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리처드 리브스 지음, 김승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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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회적 격차는 상위 1%와 나머지 99%가 아닌,

중상류층 20%와 그 외 80% 사이에 존재한다는 주장.


익숙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초점이 다른 주장이다.



∥ 지금쯤 당신은 어디서 다 들어 본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부유하고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사회 계층적으로 뚜렷이 분리되는 현상을 다룬 책이 이미 많은데 계급과 불평등에 대한 책을 또 한 권 내놓는 것은 쓸데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 주제를 다룬 몇몇 주요 저서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계급 분화를 부정확하게 진단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자들은 슈퍼 리치나 상위 1퍼센트에만 초점을 두어 중상류층의 (그러니까 나나 당신의) 책임을 쏙 빼놓는다.  p. 39



최상위층의 책임에만 집중하다 보면, 중상류층의 책임을 간과하게 된다는 말.

사실 가장 큰 격차는 20%와 그 아래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새로울 뿐 기본적인 원리는 1:99나 20:80이나 마찬가지다.



- 사회적 계급은 점점 더 고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 그러다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한 위치에서 출발하게 되고,


- 타고난 것과 환경적인 부분 모두에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적인 능력만으로 그것을 극복하거나, 책임을 지기에는 불가능해진다.



사실 이 정도는 한국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상식적인 문제들이다.

단지 우리에게 익숙한 문제를 미국의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한 기시감이 들긴 한다.



저자 자신이 중상류층인 상위 20%를 자처하고 있고,

자신과 같은 20%의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조목조목 설득한다.


문제의 핵심인 중상류층이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위 80%에서도 한참 아래쪽에 위치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남의 얘기일 뿐)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가진 자들의 자발적인 선의에 기댄다는 것도 이미 익숙한 논리.


어쩌면 그것이 민주주의-자본주의의 최대 맹점인지도 모르겠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들의 선의를 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거지도 그렇게 하다간 굶어죽고 말 거다.

법적인 제도의 중요성이 절실한 부분이다. 

하지만 법적 강제력을 강조하다 보면 다시 자유와 개인의 성취를 침범한다는 우려가 생긴다. 그래서 해결은 쉽지 않다.


저자는 골고루 해결책을 시도해야 한자고 제안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이 유서 깊은 불공정 관행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우리에게는 세 가지 무기가 있다. 법, 돈, 염치. 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 210



이 책은 익숙한 논리들을 새로운 프레임(20:80)에 대입하고 있다.

거기다 첫 번째 장에 저자의 주장 전부를 압축해서 소개하고 있다.

나머지 뒷부분은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들로 구체적인 뒷받침을 하는 모양새.


그래서 엄청나게 놀라운 새로운 이야기로만 채워진 건 아니다.

미국의 사례이지만 우리나라에 그대로 대입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위화감이 없다.

짧은 분량으로 저자의 새로운 시각을 습득하고 문제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장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최상위층과 중상류층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상위 1퍼센트는 고정된 집단이 아니라 구성원이 계속 달라지는 집단이다.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의 마크 랭크에 따르면 최상류층은 별도의 집단이라기보다 상위 20퍼센트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랭크는 연 소득 25만 달러 이상인 가구를 조사했는데 매년 이 집단은 인구의 2퍼센트에 못 미치는 정도를 차지했다. 그런데 평생 중에 적어도 1년 이상 여기에 속하는 사람은 인구의 20퍼센트나 되며, 이러한 ‘일시적인 최상류층’의 대다수는 생애 대부분의 기간을 상위 20퍼센트 속에서 살아간다. 다른 말로 하면 상위 1퍼센트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 중 잘나가는 시기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p. 46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애매한 위치는 중상류층에게 자유로운 포지션을 선사한다.

그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익숙한 1:99 프레임 뒤에 숨을 수 있다.


2011년 월스트리트에서 발생했던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3분의 1 이상이 연 소득 10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p. 21)


최상류층의 독식에 분노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 독식의 혐의가 있고, 심지어는 빈번히 최상위층으로 올라가기도 하는 계급이라니. 필요에 따라 상류층 행세를 할 수도, 서민 코스프레를 할 수도 있으면서 독식에 대한 비난은 받지 않는 좋은 포지션을 가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발적인 각성과 선의를 바란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걱정이 앞선다.



두 번째로 재밌었던 부분은 계급 문제는 결국 제로섬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급 간의 이동성을 더 높인다는 말은 불평등한 기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위 계급으로 올라가는 사람만큼 아래 계급으로 몰락한 사람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가 지금보다 더 낮은 계급으로 내려가고 싶어 하겠는가. 때문에 중상류층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에 목을 맨다. 도태는 곧 죽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자녀를 위해 한 일도 그런 위기감 때문에 벌인 일일 것이다)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계급이라는 계단의 높이를 줄이자는 것이다(특히 20%와 80%의 경계에 있는 격차를). 아래 계급으로 떨어졌을 때의 타격이 심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낮은 계급으로의 이동이 그렇게까지 공포를 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이 단순히 계급 자체를 부정하고 중상류층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계급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저자가 영국인으로 오래 살다가 미국인으로 귀화한 사람이기 때문에 얻어지는 예민한 감각이다. (그는 영국의 계급 사회가 싫어서 미국으로 귀화했다)


유럽인들은 미국에 계급이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평등과 자유에 대한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계급에는 둔감하다. 오히려 그들은 부자들을 존경한다. 개인적인 성취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재미있게 여겨졌던 세 번째 부분이다.


 셰릴 키신이 저서 『인종이 아니라 장소』에서 지적했듯이, “민권 운동가가 인종적 불평등을 논하거나 진보적인 학자가 ‘백인 특권’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실제로 비교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유색 인종 대 부유한 백인이다. (다양성에 대한) 논쟁에서 노동자 계급 백인은 별도로 이야기되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 백인은 자신이 특권층이라고 느끼지 않으며 전 지구화된 경제에서 그들은 실제로 특권층이 아니다.”  p. 178



물론 문제의 모든 부분을 설명해주지 못하겠지만, 미국 백인 보수층이 불만을 품게 된 배경도, 미국이란 나라가 지나치게 계급 문제를 감안하지 않고 인종 문제에 매몰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은 봉건국가도 아니고 입헌군주제도 아니다.

일찌감치 왕조는 끝이 났고 물밀듯 밀려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지탱되고 있는 나라다. 아마 어느 나라보다도 계급에 대한 경계심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사회적 계급은 존재한다. 그리고 중상류층의 위상은 공고하다.


우리는 저자가 영국과 미국을 비교하며 느꼈던 것과 같은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

단순한 예로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에 비교해 더 평등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입헌군주제로 일왕이 존재하는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말이다.


 미국이 내게 언제나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개방성과 평등에 대한 약속이었다. 나는 영국에 팽배한 상류 계급의 우월 의식과 계급 구분을 늘 싫어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나의 새 조국을 더 잘 알게 될수록 여기에서도 계급이 고착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특히 계급 사다리의 위쪽은 영국보다도 경직성이 심했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주된 차이는 미국인들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p. 230



책의 말미에 실린 저자가 제시하는 해답들은 보통 그전에 미국에 존재하는 시스템을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미 해답의 실마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실마리들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 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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