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 같지만, 막상 하려면 그렇지 않다. 설명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밝아야 한다. 해설과 해석은 다르다. 해석은 사실이나 근거가 없어도 된다. 관점과 시각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해설은 다르다.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설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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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듯 쓰고 쓰듯 말해보라.

첫째, 평소 말하는 만큼 자주 쓴다, 둘째, 말 같은 구어체로 자연스럽게 쓴다, 셋째, 먼저 말해보고 쓴다는 의미다.

글에서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별것 아니다. 알고 싶은 욕구의 충족이다. 모르는 사실을 알고 싶고,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다. 타인의 경험에서 지혜와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다. 알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는 공감이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구나’, ‘어쩌면 이렇게 내 처지와 심정을 잘 알까?’ 하면서 위로받고 용기를 얻고 싶어서 읽는다.

직장생활은 세 가지를 요구한다. 문제의 제기와 분석과 해결이다. 제기를 잘하면 까칠한 사람이 되고, 분석을 잘하면 똑똑한 사람이 되고, 해결을 잘하면 유능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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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대개 떠돌이다. 작가가 되기 전에 이미 모국의 곳곳을 다니며, 견문을 쌓고 경험의 지경을 넓히고 생각의 폭을 넓힌다(때로는 불우한 가정사로 잦은 이사를 하거나, 혹은 부유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세계 곳곳을 다닌다). 그러다 보면 본 것이 많아지고, 경험한 것도 많아지니 뭐라도 쓰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들은 대개 하고픈 말을 가슴에 간직한 채 살기보다는, 경험한 것을 모두 말하고픈 족속이다. 아니, 경험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말을 하는 족속이다. 일단 타자기 앞에 앉아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순간,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받은 영감, 그 영감이 빚어낸 상상, 그리고 그 경험과 상상이 어우러져 창조한 새로운 무언가가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한다. 결국 쓰다 보면 이들은 경험한 것 이상으로 잔뜩 써내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쓰기 전에 친구에게, 지인에게, 후배에게, 동료에게 말하다가 그만 이야기가 부푸는 경험을 한다. 그러다 보면 쓸 말은 또 늘어난다. 이러다 작가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가 된 이들 중에는 이미 떠돌이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죽음과 개츠비의 죽음은 닮아 있다. 둘 다 한평생 원하는 것을 얻고자 투쟁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죽어버렸다.

위대한 개츠비』는 의심의 여지 없는 자전적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너무나 자전적이다 못해, 피츠제럴드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예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피츠제럴드의 장례식 역시 그가 쓴 소설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했던 개츠비의 삶이 비를 맞으며 쓸쓸히 끝난 것처럼, 피츠제럴드 역시 재즈 시대의 상징이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볼품없는 장례식을 치렀다.

작가는 쓸수록, 쓰는 일 자체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떤 소재로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대개 장인들이 몸담은 분야는 경력이 쌓이면 어둠의 안개가 걷혀 갈 길이 보이지만, 소설가의 경우는 쓰면 쓸수록 그 어둠이 짙어져만 간다. 안개는 내 앞의 시야뿐 아니라, 나 자신도 축축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글을 쓸수록 어둠 속에서 벽을 짚으며 앞길을 찾는 심정이 된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작가의 고통이 커질수록, 결과물은 더 빛난다는 것이다. 작가가 쓰지 못해 방황하는 것은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패를 경험한 작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쓰고자 하는 작품의 기준은 높아져, 쓰는 행위는 고통스러워지지만, 피같이 토해낸 작품은 미완성일지라도 ‘가장 성숙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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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삶이었고, 예술인의 삶이었고, 잡을 수 없는 꿈을 향해 손을 뻗은 이의 이야기였다.


피츠제럴드만이, 세상의 불편한 문제를 대담하게 문학적으로 대면했다. 그가 다룬 문학적 주제는 계급이다. 우리 모두가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21세기 한국에 양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구권에 노예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표면적인 계급 사회는 이미 근대에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부는 대물림되고, 교육받을 기회는 불평등하게 부여되고, 살면서 겪게 될 경험의 양과 질이 다름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모든 조건을 초인적 의지로 극복하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취향. 이것은 한 사람이 자라난 가정의 분위기, 여행 간 곳의 정취, 입어온 옷의 질감, 마신 차의 향,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품격 등으로 결정된다. 살면서 체험한 모든 취미, 레저, 교양 행위로 쌓아낸 자산이다.
근대사회까지의 계급 결정 요소는 토지, 자본, 교육이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자본, 지식, 사회적 위치에 취향까지 더해졌다. 자본, 지식, 사회적 위치는 입신양명한다면 개인적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 나듯 성공한다 해도, 인생을 오로지 즐기는 대상으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과의 취향 차이가 좁혀지는 것은 아니다.

인종을 초월한 계급 문제에 대해, 과거부터 존재해왔고 미래에도 존재할 계급성에 대해, 현대사회의 변형된 계급성에 대해 언급한 작가는 피츠제럴드가 거의 유일하다.

게다가 나는 21세기 한국이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1930~1940년대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 역시 태어날 때 이미 자기 삶의 색깔이 결정되는 사회에 속해 있으니까. 우리 역시 부모로부터 ‘자본’과 ‘토지’와 ‘교육의 기회’와 심지어 ‘취향’까지, 유전자처럼 물려받는 사회에 속해 있으니까. 우리 역시 표면적으로는 이름에 ‘경’ 같은 호칭을 붙이지 않지만, 실상은 사는 곳에 따라, 외식을 하고 휴가를 보내는 장소와 방식에 따라, 그 사람의 실제 계급을 알고 싶지 않아도 강요받듯 알게 되는 사회에 속해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피츠제럴드를 읽는 것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좀 더 관찰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사는 세상의 드러나지 않은 속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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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억은 시대정신의 산물이고 사후에 완성된다. 그렇기에 완벽한 기억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왜곡과 재구성은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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