 삶을 떳떳하게 살아내고 있는 그런 롤모델이 필요하다. ∥ p. 308


이 실험이 요란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저자는 스타일을 중요시하며 포르쉐를 몰고, 유머감각을 유지하며 알로하셔츠를 고집한다. 하루에 한 시간만 일한다는 목표도 낮은 기준치를 마련해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저자는 그걸 실제로 구현했다. 증명해 낸 것이다. 


∥ 일단 1년 생활비와 별도로 20~30만 엔을 모아두면 된다. 회사가 없어지건 회사에서 잘리건,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논에 나가는 거다.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식량은 마련했다. ∥ p. 323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나름대로)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어떤 힘을 얻게 된다. 

저자는 절대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하지 않고 오로지 자본가들만 단결할 거라고 했지만, 그의 투쟁을, 그의 얼터너티브를 응원하고 싶다. 모두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 하지만 이건 출발선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겁먹거나 움츠러들지 말고, 쓰고 싶은 글, 써야 한다고 믿는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남은 일은 어떻게 사느냐다. ∥ p. 323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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