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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미국에서 나온 프리모 레비 전집(총 세 권, 번역가 열 명)의 번역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문학번역의 실태를 짚어본 칼럼이 있다. 칼럼을 기고한 팀 파크스(Tim Parks)는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둘 다 잘 아는 작가다.


http://www.nybooks.com/daily/2016/01/19/tumult-of-translation-primo-levi/

http://www.nybooks.com/daily/2016/02/02/long-way-from-primo-levi-translation-truce/

http://www.nybooks.com/daily/2016/03/15/translation-paradox-quality-vs-celebrity/


프리모 레비는 스스로도 문체가 간결하다고 자처했지만, 사실은 구어체와 문어체, 현학적 문체와 엄정한 과학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오고가며 구사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하고 번역자가 적절히 해석하고 전달할 줄 알아야 하는 까다로운 작가라고 한다.


특히 뉘앙스를 고려하지 않고 어원이 같은 단어(cognate)를 그대로 옮긴 경우들을 문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영역본에 "an ankylosed arm"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탈리이어 원문의 "un braccio anchilosato"는 관절이 뻣뻣해진 팔이라는 뜻인데 생활하면서 어쩌다 느끼는 가벼운 불편감부터 팔을 쓰지 못할 정도의 증상까지 아우르는 매우 일상적인 어휘라고 한다. 그런 반면에 영어의 ankylose는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에 어긋나게 불필요하게 눈길을 끄는 단점이 있다.


*영어권 사람들은 익히 알 법한 얘기라서 생략되었을 텐데, 똑같이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가 이탈리아어(그리고 대부분의 로망스어)와 영어에서 뉘앙스가 다른 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어는 라틴어가 조금씩 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났고 단테와 르네상스를 거치며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언어로 정립되었다. 영어는 내력이 훨씬 복잡하다. 영국에서는 독일 등지에서 건너간 앵글로색슨 족이 게르만어족의 고대영어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노르망디에서 프랑스인이 침입해 지배하면서 프랑스어 어휘를 많이 받아들이게 된다. 한때 프랑스어(지배 계층과 문학의 언어)-영어(서민)로 언어 계층이 나뉘어 있기도 했다. 영어에서 게르만어 유래 어휘는 쉽고 구어적이고 라틴어(라틴어에서 직접, 또는 프랑스어를 경유하여 도입됨), 프랑스어 유래 어휘는 어렵고 문어적이며 학문의 언어라는 인식이 있고 실제로 언어생활에서 그렇게 쓰이고 있다. 정확히 대응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한자어와 고유어의 관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렇듯 실제 언어 사용을 고려하지 않은 번역문을 파크스는 "translationese"라고 부른다. 해결책으로 내가 떠올린 것은 1) 시간을 충분히 투자할 수 있는 환경 조성 (시간을 많이 투자할수록 각각의 요소에 대해 심사숙고할 수 있고 더 나은 번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다가는 출간이 영원히 미뤄지니 딜레마다.), 2) 공동 작업 (양쪽 언어의 원어민이 작업하면 좋겠지만, 적어도 텍스트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과 우리말 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함께 작업하기만 해도 결과물이 충분히 좋을 것이다.). 파크스는 해결책으로 번역자가 좋은 편집자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크스 자신도 번역을 해보았기에 양쪽 텍스트에 깊숙이 파묻힌 상태에서 이상한 부분을 번역자 스스로 알아채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파크스는 오늘날 문학번역의 풍경도 비판했다. 레비 전집의 번역 품질은 들쭉날쭉한데 훌륭하게 번역된 작품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원래부터 유명했던 대표작들만 거론되었다. 이는 편집자에게 텍스트와 적절한 번역자를 짝지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많은 경우 판매 촉진에 도움이 되는 스타 번역가에게 중요한 작품을 맡기는 관행 때문이란다. (이탈리아의 어느 메이저 출판사는 시장 조사 결과 대중이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을 구분하지 못하므로 번역료를 낮추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파크스의 이런 비판에 대한 전집 번역자 중 한 명의 반론과 재반론도 실렸다.

http://www.nybooks.com/daily/2016/03/28/primo-levi-minefield-an-exchange/


팀 파크스는 이탈리아에서 문학번역을 가르치는 영국인이다. 30여 년 전에 아내를 따라 이주해서 이탈리아에서 죽 살고 있다. 존 쿳시, 재닛 맬컴 등이 기고하는 {NYRB(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자주 기고한다. 우연히 [NYR Daily](NYRB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린 글을 읽다가 번역 이야기도 많고 글도 좋아서 연달아 몇 편을 읽게 되었다. 파크스의 작품으로는 소설도 있고, 이탈리아에 관한 논픽션과 에세이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논픽션만 두 권 소개되어 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문학이론서와 서평집(NYRB에 실린 글들도 수록했을 것이다)이 재미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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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08-16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입니다. 덕분에 Tim Parks라는 번역학자를 알게 되었네요. 번역 논쟁은 어떤 하나의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반론과 재반론으로 계속되죠. 그게 또 번역의 본질적 속성 같습니다~

nuncius 2016-08-19 19:21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렇죠.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좋은 것 같아요.
 















스타이너(George Steiner)는 인간이 이토록 많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설명 불가능하며 '비경제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인류의 역사는 항상 가장 생존에 유익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그런데 인류는 왜 6,500개나 되는 언어를 만들어 내어 그토록 많은 소통의 문제를 겪고, 또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소통에 쏟아붓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책을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했지만, 번역을 둘러싼 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들은 여전히 남는다. 왜 그렇게 많은 자연 언어들이 존재하는가? 왜 인간은 그토록 오래전부터 번역해 왔고, 지금도 번역하려 하는가? 번역 활동과 작업의 철학적 또는 인간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쯤 되면 번역이라는 것이 인류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됨으로 인하여 발생한 필요에 의한 것인지, 혹은 인간이 본래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본래 타자의 말을 '번역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가 불분명해진다. 어쩌면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우리가 번역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89-90)


1970년대만 해도 번역은 언어학의 하위분야, 보다 구체적으로는 응용언어학의 하위분야로 인식되었다. 언어학을 토대로 번역에 접근한 학자들은 번역을 전적으로 언어학적인 현상으로 간주하였으며 대체로 '원문과 등가의(equivalent) 텍스트를 생산해 내는 것'으로 번역 작업을 정의하였다.

(14)


그러나 한국어와 같이 소위 '제한적 영향력을 가진' 언어의 경우, 국내의 번역사들이 양방향의 번역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이 국제행사 유치를 위해 홍보활동을 할 때, 홍보자료를 한국어에서 영어나 불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영어권 화자나 프랑스인이 아닌 한국인들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었을 경우에 이를 번역하는 사람도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역시 한국의 번역사들이다. 이것은 모국어 방향으로만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서구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른 점이기도 하다.

(25)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한다(B. Mossop). 아무리 훌륭한 번역사가 번역한 글도 다른 번역사에게 보여주면 반드시 수정이나 개선의 여지가 눈에 띄게 된다. 좋은 번역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이 이처럼 주관적이고 자의적이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번역이란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42-43)


번역사는 첫째, 하나의 원문을 번역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하며, 둘째, 그중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번역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Pym 인용)

(57-58)


평행텍스트(parallel text)란 '목표언어로 쓰인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텍스트'를 말한다. 예를 들어 '비만'을 주제로 하는 한국어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 번역사는 우선 비만에 대해 영어로 쓰인 텍스트들을 참고하게 되는 이것이 바로 '평행텍스트'이다. 이를 통해 목표언어권에서 어떤 어휘로,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평행텍스트는 번역문이 아닌 목표언어권의 저자가 쓴 정통텍스트(authentic text)라야 한다.

(64)


번역의 이론과 실제 간에는 항상 일정 정도의 간극이 존재해 왔다. 다시 말해 번역에 관하여 논하는 사람들과 실제 번역을 하는 사람들 간에는 항상 괴리가 있었다. 실무번역사들은 실무 현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이론들을 비난해 왔으며, 실제로 번역이론가들이 제시하는 상당수의 주장들이 실무적으로는 아예 적용이 불가능하거나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경우가 많았다.

(67)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의 대문호들이 인류에게 남긴 고전들은 한 번 번역되고 그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재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보성과 메시지 전달 위주의 실용번역의 영역에서는 매우 드문 일로 이는 문학번역이 단순한 메시지 전달이 아닌 작품의 끝없는 다시 읽기의 과정임을 드러낸다.

(69-70)


번역이란 무엇인가

이향

살림 (살림지식총서 33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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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앞으로도 이런 책을 계속 내주셨으면 좋겠다.

열 편의 소논문으로 구성되었다. 일부 이론적 내용은 배경지식이 없어서 자세히 읽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지만, 일반 독자가 상식 선에서 읽고 즐길 수 있는 지적인 논의가 넉넉히 들어 있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생각해보고 반성할 거리가 많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8342 (이 기사도 책에 수록되었다.)


=


[문학 번역 비평을 위하여]


이 가운데, 편집인에 의한 교열 작업은 번역이 출간되기 이전 단계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번역 비평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출판 번역 시스템에서 편집인의 번역 평가 작업은 출판 번역물의 최종 모습을 좌우할 정도로 가장 실재적인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편집인이라는 전문 독자의 번역 평가 작업이기도 하기에 번역 비평의 한 유형으로 자리매김하겠다.

(93-94)


문학 작품을 번역하다 보면 번역 평가 현장에서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충실성 개념이 사실은 번역 현실로부터 유리된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103)


시장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출판사와 편집자는 상품의 실패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대체로 모험보다는 안전을 선호하게 되는데, 이 논리의 집행자라는 악역을 맡은 편집자는 독자를 등에 업고 가독성 규범을 내세운다. 익숙한 표준적인 문장으로 다듬어 내고, 쉬운 단어보다는 현학적이거나 시적이라 생각되는 단어를 선호하고, 같은 단어가 반복된다 싶으면 단어의 동일성 유지가 텍스트 작동에 필수적인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다른 단어로 바꿔 놓고, 긴 호흡의 문장은 톡톡 끊어 놓고 짧게 치고 나오는 문장을 보면 불안해하면서 이어 붙인다.

(108-109)


=


[초역과 두 개의 재번역 - 네르발의 [옥타비] 번역 읽기]


원론적으로라면, 번역가는 기본적으로 탄탄한 문장력을 갖춘 작가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번역가가 그러한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아니, 가감 없이 우리의 번역 현실을 직시하면, 오히려 그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 번역가의 안정적인 모국어 구사는 좋은 번역을 낳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닐지언정 필수 조건임에는 틀림없는 만큼, (…)

(223-224)


출중한 문장력도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만날 때에만 좋은 번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31)


베르만(A. Berman)은 [번역 비평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번역 비평의 절대적 순환 고리를 이야기한다. 비평 주체는 번역가의 번역 기획안에서부터 출발하여 번역을 읽어 볼 필요가 있지만, 그 번역 기획안의 진실에 접근하려면 결국 번역물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평 주체는 번역자가 스스로 밝히는 번역관이나 문학과, 번역 대상이 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개인적 해석 등에 귀 기울여야 하지만, 그 행위의 바탕에는 절대적 신뢰가 아닌 제한적 신뢰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충고일 것이다. 번역가가 자신의 번역에 대해 말하고 썼던 모든 것은 번역 안에서만 그 실체를 갖고 또한 그 안에서만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번역가 개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번역 주체의 존재 양식에 대한 통찰력에서 비롯된 비평 주체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번역 주체는 그 어떤 글쓰기 주체보다도 더욱 분열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쪽의 문학 이데올로기와 번역 이데올로기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으면서, 동시에 저쪽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고민을 살아 냈을 원작자의 고뇌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존재이다.

(238)


=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


사실 읽어서 즐거운 작품과 번역에 적합한 작품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몇 번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깨닫고 나면, 독자로서 즐겼던 작품이라는 이유로 무턱대고 번역하겠다고 나대는 일은 삼가기 마련이다.

(269)


번역 학계의 커다란 화두 가운데 하나가 ‘번역 불가능성’이다. 여기에는, 두 언어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고 저쪽의 텍스트를 이쪽으로 옮겨 오겠다는 번역 자체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리려는 시도로서, 번역이란 태어날 때부터 예정된 좌절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글쓰기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번역 불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흔히,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 틀 자체라,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는 근본적인 불일치가 존재하고, 이는 상이한 언어의 차이를 넘어 동일한 텍스트 생산을 꿈꾸는 번역의 내재적 한계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번역 불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이 동일한 논리가 번역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논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바로 이 근본적인 불일치의 공간이 번역 주체가 글쓰기를 수행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두 언어가 정확히 포개어진다면 번역 주체가 틈입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이라는 독특한 유형의 글쓰기는 동일성의, 반복의 원칙 위에 서 있지 않다. 번역은 이쪽 언어와 저쪽 언어의, 이쪽 문화와 저쪽 문화의 차이로부터, 원저자와 번역자라는 서로 다른 두 글쓰기 주체의 차이로부터 생겨나는 차이의 글쓰기이다.

(270-271)


우리의 언어 체험이 알려주듯, 언어유희의 불변의 원칙은 유사한 소리의 어우러짐에서 생겨나는 독특한 효과이다. 그리고 유사성에 기초한 이 소리의 화음은 언어가 달라지는 순간 무너진다. 그러니 번역자는 새로운 언어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화음을 창조하여 동일한 효과를 내야만 한다는 쉽지 않은 과제에 부딪히게 된다. 모국어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 봐도 원작의 말장난이 보여 주던 똑떨어진 맛은 나오지 않고 억지웃음밖에 자아내지 못하는 설익은 맛만 난다 싶으면, 결국 번역가는 어설픈 말장난을 만들어 내느니 충실한 주를 달아 원작의 언어유희를 설명하는 쪽을 택하고 만다. 우리가 번역 작품을 읽다가 심심치 않게 목격하는 김 빼는 번역 전략이다.

언어유희가 작품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미미하다면 차선책으로 고려해 볼 만한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지하철 소녀 쟈지}에서처럼 언어유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언어유희에 작가의 문학관이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경우라면, 절대로 구사해서는 안 되는 번역 전략이다.

(273-274)


=


[번역, 차이의 글쓰기 - 말놀이 번역을 중심으로]


일회적인 말놀이라고 해서 번역을 생략해도 된다는 앙리의 판단을 베르만이 말한 소위 ‘작품oeuvre’으로 불릴 만한 문학 텍스트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선뜻 내키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문학 텍스트가 보여 주는 고도의 유기성을 생각해 본다면, 일회적인 말놀이라고 해서 텍스트의 의미 생산과 무관하게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섣부르다. 말놀이가 일회적이어서 번역을 생략할 수 있다기보다는, 말놀이가 일회적이면 이 요소가 원문에서 담당하고 있는 기능은 말놀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높아진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역으로, 말놀이의 비중이 높고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면 번역가가 말놀이라는 방식을 피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은 당연히 점점 줄어든다.

(301-302)


원칙적으로는, 번역가의 글은 번역가가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실제로는, 그 공간은 늘 독자 걱정에 여념이 없는 편집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번역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타협의 공간이다. 번역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번역에 대해 말하고 있기는 하나 그 번역에 대해 제대로 들려주지는 못하니, 번역자의 글이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로는 수동적이고 간접적으로 자신의 번역에 대해 암시하고 마는 공간이라고 하겠다.

(319-320)


번역 논쟁

정혜용

열린책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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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권위 있는 '오레곤 셰익스피어 극단'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36편을 36명의 극작가에게 맡겨 ‘현대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발표하여 한동안 시끄러웠다고 한다. 모국어로 번역된 책을 상대적으로 빠르게 여러 권 읽는 것이 나은가, 서툴고 느리게라도 원서를 읽는 것이 나은가, 번역은 과연 가능한가/가치가 있는가, 하고 고민하던 차에 누가 기사를 보내줘서 보게 되었다.


The Opinion Pages | OP-ED CONTRIBUTOR

Shakespeare in Modern English?

By JAMES SHAPIRO

OCT. 7, 2015

http://www.nytimes.com/2015/10/07/opinion/shakespeare-in-modern-english.html


덧글이 600개가 넘는데 읽다 보니 어느 순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어서 중간에 멈췄다.

신기하게도 이 덧글들에 상식적으로 '번역'에 대해 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번역에 관한 일반론이 흔히 그렇듯이 모순투성이였다.

7살 아이도 연극을 보여주면 즐긴다 vs 셰익스피어 영어가 어려운 건 사실이다

어찌 감히 위대한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고칠’ 수 있는가 vs 아예 안 읽는 것보다는 현대 영어로 읽는 편이 낫다


가장 흥미로웠던 논의는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면서 영어도 잘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원어로 읽지 못했어도 작품의 위대함을 충분히 맛보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오히려 셰익스피어는 예전부터 영어권보다 프랑스, 독일에서 더 인기가 많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영어를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셰익스피어의 16-17세기 영어를 현대 영어로 옮기는 작업이 어떻게 같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연장선상에 놓고 생각해볼 만한 점이 분명히 있다.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why-we-mostly-stopped-messing-with-shakespeares-language

이 기사는 셰익스피어 희곡은 사실상 '원본'이 없고 300년 동안 상연할 때마다 수정되었으며 19세기 후반 대학에서 셰익스피어를 고전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정본에 집착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워낙 특별하기에 번역도 어렵고 번역되면서 잃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다.

결국 번역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지만 번역의 효용도 크다는 것.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로 결론이 났다.



+ (재미로 보는) 재치 있는 덧글:

- 누구 피카소의 그림을 더 이해하기 쉬운 도형으로 다시 그려주실 분, 쇤베르크의 음악에 가락을 넣어 다시 작곡해주실 분 있나요?

- 이런 데다 돈 쓰지 말고 차라리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희곡을 쓰는 극작가를 지원해주자.

-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어를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어로 번역한다니 좀 바보 같은 짓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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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긴 자서전이라 번역 이외에 다른 내용도 많이 들어 있다.

동서양의 언어와 문화 차이를 극복한 방식을 여렴풋이 엿볼 수 있다.






초역을 다시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영어로 다듬는 작업은 번역이라는 과정에서 늘 가장 어려운 단계였다. (…) 사실은 단 두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처음에는 되도록 직역을 하는데, 이는 어쩔 수 없이 부자연스럽게 마련이다. 그래서 둘째 단계에서 부드럽고 세련된 영어에 가깝게 고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다이이치 호텔에서 나의 선생과 함께 시작한 최초의 번역 이래로 줄곧 변함이 없다.

(139)


지금은 번역이 ‘해결 가능한 문제’들과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해결 가능한 문제’는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반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어차피 해결이 불가능하므로 무시해도 된다. 즉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투리는 이 후자의 범주에 속한다.

(224)


그래도 일본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자들은, 영어를 일본어로 옮기는 번역자들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원작을 훨씬 잘 대해준 편이라고 생각한다.

(242)


그 외에도 미묘하고 모호한, 그리고 어쩌면 번역이 불가능한 의미를 전달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직역을 선택한 예들이 있었다. 나는 머리 좋은 독자라면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한 여기에 대해 불만을 말하지 않은 스트로스야말로 참을성이 매우 많다고 생각했다. 편집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원작에 없는 명확성을 번역에서 요구하는 일이 빈번한데,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원작에서 뭔가를 잘라내야 한다.

(245)


(다니자키 준이치로 {세설} 번역에 대해:)

앤서니 웨스트가 쓴 {뉴요커}의 서평이 가장 심했다. 이 작품이 ‘의학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한 것이다. 약과 주사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이 작품의 전부라고 한다면 완전히 핵심을 놓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 나는 스트로스에게 항의를 하라고 권했으나, 그는 {뉴요커}에 실린 서평은 내용이야 어쨌든 좋은 서평이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실로 프로다운 자세였다.

(252)

“He replied that any review in the New Yorker is a good review.”


앞에서 가와바타에게 어떤 문장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해도 쓸데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닫고선 더 이상 부탁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지만, 적어도 한번은 더 부탁했던 모양이다. (…) 내가 번역한 <센바즈루> 마지막 장이 제목인 [이중성(重性)]이 무슨 의미인지 내가 물어본 모양이다. 본문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여기에 그는 너무 깊이 읽으려 하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천문 용어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저 그 말의 어감이 마음에 들어서 사용했을 뿐입니다.”

(265)


게다가 이미 웨일리(Waley)의 번역도 있었다. 내가 새로운 번역본의 서문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나는 그의 번역이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을 좇으려 해봤자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여러 가지로 {겐지 이야기}의 번역은 실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 같았다. “나 같으면 두 번째로 번역을 하느니 열여섯 번째로 하겠다.” 도널드 킨의 이 말은 그 일에 매달려 있던 몇 해 동안 내가 들은 것 중에서도 가장 예리하면서, 또한 가장 의욕을 저하시켰던 말이다.

(432)


서평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영국의 서평들이었다. 더 호의적이라서가 아니라, 더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서평들은 가끔씩 엉뚱한 소리를 했다.

(435)


나의 번역에서 틀린 부분을 찾아 목록으로 만들어 보내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틀림없이 다른 번역자들 또한 같은 처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수준이 되어야 할 비평가들이 꼬치꼬치 흠이나 잡는 서평을 쓰고 강연을 하는 것은 문제다. 예를 들면 책에 나오는 지명만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죽 훑어보고, 원작에 나오는 지명이 전부 나와 있지 않으면 ‘형편없는 번역’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436)


나는 왜 번역가가 되었는가? Tokyo Central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Edward Seidensticker /권영주 역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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