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마, 관점, 당파성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종합과 객관화를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은 무지의 결과다.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 ........이런 사고들이다.

정론(正論)은 정론(定論)이 아니라 정론(政論)이다.

 

 

 

 

 

 

 

 

 

과학철학의 걸작인 토머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그가 객관성의 신화를 정면 비판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것을 신봉하는 집단 안에서만 과학이지, 반례와 새로운 세력에 의해 신앙심이 흩어지면 과학(normal science)의 지위를 잃고 새로운 과학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이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후 기존 이론은 오류, 데이터, 역사로 남는데, 이 과정이 과학의 발전이다.

그러므로 쿤에 의하면 과학혁명은 언제나 개종(改宗)의 역사이다. 과학 이론은 처음에는 자기 입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도그마(dogma, 독단)으로부터 시작된다.

 

 

 

 

 

 

- 파이어아벤트 <방법에의 도전(Against Method)>

 

 

파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는 더 나아가 개종의 과정에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안한다.

그 방법은 이 책의 부제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이다. 앎의 시도에 방법의 제한을 두지 말자는 것이다.

<방법에의 도전>이 공부하려는 사람의 첫 필독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이어아벤트는 "모든 과학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객관적인 척도로 이용된다.

기존의 거대한 독단주의는 사실로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보다 극히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도그마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독단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의 신화를 비판하는 것이다.

과학은 현재의 법과 질서와 통념으로 구성되므로 이를 맹신하는 것은 과학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된다.

아니키즘은 어떤 방법도 "무엇이라도 좋다(anything goes)"라고 말하는 완전한 개방성의 이념이다.

 

 

 

 

 

 

정희진 작가는 도그마, 관점, 당파성을 지지하며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종합과 객관화를 위해 보충 노력을 하는 것은 무지의 결과라고 말한다.

 

자기 당파성도 모르고 상대방의 도그마도 모를 때, 균형 감각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균형은 없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저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이 3가지의 책이 같은 관점을 공유하며

독단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문제다.

난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고 느낌을 나눔에서 "균형감각"과 "관용"을 중시해 왔었다. 삶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즉, 내가 알고 있는, 또는 알아가고 있는 지식은 단지 '내가 알고 있는 한'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을 명심한다.

그리고 그 지식은 나의 지식이 아닐 뿐더러 더더군다나 통설에 불과하므로 충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수의 관점도

포용하여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글이라는 걸 쓸때도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내 서재의 프사글이기도 한 은유작가의 아래 문장을 좋아한다.

 

"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세계가, 사회가, 우리들에게 보편화되어 있는 규범과 체계를 '지당하신 말씀'으로 신격화한다.

객관적이고 다수가 용인하는 보편성에 함부로 덤벼들면 마녀사냥을 당하기도 한다.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소위 '책 읽은 티'를 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건 누구나 경험해보았으리라.

낭중지추(囊中之錐)의 뾰족함을 우리 사회는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많이 읽게 되면 우리의 도그마는 첨탑처럼 뾰족해진다.

흔히들 시니컬해지는 게 보편적인가 보다.

 

 

 

 

 

슬라보예 지젝의 책 <삐딱하게 보기> 제목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에 대해서 계속 의구심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목표로 이끄는 원동력은 고독함”이라며 “혼자 있는 시간이 즐겁다. 나쁘게 말한다면 자신은 일종의 자폐증을 겪고 있다”고 말한 미코출신 하버드대 출신의 금나나가 말한 부분을 너무나 공감한다.

자폐증으로 힘들게 살고 있는 가정을 생각해 봤을 때 이 발언은 경솔하다는 의견에 동감하지만,

말 그대로 책을 사랑하면 자폐(自廢)가 시작된다. 결국은 사회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당당해지자.

그 사회성이라는 정의(正義)도 결국은 권력의 정의(定義)니까 말이다. 

 

 

 

 

 

현재 우리는 지식을 제공하는 자, 지식을 습득하는 자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쌍방향으로 뒤섞인 개개의 독단으로 가득 찬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포스팅 자체도 하나의 정론(政論)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향하는 '균형감각'은 그저 좋은게 좋은거라고 허허 웃으면서 넘어가는 회피의 처세술이었던가.

성격이 무난한 사람으로 포장하기 위한 익살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비판을 두려워하고, 소수자로 전락되는 것이 겁나 통설의 경계선에서 왔다갔다한 이력(履歷)이 내 삶이었던가.

 

 

 

정희진 작가는 나에게 화두를 던졌다.

책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서 이젠 아파야 된다고.

 

물론, 과학이, 언론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지금 내가 고민하는 부분과 정확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작가도 인간의 감성을 흔드는 분야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많은 공감을 얻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고통스럽게 책을 읽는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그 지식의 사유화를 나의 독단으로 써내려갈 용기가 없다.(독자나 일반인에게 이런 주문을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균형감각, 절충, 객관화를 버리기도 쉽지 않다.

우리의 지식은 풍요로운 삶에 있어서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독단을 실행하는 자는 그저 위대한(?) 학자들에 맡기련다.

 

 

글마무리에 나의 고민을 간파하기라도 한 것 처럼 정희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약자의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을 향한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 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물론 불가능하다.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오늘도 책은 나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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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9-22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충격받으셨군요. ^^
그럼에도 추석인데요...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

북프리쿠키 2018-09-28 11:26   좋아요 0 | URL
남성인 저에겐 항상..숙제(?)같은 작가였는데..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편한 책이 나를 성장시킨다라는 말. 이 책에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2018-09-22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8 1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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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5 06: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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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9 1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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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2 2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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