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웃음소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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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과거에 눈을 얼마나 적게 사용했는지 깨닫고 경악했다―그 색채들이 너무 모호한 배경을 가로질러 움직이고, 윤곽들은 묘하게 번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때 살았던 곳의 풍경을 기억한다고 할 경우, 떡갈나무나 장미 외에는 식물의 이름을 단 하나도 말할 수 없었고, 참새와 까마귀 외에는 새 이름을 단 하나도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런 것들조차 자연이라기보다는 어떤 문장紋章에 가까웠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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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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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동안에도 혹시 내가 잘못하는 건가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딱히 불안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데 뭐, 이렇게 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잖아. 그게 뭐가 나빠?’ 하고 모른 척 넘어가버렸습니다. 아직은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쯤에는 시대도 변화를 달성할 것이고 내가 해온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증명될 것이다, 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째 좀 낯 두꺼운 소리 같습니다만.
그것이 현실로 증명되었는지 어떤지, 지금 이렇게 주위를 빙 둘러봐도 나 자신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문학에서는 뭔가 증명되는 일이라고는 영원히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거야 어찌 됐든, 삼십오 년 전에도 지금 현재도 내가 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는 신념에는 거의 흔들림이 없습니다. 앞으로 삼십오 년쯤 지난 다음이라면 다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르지만, 그 전말을 내가 지켜보는 건 연령상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든 내 대신 잘 지켜봐주십시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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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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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출판사에 글을 보내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어리석게도 도서관에서 글쓰기에 대한 쓸모없는 책들만 뒤졌다. 그러다가 버려진 <작가>지 한 부를 발견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잡지였다. 그 잡지를 본 나는 다른 호를 더 찾으러, 그리고 다른 잡지들을 더 찾으러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런 잡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나는 금세 소설을 어떻게 보내는지 알아냈고, 내 소설은 바로 우체통에 들어갔다. 몇 주 후에 나는 첫 번째 거절 통보를 받았다.
나이가 더 들어서 나는 거절 통보를 받는 것은 당신 자식이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화가 나고 한 마디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 출판되어 멀쩡하게 나가고 있는 그 모든 못생긴 아이들을 보라!
p.268-269 <긍정적인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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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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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이라가 그 자신과 같은 나약한 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늘리려고 한 것은 고독과 나약함을 서로 나누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는 자기 자신을 배신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까지도 그 안으로 끌어넣으려고 했다.

- 엔도 슈사쿠



인용구는 작가 본인의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나약함까지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본인이 나약하다고 해서 `너도 다를 바 없어`라는 식으로 작품을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적당한 타협주의로 신앙을 변질시키고 자신의 나약함에 안도한다. `너희들은 나를 비겁하다 하겠지만 하나님은 아니라는 걸 알아!`라는 식인데, 그렇게 자기 편한 식으로 해석하는 걸 우리는 `이단`이라고 부른다.

(사진은 먼나라 이웃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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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확실히 거칠다. 초중반까지는 약간 서두르는 느낌마저 느껴진다. (센 설정과 속도감 있는 진행은 더욱 섬세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그리고 경찰의 역할이 지나치게 배제되어 있고 기능적으로 작동한다. 이런 사소한 것들 외에도 여러 가지 단점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런 단점들을 단순히 작가의 미숙한 역량으로 치부하기에 이 소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어떤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그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단점들에 대해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단점은 주인공인 선이의 동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원래 연락을 끊고 살던 관심 밖의 동생인데, 그녀가 실종됐다는 사실만으로 갑자기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죄책감이란 동기도 나중에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탑재된 것이 아니다. 뭔가 내면의 이유라도 만들어줬다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 전체에 어떤 ‘분노’가 느껴진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억압된 여자들을 대변하는 분노’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일종의 여성들의 분노다. 그리고 그 분노가 어느새 선이의 주요 동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기묘한 부분이데, 인물의 동기에서 작가의 태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태도가 인물의 동기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동기부여가 작품 전체를 더욱 독특하게 만드는 이유는, 여성억압에 대한 분노가 여성이라는 집단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이의 분노마저 여성연대로서의 분노로 느껴지게 만들어서, 친언니로서 사건을 대하는 것이 아닌 같은 피해자 여성으로서 반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의 자매는 철저히 여성 연대로서 분노하고 화해한다. 때문에 그 밖의 개인적 동기는 무의미하다. 선이와 장이, 그리고 여형사의 인물들은 서로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반부에서 장이 이모가 장이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끝내 김현지란 여배우를 피해자로 만들며 연민의 시선을 드러내는 건 어떠한가. 이 이야기는 개인의 복수극이 아니라 여성 연대로서 가해자 남성에 대한 복수극인 것이다.

 

여성 억압은 외부시선으로 형상화 된다. 마치 유리감옥에라도 들어가 있는 것처럼 여성들은 철저히 어떤 시선에 억압되어 있다.

초반 윤선이의 면접, 예능프로그램의 관찰 카메라, 포르노를 찍는 카메라, 장이를 주시하는 집안의 CCTV 등 남성적인 시각은 폭력적으로 여성을 가둔다.

 

처음 장이와 핸드폰으로 연결이 닿았던 김미희의 말을 들어보자.

「“그런데 말이죠.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장이가 그 세계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에게는, 자신을 뒤쫓아 다니는 카메라의 시선이 전부였던 거죠. 위기에 처한 친구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p.247)

 

경찰서에서 선이를 만난 여배우 김현지의 모습은 어떤가.

「서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는 잠시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치듯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현기증이 났는지 한 차례 몸을 휘청거렸다. 옆에 있던 경사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p.258-259)

 

그리고 그나마 그 폭력적인 시선은 삐뚤어져 있는 것이다.

「이웃집에 사는 어린 소년들, 남자가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한 아이는 귀가 작았고, 나머지 하나는 눈이 컸다. 남자가 인간을 보는 방식은 그런 식이었다. 한 사람을 조화로운 유기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을 찾는 것이다.」 (p.288)

 

아버지인 윤재열의 자발적인 나체와 장이의 강압적인 나체는 이 사회에서 남녀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상이하게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때문에 작가는 장이의 포르노를 찍었던 이범준을 벌거벗기고 핸드폰으로 그 모습을 찍으면서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싫어!”

“봐!”

아버지가 비명을 지르며 보란 듯이 눈을 감았다. 나는 그의 턱을 잡고 흔들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눈을 뜨려 하지 않았다.

“왜 안 봐?”

“싫어!”

“당신은 봐야 되잖아.”

“안 봐! 안 볼 거야!”

“너는 봐야 되는 거잖아.”」(p.314)

선이가 아버지에게 강제로 영상을 보여주는 장면은 그래서 악에 받쳐있다. 가해남성에게 스스로 한 짓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는 것 자체가 죄이고, 보는 것 자체가 자기 죄를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렇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자기 영상만 본다. 아무도 바라보는 시선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온몸이 털로 뒤덮인 장이이모의 존재는 흥미롭다. 그녀가 날마다 의식처럼 행하는 제모 과정은 사회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여성성 회복이기 때문이다. 외부 시선에 억압되고 그것에 최소한 발맞추려고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장이 이모는 고집스레 여성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 가발을 태워버리며 사회적 젠더 선택을 포기해 버린다. 그런 의미로 생각해 봤을 때 장이이모가 장이의 머리를 밀어버릴 때는 폭력적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해방감이 있다. 장이를 해방시키는 첫 번째 단계는 반드시 그래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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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수의사는 얼핏 생뚱맞아 보인다. 하지만 그가 중간에 끼인 존재라는 사실은 소설 전체를 흥미롭게 이어준다. 등장 위치마저 소설의 중간에 끼어 있는 이 남자는 ‘피해 여성’과 ‘가해 남성’ 사이에 낀 이도 저도 아닌 제3자를 떠올리게 한다.

죽은 돼지 열 마리와 산 돼지 열 마리 사이의 존재, 윗층과 아래층 사이의 존재, 물밑과 물 밖 사이의 존재. 수의사는 ‘피해 여성’과 ‘가해 남성’ 사이에 낀 ‘아무 잘못 없는’ 남자(혹은 여자)다. 그들은 의무는 아닐지언정 도의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귀찮아서, 혹은 지쳐서 모르는 척 눈 감아 버리는(혹은 귀를 막아버리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때, 기어코 사건은 터진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참사.

그가 고정권의 사체를 보고 죄책감에 휩싸여 자기가 범인이라 주장한 것은 어쩌면 맞는 말이다. 지금도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침묵이 피해자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전체에 걸쳐 중간 중간 삽입된 익명의 말들은 그런 침묵이 만들어낸 소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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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이모가 예비부부의 웨딩 촬영을 돕는 에피소드는 오히려 선이의 공포를 표현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형사로부터 서해순에 대한 의문을 전해들은 다음 이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것에 주목하자.

아무리 좋은 남자이고, 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사랑한 남자라도 얼마든지 추하고 공격적인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남자란 존재는 여자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위험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이후 선이가 열쇠집 아들에게 쫓기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지나가던 남학생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 남학생이 또다른 가해자라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는가. 남자라면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여자로서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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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또 다른 단점은 후반부에 나타난다. 해순이 장이이모와 송성원과 만나는 장면 이후로 구덩이에서 일어나는 이들까지. 이런 긴박한 막판 상황들에서 인물간의 합이 잘 맞지 않는다.(혹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다. 인물들의 동선을 비롯해 공간적으로도 파악이 정확히 되지 않아서 대단히 연극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모호한 공간 속에서 모호한 동선들을 그리며 인물들의 감정과 의사소통만 선명하게 부각된다. 마치 각자의 방백을 늘어놓는 연극배우들 같다. 감정과 감성을 강조하다보니 리얼리티가 그것에 맞춰 이뤄지는 느낌이랄까.

이 문제 또한 이 소설이 얼마나 분노의 감정을 분출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 소설에서의 공간은 리얼하지 않다. 공간은 그저 감정을 채우는 빈 용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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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여러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방식이 한편으로 수긍이 가는 이유는, 작년에 휘몰아쳤던 페미니즘 열풍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미러링이란 방식으로 메갈리안들이 행했던 방식은 대단히 폭력적인 분노가 느껴졌었다. 나는 <시스터>라는 이 소설이 페미니즘 열풍이 분 뒤 거의 처음 도착한 한국 패미니즘 소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 소설의 태도는 메갈리안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작년에 있었던 열풍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처럼 느껴진다. 2015년의 페미니즘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소설이 좋은 대답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동시대를 반영하기에 적합한 예술장르라고 봤을 때, 이 소설은 반대로 동시대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좋은 반영물이 되어줄 것 같다.

이 소설은 거칠다. 하지만 이 소설이 동시대의 반영이라면, 소설은 거칠어지는 게 옳다. 작가는 마치 속기사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동시대의 모습을 받아 적어 놓았다. 아마도 그 다급함의 이유는 자신의 무기력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받아 적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

 

「나는 동생에게 좋은 거울이 아니었다. 장이는 내가 가족 내에서 실패하고 잊혀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장이는 자신이 잘하지 못하면 본인 역시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은 아마도 ‘언니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p.394)

 

지금껏 단점만을 나열했지만 이 소설에는 분명 장점이 있다. 장이의 일기 부분은 어느 부분보다 서스펜스가 넘쳤다. 참고 보기 힘들 정도로. 위에서 예시로 든 문장들 말고도 날카로운 문장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 독서를 즐겁게 했다. 무엇보다 우직하게 자기 스타일대로 밀고 나간 박력은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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