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삶이었고, 예술인의 삶이었고, 잡을 수 없는 꿈을 향해 손을 뻗은 이의 이야기였다.


피츠제럴드만이, 세상의 불편한 문제를 대담하게 문학적으로 대면했다. 그가 다룬 문학적 주제는 계급이다. 우리 모두가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21세기 한국에 양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구권에 노예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표면적인 계급 사회는 이미 근대에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부는 대물림되고, 교육받을 기회는 불평등하게 부여되고, 살면서 겪게 될 경험의 양과 질이 다름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모든 조건을 초인적 의지로 극복하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취향. 이것은 한 사람이 자라난 가정의 분위기, 여행 간 곳의 정취, 입어온 옷의 질감, 마신 차의 향,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품격 등으로 결정된다. 살면서 체험한 모든 취미, 레저, 교양 행위로 쌓아낸 자산이다.
근대사회까지의 계급 결정 요소는 토지, 자본, 교육이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자본, 지식, 사회적 위치에 취향까지 더해졌다. 자본, 지식, 사회적 위치는 입신양명한다면 개인적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 나듯 성공한다 해도, 인생을 오로지 즐기는 대상으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과의 취향 차이가 좁혀지는 것은 아니다.

인종을 초월한 계급 문제에 대해, 과거부터 존재해왔고 미래에도 존재할 계급성에 대해, 현대사회의 변형된 계급성에 대해 언급한 작가는 피츠제럴드가 거의 유일하다.

게다가 나는 21세기 한국이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1930~1940년대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 역시 태어날 때 이미 자기 삶의 색깔이 결정되는 사회에 속해 있으니까. 우리 역시 부모로부터 ‘자본’과 ‘토지’와 ‘교육의 기회’와 심지어 ‘취향’까지, 유전자처럼 물려받는 사회에 속해 있으니까. 우리 역시 표면적으로는 이름에 ‘경’ 같은 호칭을 붙이지 않지만, 실상은 사는 곳에 따라, 외식을 하고 휴가를 보내는 장소와 방식에 따라, 그 사람의 실제 계급을 알고 싶지 않아도 강요받듯 알게 되는 사회에 속해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피츠제럴드를 읽는 것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좀 더 관찰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사는 세상의 드러나지 않은 속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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