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은 대개 떠돌이다. 작가가 되기 전에 이미 모국의 곳곳을 다니며, 견문을 쌓고 경험의 지경을 넓히고 생각의 폭을 넓힌다(때로는 불우한 가정사로 잦은 이사를 하거나, 혹은 부유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세계 곳곳을 다닌다). 그러다 보면 본 것이 많아지고, 경험한 것도 많아지니 뭐라도 쓰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들은 대개 하고픈 말을 가슴에 간직한 채 살기보다는, 경험한 것을 모두 말하고픈 족속이다. 아니, 경험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말을 하는 족속이다. 일단 타자기 앞에 앉아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순간,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받은 영감, 그 영감이 빚어낸 상상, 그리고 그 경험과 상상이 어우러져 창조한 새로운 무언가가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한다. 결국 쓰다 보면 이들은 경험한 것 이상으로 잔뜩 써내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쓰기 전에 친구에게, 지인에게, 후배에게, 동료에게 말하다가 그만 이야기가 부푸는 경험을 한다. 그러다 보면 쓸 말은 또 늘어난다. 이러다 작가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가 된 이들 중에는 이미 떠돌이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죽음과 개츠비의 죽음은 닮아 있다. 둘 다 한평생 원하는 것을 얻고자 투쟁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죽어버렸다.

위대한 개츠비』는 의심의 여지 없는 자전적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너무나 자전적이다 못해, 피츠제럴드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예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피츠제럴드의 장례식 역시 그가 쓴 소설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했던 개츠비의 삶이 비를 맞으며 쓸쓸히 끝난 것처럼, 피츠제럴드 역시 재즈 시대의 상징이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볼품없는 장례식을 치렀다.

작가는 쓸수록, 쓰는 일 자체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떤 소재로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대개 장인들이 몸담은 분야는 경력이 쌓이면 어둠의 안개가 걷혀 갈 길이 보이지만, 소설가의 경우는 쓰면 쓸수록 그 어둠이 짙어져만 간다. 안개는 내 앞의 시야뿐 아니라, 나 자신도 축축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글을 쓸수록 어둠 속에서 벽을 짚으며 앞길을 찾는 심정이 된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작가의 고통이 커질수록, 결과물은 더 빛난다는 것이다. 작가가 쓰지 못해 방황하는 것은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패를 경험한 작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쓰고자 하는 작품의 기준은 높아져, 쓰는 행위는 고통스러워지지만, 피같이 토해낸 작품은 미완성일지라도 ‘가장 성숙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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