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심보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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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이고, 그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와 베버가 말하듯 삶과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으로 시작하여 고독한 작업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 출발과 회귀 사이에는 고독한 여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 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베버와 아버지는 삶과 예술, 삶과 학문을 분리시키라고, 그것을 하나로 합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고, 지나친 열정을 잘 다스려서 성실성으로 바꾸라고 말했다. 나는 베버와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삶에 이끌린다. 친구들과 연인과 동시대인이 살고 있는 삶에 매혹된다. 나는 삶과 일, 삶과 작품 사이를 쉼없이 오간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충고와 살아 있는 이들의 부름 사이를 쉼없이 오간다. 나의 말과 행동, 나의 기쁨과 슬픔은 그 사이 어디에선가 태어나고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 P8

나는 지금 그날의 식당을 떠올린다. 그날 나에게 내던져진 ‘영혼’이란 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에게 영혼이란 추상적인 개념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종교적인 광휘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어구도 아니다. 그것은 어느 평범한 아주머니의 입에서 터져나온 육성이요, 일상의 고통으로부터 터져나온 파열음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나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성좌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언제나 일상으로부터, 태도들 사이에서, 몸짓과 말투 속에서, 모종의 신호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그때 영혼은 일상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지리멸렬과 강박과 예속에 대해 매 순간 저항하게 하고, 망설이게 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어색하게 한다. 영혼은 우리를 자유롭게하거나 계몽된 상태에 다다르게 하지 않는다. 영혼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영혼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어떤 순간에 어떤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 그것은 놀랍도록 웅변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비참할 정도로 어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은 최소한 그말과 행동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한다. - P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물이든 동물이든, 말과 행동을 수행하는 한, 그러면서 나날이 새로운 사건들을 경험하고 그것들을 통과해가는 한, 인간은 어디선가 불현듯 들려오는 영혼의 희미한 모스부호 소리에 감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인간은 어제는 없었던 새로운 지평선 쪽을 향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을 감행할 것이다. - P20

집은 중요하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이 명제는 우리에게 계급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장소를 점유하고 그 안에 대화적 자원을 비축할 수 있는 한, 우리는 대화적 능력을 학습하고 키워나갈 수 있다.
지금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소 투쟁은 소유권 너머의 권리를 가리킨다. 당신이 장소를 소유하지만, 잠과 TV 시청을 뺀 모든 활동을 ‘아웃소싱‘한다면, 그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이 장소를 소유하지 않지만, 거기 거주하며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대화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비록 이런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 테지만. - P28

"영감이란 일반적으로 예술가 혹은 시인들만의 특권은 아닙니다. 영감의 수혜자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며, 과거에도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뚜렷한 신념으로 자신의 일을 선택하고, 애정과 상상력을 가지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 말이죠. 이 세상에 그런 의사들은 늘 있어왔고, 그런 교사들, 그런 정원사들은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행복한 의사, 행복한 교사, 행복한 정원사는 행복한 시인의 동료다. 그들은 일에 전념하며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타인과 교감하는 사람들이다. 시대가 불행할 때 시인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시인이 시대의 진리를 증언해서가 아니다. 시인은 불행한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다시 돌아가야 할, 삶과 노동에 잠재한 행복의 형상을 밝히는 자다. 그렇기에 나는 시인은 진리가 아니라 행복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믿는다. - P32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유강은 옮김, 이후, 2002)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렸다. "우리가 놀라는 까닭은 끓어오르는 조용한 분노와 최초로 들려오는 희미한 항의의 소리, 우리가 절망하는 와중에도 변화의 자극을 예시하는 곳곳에 산재한 저항의 조짐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희미하고 산재하는 조짐들의 누적적 전개를 이해한다면 놀라운 사건은 사실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 친구는 아큐파이의 전사(戰士)이자 전사(前史)였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온 흐름 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역할은 그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다. 누구는 대담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영웅이 될 필요가 없고 될 수도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짐, 움직임이다. 익명의 바통이다. 그리고 그 바통 위에는 ‘끝나지 않았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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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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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내가 처한 현실에서 - 미시에서 거시로, 아래에서 위로-만들어지는 새로운 몸이다. 융합은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과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연속선에서 몸(생각)이 변하고 다른 지식이 생산된다. 변태는 알아 가는 몸, 그 변화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P53

모든 지식은 특정 상황과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융합에서 위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지식의 본질적 성격인 부분성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식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이것이 이른바
‘모순‘이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 융합은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한‘ 위치에서 기존의 지식을 재조직화하는 공부법이다. 창의적일 수밖에 없다. - P56

자연과학을 비롯해 모든 지식은 발명된다. 발명은 특정한 시각에서만 고안되기 때문에 그 시각을 지니기 이전에는 우리의 인식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가시화된 것 이상을 알 수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삶, 즉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현상은 상상할 수 없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아는 한도 내에서만 알 수 있다. - P62

말하기와 듣기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개인도 덜 아프고 사회도 건강하다. 이것이 사회 윤리, 공중 보건으로서 상담이다.
자신의 취약함을 타인에게 말하는 행동은 ‘통장 비밀 번호를 알려주는 일‘과 같다는 인식,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의 결과는우울과 자살의 사회다. 외로운 침묵, 말하기를 포기한 불신, 소통을 대신하는 물리적 폭력……. ‘환자‘의 말에 사로잡힌 ‘의사‘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예비 내담자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된다. 좋은 사람은 타인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장점과 자원을 알아내는데 주력하고 삶의 대처 능력을 함께 모색한다. - P81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구조적 모순은 지배/피지배 관계와 자원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뜻한다. 대표적인 ‘주요모순‘은 계급, 인종, 젠더 (성별 제도)다. 장애, 지역, 민족, 외모,
학벌도 큰 모순이다. 한국은 계급(유화적인 표현으로 계층)이 교육, 부동산 문제와 얽힌 주요한 문제다. 빈부격차, 양극화가그것이다. 이제는 건강과 노화도 계급에 따라 좌우된다. - P174

이쯤에서 융합에 대한 ‘요약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융합의 뜻은 각기 다르다. 개념이 다르다는 의미는, 융합에 접근하는 방식과 이유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다양한 융합 개념을 세 가지로 정리해본다.
첫째, 융합은 원래부터 앎이 이루어지는 원리였다. 어떤 지식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화학과 화학공학, 정치학과 사회학, 수학과 전산학 같은 ‘근접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모든 삶은 인간-자연-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 상호 작용이 학문의 발전사이다. 지식의 기원은 없다. 그러므로 융합이 무엇인지 따로 질문할 필요가 없다. 지식은 지역, 문화, 사람 사이의 번역이며, 혼종(混種), 혼합(混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학문간 대화와 다학제 연구를 촉구하는 융합이 필요하다. 이견이나 ‘틀린 말도 언제나 의미가 있다. 재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덜하지만, 자신이 ‘아버지‘로 모시는 인물에 관한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감히~"). 이른바 전문가주의지만, 맹목성은 전문가가 될 수 없는 지름길이다. 프로이트(심리학), 베버(사회학), 모겐소(정치학)의 이론도 여러 인용과참조가 누적된 결과물이며,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된 산물인데이를 경전으로 받들고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이들은 그냥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으면 된다.
나 역시 여성주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이론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보부아르, 스피박, 버틀러의 논의는 분단 한국, 식민지 남성성을 설명할 수 없다. 페미니즘은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한 번에 설명하겠다‘는 거대 서사에 도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은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언어‘다.
셋째, 융합은 위의 두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반드시 지향과 변화흘 추구해야 한다. 정의롭지 않은 지식, 새롭지 않은 융합이 왜 필요하겠는가? 당파성과 가치관이 필수적인 이유는, 모든 앎은 현실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집단을 위한 융합인지가 핵심이다. 같은 학과에서도 정반대의 입장이 존재한다. 융합은 개별 학문을 넘어서는 가치관의 문제다. 융합의 전제는 지식이 누구에게 봉사하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융합은 그 과정도 결과도 지극히 정치적이고 또 그래야만한다.
요약하면 융합은 원래 존재했고(혼종성, hybridity), 대화가 필요하며(learning), 기존의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trans~). 물론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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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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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데리다, 버틀러를 ‘잇는‘ 현대 철학의 가장 큰 성과는 인간의 본질이란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기행위로서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 P33

저절로 생긴 말은 없다. 말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사회적 약자는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다. 애초부터 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先除, foreclosure)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 하면 백전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자기 관점에서 기존 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 P40

여전히 윌슨의 《통섭》에는 명문이 즐비하다. 융합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다음이 아닐까. "과학 이론은 반례들에 직면하면 폐기되도록 특별히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이왕 틀린 것이라면, 빨리 폐기되면 될수록 좋다. ‘실수는 빨리 할수록 좋다‘라는 격언은 과학적 실천에서도 하나의 규칙이다. 과학자들도 자신이 만든 구조물과 사랑에 빠지고는 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행히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평생을 헛수고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 이론은 거듭되는 장례식을 통해 진보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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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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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물질은 대립하지 않는다. 물질은 언어에 의해서(만) 물질, 곧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인식 행위가 존재를 가능케 한다. 탈식민주의나 여성주의가 ‘비가시화된 약자‘의 현실을 그토록 문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이미 배제된 (foreclosure)‘ 영역이 있다. 해방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질문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축복이다. - P12

융합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 ‘아니다‘. 융합은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 생산을 위해 필요하다. 보편적인(uni/versal) 사고방식은 사회적 약자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성의 윤리로 작동할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기준을 각기 다른 상황에 무차별하게 적용하는 보편의 폭력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노인 여성, 장애인, 남성, 어린이가 같은 달리기 출발선에 서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이미 배제가 이루어진 불평등이다. 보편의 폭력에 문제 제기하며 등장한 사유가 다양한(poly/versal) 사고, 다시 말해 차이를 인정하자는 배려와 관용의 사고다. 그러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현실은 별로 없다. 문제는 기준 자체이기 때문이다. - P20

융합은 객관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사유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을 ‘트랜스버설(trans/versal)‘이라고 하며, 횡단(橫斷)으로 번역한다. 단어 그대로 가로지르는 것이다. 가로지름(crossing)은 수직적인 수용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을 파괴하고 재생산하고 다른 의미의 생명체를 만드는 일이다. 호프스태터의 표현인 ‘뒤엉킨 위계질서(tangled hierarchy)‘나 ‘소용돌이(vortex)‘는 융합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유용하다.
융합은 계급, 젠더, 인종, 성정체성 등을 동시에 고려하는 상호 교차성(inter-sectionality)과도 다르다. 계급, 인종, 연령, 지역, 종교를 통한 여성들 간의 억압은 교차하고 겹치는 더 커다란 구조의 매트릭스(母)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융합의 의미다. 즉 융합은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고 재구조화이자 자유주의 사상의 질적 전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융합의 가장 정확한 번역은 ‘횡단의 정치‘이다. - P21

독자들에게 새로운 여정 (journey), 변화(meta-morphosis), 프레임 조정(framing), 변환(transform), 횡단(trans-verse), 문턱 넘어서기(threshold), 경계선 안팎 넘나들기(bordering), 협상(tuning), 직면(facing), 온몸의 재구성(사지의재조합, re-membering), 거리낌 없는 수용(embracing), 매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re-flection)의 과정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의 다른 제목이 있다면 ‘공부란 무엇인가‘이다. 아는 것을 버리자. 자기 입장에서 출발해 경계를 넘어서자. 우리 모두 트랜스포머(transformer)가 되자!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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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족하지만 날마다 사랑합니다.

어제는 NGO 단체인 ‘마포희망나눔‘의 ‘마음‘과 반나절 동안 마을을 돌아다녔다. 협찬받은 물품을 차에 가득 싣고 ‘마음‘은 신나게 달렸다. 오늘의 나의 주인공은 차에 나를 남겨놓고 마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며 그 물건들을 건넸다. 그 모습에는 어쩐지 한없이 투명하고 맑은 정신이 담겨있는 듯 보였다.
‘마음‘이 신나게 달리며 마을사람들의 변화된 면면을 이야기할 때 그녀의 이마가 환하게 빛났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가정의 아이들의 청소년 멘토가 되어주고 그 아이들이 자라 또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주도록 맺어준 이야기를 할때 그녀는 『행복한 왕자의 세계에 사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도움을 받던 마을사람들이 다시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이동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연금술사 같다. 그녀의 마같은 세계에 걸어 들어가 한동안 나오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말을 듣다 보면 정말이지 모두 보석 같은 말들이다. ‘마음‘ 어록을 남겨야 할까. 퉁명스럽게 던진 말에서 나는 우리집 살림에 삼수를 하겠다는 작은조카를 조용히 응원하기로 결정했다(자기가 알을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고 남이 알을 깨면 달걀후라이가 된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마을사람들, 그 사람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감동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 무상으로 주는 물건을 부끄러움 없이 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그 물건들을 협찬받기까지, 그리고 그 받은 물건을 차에 싣고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그 짐의 무게를 다 감당하면서까지 얼마나 기뻐하며 가져다주는지 지켜보았기 때문이다(손자를 잘 키우겠습니다).

사회적 입장에서 보면 나는 손자와 둘이 사는 조손가정이다. 그런 난 조금 삐뚤어져 있었다. 무상의 도움이 참을수 없게 느껴졌다. 가난은 부끄러운 거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학습되어 버렸다. 아니, 무언가 받을 때보다 줄 때의 기쁨이 더 크다는 걸 알기에 자꾸 가진 자의 입장만 탐이 났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다 쓸데없는 감정이라고 ‘마음‘은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매주 그녀의 차를 타고 달리고 싶다. 그녀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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