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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에 구한 독립잡지 {더 멀리}를 과월호부터 읽고 있다.

잡지를 실시간으로 읽는 습관이 없어서 모아놨다가 책처럼 읽는 편이다.

시인들이 만든 잡지. 읽으면서 우리말이 참 아름답다고 새삼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에 창간한 잡지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


4호(2015년 11/12월호)에도 좋은 글이 많았다. 구현우 시인의 [산타클로스의 이별 선물]을 읽었다. 결말에 이르러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

[전략]


검게 때가 탄 붉은 옷을 보며 산타클로스는 올해의 마지막 굴뚝으로 들어간다 아이의 잠든 표정이 곧 울 것 같다고 또는 금방 웃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편지를 읽는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산타클로스는 말없이 결심한다 너와 같은 아이들을 위해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주겠다 고맙구나 내 죄책감을 덜어줘서


루돌프를 두고 나온다 모범적인 아버지를 들고 나온다 지붕을 뛰어다니며 굴뚝을 막으며 다짐한다 루돌프와 아이가 친밀해질 나의 집, 나의 아이야 네가 희망을 주거라 은밀하게 너도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봐 주어라 슬픔이 또 다른 슬픔으로...... 희석될 때까지 말이다


산타클로스의 이별선물

구현우

더멀리 4호

2015

=====


갖고 싶은 것을 적는 편지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적는 아이의 마음.

"굴뚝을 막는" 산타-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슬픔이 또 다른 슬픔으로...... 희석될 때까지"


구현우 시인의 다른 시:

http://dacapolife.com/tag/%EA%B5%AC%ED%98%84%EC%9A%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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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낙하하다]

여기 나오는 '낙하'라는 공간 개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에 떠밀려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단편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낙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래도 나는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사라진다기보다는 너무 광범위하게 번지고 퍼져서, 끝내는 돌이킬 수 없이 묽고 무심한 상태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나는 아직 나의 일부인 나를 추슬러 간신히 서랍에서 흘러나왔다.
(54)
대니 드비토

애초 빗방울이란 허공을 떨어져내리고 있을 뿐이니 사람들이 빗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빗소리라기보다는 빗방울에 얻어맞은 물질의 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66)
낙하하다

멀리서 발사한 총성처럼 독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다음 것이 들려왔다.
별빛보다도 눈부신 불빛들이 삐걱거리며 주저앉고 있었다.
(102)
옹기전

그는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그 집에 당도했다. 많은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고 그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런 얼굴들 속에 있었다.
(183)
뼈 도둑

파씨는 학교에서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통에 매혹됩니다. 그건 번쩍거리는 은빛이고, 산뜻하게 주름져 있고, 청결해 보이는 김을 무럭무럭 내뿜고 있습니다. 내부가 얼마나 따뜻해야 연통이 김을 뿜을 수 있는 것일까, 파씨는 연통으로 빨려들어가서 연통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눌어붙어서 연통의 따뜻함의 일부가 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일어나지 않고 손과 발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214)
파씨의 입문

파씨의 입문
황정은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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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46)

차라리, 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
(90)

오무사 할아버지 이야기
(94-95)

백의 그림자
황정은
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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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간을 보내도 시간은 얼마든지 되돌아와서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런 시간도 결국은 흘러갔다.
(13)

망상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몸이 그걸 믿었어.
(69)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오른쪽 눈의 세계가 멀어져버렸어. 나는 거리감각을 잃어버렸어.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건 그런 균형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야. 자기 내부의 잔혹한 광경들과 거리를 둘 수가 없게 된 거야.
(74)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체셔의 머릿속에는 세 개의 점이 있었다.
첫번째 점. 거품이 솟아올랐다.
두번째 점.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세번째 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체셔는 이렇게 세 개의 점을 찍어놓고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거대한 삼각형이 되었다. 체셔는 언제까지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점점 두꺼워지는 삼각형의 변에 자꾸 두께를 보탰다.
(133)
모기씨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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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에 앉아 나목들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어떤 시간은 빨리 흘러가버리고 어떤 시간은 견뎌야 한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변기를 붙들고 구토하는 하룻밤은 영원과 같다. 아무도 그 견딤을 돕거나 대신해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따금씩 확인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견디는 힘이란 따로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몸의 일부로 만들어져가는 것이다.
(166)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한강
열림원
2009(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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