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 지음, 한미선 옮김 / 도솔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젊고 총명한 젊은이였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소대장이 되었고, 두려움을 무릅쓴채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소대를 이끌었다.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그 젊은이의 뇌를 손상시켰다. 젊은이의 두피와 두개골을 뚫은 그 쇠파편은 뇌의 한부분에 박혔고, 그 부근을 손상시켰다. 그리고 그 주변에 생긴 감염으로 인한 염증 역시 신경세포들의 많은 부분을 손상시켰다.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생긴 반흔 역시 그 젊은이의 두뇌의 신경세포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방해했다.
 
목숨을 건졌다. 기적적으로. 뇌와 같이 혈류가 많이 통하는 뇌조직에 생긴 상처. 2차세계대전이라는 열악한 의료환경에서 입은 상처.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그렇게 큰 상처를 입은 사람치고 생명을 건진것만해도 다행이었다. 다행히 파편은 그의 생명을 유지하는 뇌부분은 비켜서 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하기에 지장이 없었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뇌는 많은 것이 상실된 상태였다.
 
잔인한 것은 외견상 정상처럼 보이는 그의 두뇌가 가장 중요한 기능중 하나인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에 중요한 손상을 입었다는 점이다. 데이터가 없는 두뇌는 그를 과거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기억상실. 기억상실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경험했던 개인적인 기억들의 소중한 부분만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는 알파벳을 읽는 법도, 간호사를 부르는 방법도, 간호사라는 명칭도, 급하게 소변을 봐야 한다는 말조차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글을 읽고 쓰는 법을 알기 위해 이 책이 지어지기까지 무려 35년을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끊임없는 그의 노력과 불굴의 의지로 그는 더 나은 곳을 향해 날마다 일보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진속도는 무척이나 더딘것이었고, 그 전진을 그가 생명이 붙어 있는 도안 평생을 계속해도 그가 정상인과 같거나 그 비슷해진다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그는... 가망이 없었다...
 
가망이 없다는 것, 정상인 처럼 되거나, 정상인과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잔인하게도 그의 파괴된 대뇌는 그에게 어렴풋이 그런 비극적인 현실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덜 파괴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아무런 가망없는 것을 위해서 평생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는 만큼만 덜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노력의 모든 과정을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면서 30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기록을 만들도록 했었다.
 
이 책의 저자는 그가 남긴 그런 기록들을 보면서, 그의 기록들이 의미하는 인간두뇌의 작동방법을 역으로 추적하는 작업을 했다. 과학자들, 인간의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인간의 두뇌라는 미묘한 구조에 관해서 이제 많은 것을 안다. 그 지식중 적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 책에서 일인칭으로 등장하는 기록자 '자세츠키'라는 러시아의 한 청년장교 출신 뇌부상자의 기록에 빛진것이 큰 것 같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두뇌의 작동방법에 대해, 고장난 두뇌 스스로가 남긴 소중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곳이 이런 식으로 작동이 되지 않고 있다.." 고장난 뇌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이런 신호를 힌트로 삼아서 과학자들은 뇌가 이렇게 손상을 입으면 이런방식으로 뇌의 기능에 장애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꾸로 "뇌의 이런 부위들은 고장이 나지 않았을때는 이런방식으로 작동을 하고 있었겠구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의 초인적인 의지와, 과학자들이 자신의 아픔을 통해 뇌의 부상이 가져오는 것에 대해 알아주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더 나은 치료를 받을수 있기를 바라는 그의 초인적인 의지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다.
 
뇌의 부분적 파괴에 의한 기억상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기억은 데이터만으로 따로 존재하지 않았었다. 기억은 시각적 이미지와, 공간적 감각들이 함께 뭉쳐진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환자는 단순히 기억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서 생활하기에 필수적인 공간의 감각, 시각적 정보, 계산, 연산, 추리, 정보처리,,, 같은 광범위한 능력에 손상을 입은 것이었다. 뇌손상에 의한 기억의 상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한 어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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