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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평점 :
최근 나는 일련의 문화인류학적 저서들에서 많은 감동을 받고 있다. 금년 초부터 시작된 인류학적 주제에 관한 독서는 '문명과 야만' 이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 풍부한 사례를 들어가면서 인류가 큰 의미에서 차근히 문명의 발달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나의 믿음을 뒤흔든 그 책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와 유사한 다른 좋은 책들이 없는가를 찾아나서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역작 '총.균,쇠'를 마주칠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총.균.쇠'는 나의 좋은 벗이 몇년전 나에게 우정어린 권고로 읽어보기를 청한 책이었지만, 나의 지적인 게으름이 아직까지 그 책을 읽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문명과 야만'을 읽고 큰 감동을 받은 나는 곳바로 그 책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고, 그 책은 나에게 엄청나게 큰 감동을 주었다.
'왜 아메리카 인디언은 백인들에게 무력하게 멸망해가야만 했던가?' 어린 시절 내가 서부극이나 '모히칸족의 최후'를 읽으면서 인디언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느끼던 오래된 질문이었다. 사회적 정의의 부재나 부조리에 대한 나의 최초의 자각은 바로 '인디언들의 아픔'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주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난, 내가 사는 그 시대가 바로 모순과 폭력의 시대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총.균.쇠'를 통해 엄청난 감동을 다시 한번 맛 본 나는 우연히 또 한번의 행운을 맡이하게 되었다. 얼마전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최신작인 이 책 '문명의 붕괴'가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손에 쥐면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 책의 무게는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책을 아끼기 위해 겉의 예쁜 종이커버를 벗겨내고, 안의 검은색 하드카버에 붉은 글씨로 소박하게 쓰여진 '문명의 붕괴'란 붉은 글씨를 읽으면서 내 마음이 얼마나 기뻣는지...
난 옛부터 정말 좋은 책은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습관이 있다. 빨리 읽으면 몇일이 걸릴 이 책을 나는 한달을 넘게 걸려서 읽었다. 그만큼 한줄 한줄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었다는 뜻이다. 미국 몬태나주의 이야기를 지나서 이스트 섬의 이야기를 읽을때 즈음에 난 이미 이 책이 '총,균,쇠'에 못지 않은 또 하나의 필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때쯤 이미 다음에 읽을 저자의 책 '제 3의 침팬치'를 주문하여 내 책상위에 쌓아두고 있었다.
'총.균.'쇠' '문명의 붕괴' '제 3의 침팬치' 이렇게 두께가 비슷한 세권의 책을 나란히 쌓아놓아 놓고 바라보는 나의 기쁨은 그야말로 독서의 즐거움 그 자체였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저녁은 나의 행복한 잔치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만면에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독서에 푹빠져 지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도 행복해 하였다. 기쁨이란 그렇게 전염성이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몰락에 관한' '문명의 붕괴에 관한'이야기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인가라고 물을수는 있다. 맞다. 저자의 조심스러운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내 마음은 결코 낙관적이지는 않다. 난 저자보다 인생의 경험이 더 적어서인지, 저자보다 아픈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덜 경험해보아서인지, 지구적규모의 문명의 앞날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저자 스스로가 말하듯이 '문명의 몰락은 자연적인 조건도 문제이지만, 문제를 예견하고서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책임이 더욱 큰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철저한 실리주의가 통용되는 듯한 국제사회의 질서는, 그러나 눈 앞의 근시안적인 이익만을 바라보는 철저하게 비이성적인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지금 세상을 구원할듯이 울려퍼지는 반 신자유주의 혹은 아래로 부터의 세계화를 외치는 움직임이 '시애틀 회담'을 무신시키고, 여세를 몰아 마침내 우루과이 라운드를 무산시킨데까지 이르렀지만, 세계는 우회하여 'FTA'라는 또 다른 이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관철시키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교토의정서는 표류하고, 세상에는 힘에 의한 폭력이 난무하고,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쓰레기로 채워지고 있다.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조심스러운 낙관주의'에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난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난 사실 책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저자도 진정한 낙관주의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에, 차마 비관적인 결론을 스스로가 내릴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악하여. 나의 지혜로는 세상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돌려 놓을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난 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스스로가 비관하는 세상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사과나무를 심는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선 나 또한 동일하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하는 것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오늘의 신문과 뉴스에 울분하고, 세상의 진실을 찾아 책이나 찾아다니는 문약한 일개 생활인일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때에야 이스트 섬의 나무가 사라지듯이, 아주 작은 관목에 불과한 내가 서있어야 할 자리를 파악하고 제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작은 관목덤불 하나가 이스트 섬의 수명을 아주 짧은 한순간 더 연장할 수 있었듯이, 나와 내 후손들이 살아갈 이 세상을 작은 한 간이나마 더 지탱할 수 있게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하루의 삶에 지친 내가 저녁시간을 독서로 마감하며 약간의 보람을 찾는 기쁨을 누리는 원천이 되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