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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에 입맞춤을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9
에펠리 하우오파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08년 7월
평점 :
인류학자가 소설을 쓰는 전통이 그리 낮선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의 뒷편에 상당히 장문으로 붙어 있는 해설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흥미로운 책의 내용을 되짚어보면 확실히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풍부한 인류학적 지식을 가진 저자가 그 연구를 통해 얻은 것을 독자에게 실감나게 전해주는 방법으로, 이야기 구조를 빌려서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강렬한 방법인지를 절감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진 책이다.
똥구멍이라는 강렬한 흥미를 끄는 주제에 대해, 질펀한 입담을 통해서 정신없이 쏟아내는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는 마치 우리나라 판소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낮선 남태평양 한 섬에서의 적나라한 삶의 모습들이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있는 우리들의 문화에 무척 친근한 모습으로 느껴지니 말이다. 이 책이 말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력의 끈끈한 힘의 공통분모를 공유한 때문인지, 혹은 잘 쓰여진 책이 가지는 인류보편의 정서에 호소하는 강한 호소력 때문인지 모르겠다.
책은 자신의 서사구조에 따라 자신의 페이스로 경쾌하게 진행된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과 친근한 듯하면서도, 이국적인 섬나라의 질펀한 정서가 잘 녹아드는 이야기의 흡인력 속으로 빨려든다. 그래서 이 책은 무척 경쾌하면서 빠른 속도로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주제의식이 무척 깊고 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책은 힘찬 속도로 행진하는 활자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잔치로 우리들을 이끌어간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제시하는 삶의 여러가지 대비되는 모습들. 남편과 아내. 딸과 어머니. 가족과 이웃, 공동체와 국가. 체제와 민중. 종교와 진실성. 제도적 의료와 비제도적 치유. 주변부와 중심부. 익살과 아픔. 생명력과 부패. 선진국과 후진국. 이런 강한 대비들을 통해 이 책은 우리 삶의 조건과, 그런 조건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남태평양 섬이라는 객관적인 조건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란 것. 얼핏생각하기에는 무척 낭만적이고 목가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삶의 조건에는, 선진국의 핵폐기, 핵실험. 자원약탈, 외교적 억압, 빈곤의 구조화같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수많은 아픔들이 겹겹히 옥조이고 있었다. 그런 아픔의 모습을 이 한편의 소설처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학자이면서 한 나라의 행정가로 활동하는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의식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책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강한 주제의식을 소설이라는 멋진 틀속에 잘 용해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전혀 정치적인 메시지를 가지지 않은 코믹한 책으로 읽힐수 있다. 생경한 정치적 용어 한마디 없는 이 책은 익살과 해학, 웃음과 기발함이 번쩍이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의 집합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많은 웃음을 통해 책을 읽고 난 뒤에 느껴지는 뿌듯함, 삶의 모습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뒷맛이 바로 이 책의 진정한 힘이 있는 것 같다.
'태평양적인 방식' 이라는 선진국이 후진국에 덧씌워놓은 억압적 이데올로기. 교묘한 방식으로 태평양의 소국들을 옥죄고 있는 뉴질랜드와 호주, 혹은 지구상의 다른 거대한 힘들을 가진 국가 혹은 정치 경제적 실체의 존재에 대한 고발.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는 외부에서 덧씌워졌으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아픔속에 허물어져가는 억압적이고 희화적인 내부억압체계. 즉 허망하게 무너지는 경찰의 힘, 변변한 약이나 의사가 없는 의료체계, 정당성이 없어 보이는 정치구조, 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외부에서 주어진 종교... 저자가 말하공 싶은 것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낮으면서 가장 보편적인 것. 가장 비천한 것이면서, 하루하루의 삶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것. 우리가 날마다 먹는 음식처럼 날마다 배설하는 똥과 방귀, 모든 것을 다 빼앗아도 언제나 사람들의 삶에 남아 있을수 밖에 없는 배설이 의미하는 근본적인 생명의 힘. 체제가 모든 의미를 빼앗은 비천한 가치체계에 속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그것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메시지가 살아날 수 있음을 웅변하는 이 책의 호소력. 책의 페이지마다등장하는 잘 배치된 흥미럽고 기발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저자가 효율적으로 웅변하는 강렬한 메시지.
바로 그런 것을 통해 남태평양의 한 구석의 독특한 삶의 모습이 전세계적인 인류의 보편성을 얻게되고, 그들의 삶의 아픔이 바로 우리들의 삶의 아픔으로 받아 들여질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한없이 허망함이 우리들의 마음에서 공감을 얻고, 아픔속에 삶을 살아가는 그 강한 생명력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강한 공명을 일으키고, 그들이 결국 찾아가는 그 맹랑한 희망이 우리들에게 지쳐가는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정말 오랜만에 흥분을 자아내게 하는 무척 잘 쓰여진 이야기로 느겨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