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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의 지도
에밀리오 칼데론 지음, 김수진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창조주의 지도'라는 이름의 특수한 지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 지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적은 책이지만, 그 지도에 관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그 지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각축과 음모에 관한 이야기이다. 2차대전을 앞두고 제 3제국을 이루어 나기는 나치독일과 파시스트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그리고 이 소설의 주된 무대가 된 로마에 위치한 또 하나의 거대세력 교황청 간에 벌어지는 힘겨루기와 음모에 관한 이야기이다.
뜻하지 않게 3중 스파이라는 복잡하고 위험한 정보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 주인공은 뜻밖에도 무척 이지적인 지성을 갖춘 회의하는 지식인이다. 열강이 거대한 격돌을 앞두고 긴박한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고, 그 각축의 장에 빠져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신념에 의해 세상을 재단한다. 거대한 힘들이 부딪히는 사이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홀린듯이 무엇인가 강한 신념을 가지고 그 신념에 자신을 의탁한다. 회의하는 인간보다는 무엇엔가 의지하는 인간의 삶이 더 쉬운 것일까.
주인공은 유일하게 회의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의 조국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프랑코의 공화파 반란군과, 국민파 정부군의 저항운동에서도 그는 냉소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아카데미'가 공식적으로 프랑코를 지지하고, 국민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신고하여 총살에 처할수 있다고 위협을 가하기도 하지만, 그 자신은 강한 국민파 지지자도 아니면서, 프랑코의 국민파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거두지도 않는다. 그런 그의 회의하는 '지성적인' 행보가 그를 위협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책은 또 유럽이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는 1930년대의 사정을 내부의 시각으로 들여다 보게 해준다.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이야기들은 여러가지 책들을 통해서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에 대한 내용을 마치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처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얼핏 너무 잘 아는 것 같이 생각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었던 2차 세계대전 전야의 유럽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 수뇌부를 둘러싼 여러가지 일화들 중, 어렴풋이 전해들은 기억이 있는 신비주의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때 그의 허리를 찔러 빨리 숨을 거두도록 도왔다고 하는 롱기누스의 창이라든가, 세례요한이 예수를 판 대가로 받은 돈, 예수의 포피, 그리고 창조주의 지도같은 나로서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카톨릭적 전승의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이 책에 중요한 소재들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주로 성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주인공의 의식에 드리워진 전쟁이라는 것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모습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 의지할 것을 찾고, 구채적인 상황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는 그런 상황이라는 것도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지 못하는 그림자처럼 느껴지고, 동시에 실물을 가지고 있지못한 존재인 로마나 마드리드 같은 도시가 하나의 인격을 가진 실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를 잉여의 존재처럼 의식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격정과 전쟁이 사라지고 난 다음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힘들게 난세를 살아간 사람들 위에 슬픈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