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돌로레스 클레이본 ㅣ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스포 있습니다★★
1992년 리틀톨 섬의 돈 많은 과부 ‘베라 도노반‘이 죽는다. 유력한 용의자는 수십 년간 가정부를 해오던 ‘돌로레스 클레이본(65)‘이다. 돌로레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찰 관계자 3명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만년의 베라와의 일상부터, 29년 전에 자신이 남편 ‘조 세인트 조지‘를 살해했다는 고백과 베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1인칭 시점에서 줄줄줄줄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끊어 읽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킹이 글을 잘 쓰기도 하지만, 챕터가 전혀 나눠져있지 않기 때문에 더 그렇다.
깐깐하지만 오락가락하는 늙은 집주인 베라에 대한 이야기는 ‘뭐야ㅋㅋㅋ‘하며 웃으면서 읽었지만, 망할 놈의 남편 이야기가 나오면서 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어느 날 알코올중독자 남편의 폭력에 당하기만 하던 돌로레스는 조에게 도끼를 들고 협박을 하여 그의 폭력을 멈춘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본 첫째 딸 셀리나는 엄마를 멀리하게 되고 아빠를 위해주는데... 그게 그만 조가 셀리나를 만지는 상황으로 확대된다. 셀리나의 고백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돌로레스는 일단 남편의 행동을 저지하는 데서 그치지만, 베라의 한 마디에 끝내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1963년 7월 20일. 돌로레스는 남편 조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하다.
환하던 태양을 달이 가리고 있는 순간, 다른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개기일식에 쏠려있던 그 순간, 조를 죽이기 위해 고뇌하고 고민해오던 돌로레스는 조를 유인해 마른 우물에 빠뜨린다.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 않은 조가 우물을 빠져나오려는 장면은 섬뜩하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돌로레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과 우물을 왔다 갔다 하며 확인하는 장면과 누군가를 죽인다는 엄청난 선택과 그 행동에 대한 묘사가 정말 실감 난다.
가족을 자녀들을 딸을 위해, 딸을 겁탈하려는 남편 조를 죽인 돌로레스를 어떻게 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돌로레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셀리나한테 했던 것처럼 똑같은 걸 물어보려나 보다 했어. 그래서 셀리나한테 했던 것처럼 똑같은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 그 애가 엉뚱한 걸 묻는 거야. ˝엄마, 아빠가 죽어서 기쁘다고 하면, 하느님이 나를 지옥으로 보낼까요?˝
˝조, 감정은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하느님도 알고 계실걸.˝
그랬더니 그 애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뭐라고 하는데, 그게 얼마나 가슴 아픈 소린지. ˝난 아빠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어. 항상 노력했다고요. 그런데 아빠가 날 가만 내버려 두질 않았어요.˝
(여기서 조는 아들 ‘조 주니어‘)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성을 되찾은 주인공의 이름을 책 제목으로 한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돌로레스 세인트 조지 → 돌로레스 클레이본)
그녀의 수다스러운 인생 이야기가 어쩌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조를 살해하려는 순간부터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면서 글을 읽었다. 급박한 순간 속에서 조급하고 불안한 돌로레스에게서는 스릴을 느꼈고, 순간순간 조의 모습에서 망설임을 느끼던 돌로레스에게서는 연민을 느꼈다. 비록 지랄맞은 성격이지만 베라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는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그 여편네는 계단을 반 이상 내려간 곳에 쓰러져 있었는데, 두 다리가 심하게 뒤틀려서 몸 아래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일 정도야. 늙어 빠진 얼굴 한쪽으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내가 죽어라 난간을 움켜쥔 채로 비틀비틀 내려가니까 여편네가 한쪽 눈을 움직여서 나를 봤어. 덫에 걸린 짐승 같은 표정으로.
- 왜 이 장면이 그토록 안쓰럽고 불쌍해 보일까...
스티븐 킹이 글을 잘 쓴다는 건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번에도 특히 감탄스러운 부분이 있어 기록한다.
마치 1962년 11월의 그날 같았어. 내가 하마터면 우물에 빠질 뻔한 덕분에 그 낡은 우물을 찾아낸 날 말이야. 그날 판자가 부러질 때처럼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고. ‘조심해라, 돌로레스 클레이본. 아주, 아주 조심해. 오늘은 사방에 우물이 있어. 그리고 이 사람은 그 우물들이 어디 있는지 죄다 알고 있어.‘
- 남편을 살해하고 심문을 받던 돌로레스 클레이본. 어린 자녀 셋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우물‘이라는 키워드를 이렇게 오버랩하다니...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돌로레스?˝ 여편네가 그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어. ˝난 당신보다 더 커다란 대가를 치렀어. 내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그래도 나는 그걸 견디며 살았어. 아니, 그뿐이 아니지. 나한테 남은 거라고는 그 먼지 덩어리하고 현실에서 이룰 수 없었던 꿈밖에 없었을 때도 나는 그 꿈을 받아들여 내 걸로 만들었어. 먼지 덩어리는 어떻게 했냐고? 글쎄, 결국은 내가 그 녀석들한테 잡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그 녀석들을 견디며 산 세월이 얼만데. 이제 당신도 당신만의 먼지 덩어리들을 처리해야겠지만, 졸랜더네 아이를 해고한 게 잔인한 짓이라고 말했던 날, 그때의 배짱을 잃어버렸다면 맘대로 해. 가서 뛰어내리라고. 그런 배짱이 없으면 당신도 그냥 멍청한 할망구일 뿐이니까, 돌로레스 클레이본.˝
- 베라가 죽은 다음날, 돌로레스 역시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들려온 베라의 목소리.
‘먼지 덩어리‘처럼 어느 틈엔가 생겨나는 악몽과 같은 기억들. 말년의 베라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먼지 덩어리의 정체다.
내 인생에서의 먼지 덩어리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아가씨가 그 기계 중지 버튼을 누르기 전에 내가 할 얘기가 두 가지 더 있는 것 같네, 낸시. 결국 오래오래 살아남은 건 이 세상의 나쁜 년들이라는 얘기랑……, 먼지 덩어리들한테 해 주고 싶은 말.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