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소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2010) 중 할아버지에 대한 회상의 일부를 아래 옮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듬뿍 받았지만 오빠와 달리 보약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썼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툭하면 집안 식구나 동네 사람들에게 남발하는 약방문을 우습게 여기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무꾸리와 푸닥거리를 증오했다. 잃은 남편과 자식들의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게 한 원흉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정식 한의사는 아니었지만 젊었을 적에 선비 교양의 일환으로 익혀둔 보약이나 급한 병을 위한 응급처방 같은 걸 써먹고 싶어하셨고, 당신 자손들에만 안 통했다 뿐 동네 사람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경우가 많았다.

서울에 와서 세 식구가 같이 살게 되면서 알게 된 건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할아버지는 우편으로 오빠를 위한 보약처방을 부쳐왔다. 가미지황탕이라나, 지황탕 처방 원본에다가 오빠 체질을 감안한 약제를 가미한 것일 듯했다. 이 손녀를 위해 보약처방을 내주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일한 남녀차별이다. -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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