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휴식과 이완의 해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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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과 이안을 줄 것 같은 제목을 보고 잔잔한 에세이집이려나 어렴풋이 생각했던 이 책은 '잠을 통한 변신'이라는 아늑한 환상을 쓴 장편 소설이었다.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시끄러운 소음과 복잡한 일들이 얽힌 세상을 살면서 평온하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자신 만의 노력과 방법으로 힘든 과정을 겪다보니 안으로 멍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우울함과 열등감, 무기력, 애정 결핍 등에 맞는 약들을 복용하고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정신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면?

책과 함께 이어 플러그가 사은품으로 도착했다. 너무 귀엽고 앙증맞아 보였지만 집에서 이걸 쓰게 될까?하고 한쪽에 밀어 두었다. 머잖아 나의 휴식을 방해하는 딸의 친구들이 놀 장소가 없어서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음,,, 도무지 글자가 안들어와서 요녀석을 꺼내 귀에 꽂으니 아주 고요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것도 쓸모가 있으니 상품으로 나오는 거겠지^^

오테사 모시테그는 <아일린>이라는 소설로 미국의 최고 젊은 작가 상과 헤밍웨이상을 수상한 작가였다. 2016년 맨부커상 최종후보작까지 오른 작품이라고 한다.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처음에는 너무 신랄하고 솔직한 성적인 묘사에 당혹스러웠다.

주인공은 외적인 조건만 보면 아름답고 똑똑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 내면은 사랑받지 못한 유년기에서 비롯된 삭막한 감정과 무기력함,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삶을 살아간다.

각자의 문제에 사로잡혀 자식을 사랑해주지 못하는 부모는 결국 암과 알콜의존으로 세상을 떠나고, 헤어지고도 집착의 대상이 된 애인에게 병적인 감정을 쏟아낸다. 그녀 주위에는 진정한 공감과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약을 먹고 자신의 의식과 정신을 비워내길 바라는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을 쓴 소설이다.

약물을 통해 동면하는 것처럼 잠을 자는 것이 약물남용처럼 보이고,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는 이 장치를 통해 새사람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애타는 심정을 담았다.

"엄마와 예전처럼 대화할 수 없어. 정말 슬퍼. 버림받은 느낌이야. 정말, 정말 외로워."
"우린 모두 외로워, 리바."
나는 말했다. 그건 진실이었다. 그녀도, 나도 외로웠다.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그저 너무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 날 안아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그거 한심한 거니?"
"애정을 갈구하는 거지." 나는 말했다.
"괴롭겠구나."

깨어 있는 동안은 주로 영화를 보는 주인공과 절친 리바의 대화에서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는 법은 모르지만, 상대의 마음에는 귀기울여 최선을 다해 위로하는 것을 본다. 어쩌면 혼자가 되어 힘든건 나이고, 애정을 갈구하며 약을 먹으며 버티는 건 나인데...
나도 위로받고 사랑받고 공감받고 인정받고 싶은데...

"일 년간 잠을 자기로 결심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신경안정제를 처방받고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약이 자신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했을 것이다. 내가 잠재적 위험에 대해 전혀 몰랐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암에 산 채로 잡아먹혔다. 어머니가 뇌사 상태로 병원에서 온갖 관을 꽂고 있는 모습도 나는 보았다.
삶은 연약하고 찰나이며 사람은 물론 조심하며 살아야 하지만, 나는 온종일 자는 생활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죽음을 감수할 참이었다. "

죽음을 감수하면서 위험한 시도를 하는 주인공은 염세적이다. 또한 끊어내지 못하고 집착하는 사랑에 대한 냉소적인 문장이 자주 나온다.

'사랑'측면에서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다. 리바는 자주 '정착'에 대해 얘기했다. 내게는 그게 죽음처럼 들렸다.
"누군가의 입주창녀가 되느니 차라리 혼자 살겠어." 나는 리바에게 말했다. 그런데도 전 남자친구 트레버에 대한 로맨틱한 충동은 이따금 고개를 들었다.

결혼하고 안착하려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사랑없는 관계가 너무 무모하고 회의적으로 다가왔다.
사랑받지 못했거나 상처가 너무 크거나,,

"해야 할 일도 없었고 대응하거나 보상할 일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 무엇도. 그런데 나는 그 무를 인식했다.
잠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깨어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행복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잠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내 인생 전부가 가능한 최악의 방식으로 눈앞에서 번쩍거렸고, 보잘것 없는 모든 기억, 그때 그곳에 나를 있게 한 모든 사소한 일들이 내 정신을 가득채웠다.
나는 언제나 여전히 나였다."

닥터 터틀을 만나기 시작하고 평일밤에 열네다섯 시간씩 자고 주말에는 하루에 겨우 몇시간만 깨어있었다. 약물중독으로 인한 어둠, 현실과 꿈 사이의 흐릿한 상태, 음울하고 멍한 뇌안개 상태로 산다는 것,,,

잠을 자지 않으면 불안해서 약을 먹고 또 먹게 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다면, 반대로 깨어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두렵고 골치아플까도 생각해본다.

우울증 환자들이 잠을 자는 이유를 알 것같다. 잠으로 도망가는 일종의 회피이다.
이전의 나도 아이 학교 보내놓고 안그래도 어두운 1층 집에 커튼을 치고 오전내내 잠만 잤다. 우리집에 오는 손님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거실의 커튼부터 걷어냈다.
어둠에 길든 사람은 어둠이 익숙해서 잘 모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외롭거나 지루하거나 그리움을 느낄 때면 그 사진들을 훑어보며 그곳이 얼마나 시시한 곳인지-갈라진 계단, 물이 새는 지하실, 페인트가 벗어진 천장, 부서진 찬장-확인하며 역겨움을 느끼려 했다. 그러면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모님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더라도 내게 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그들은 친구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내게 위안이나 좋은 충고를 해주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상대가 아니었다. 나를 거의 알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죽느라 바빴고 어머니는 자기답게 사느라 바빴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그게 암에 걸리는 것보다 더 나빠 보였다."

암에 걸린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늘 술에 취한 어머니는 어떤 책임도 져주지 않았다. 유년기에 방치된 삶이 내내 그늘진 삶으로 인도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언제나 영화속 환상처럼 현실에서는 마음을 두지 못하고 슬픔이 공기 중에 종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다양해서 잠의 깊이에 따라 빠르기도 느리기도 했다. 나는 수도꼭지에서 받아 먹는 물맛에 아주 예민해졌다. 물이 때로는 뿌옜고 부드러운 광물질의 맛이 났다. 거품이 많고 역한 입냄새 같은 맛이 날 때도 있었다. 소파에 푹 쓰러진 채 나무바닥 위의 먼지가 외풍에 회오리처럼 밀려가는 모습을 숨죽이고 빤히 바라보는 나 자신을 문득 의식하고 살아있음을 잠시 기억한 뒤 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난 슬픔에 압도당한 것 같아. 너무 힘들었거든. 하지만 어쩐지 아름답기도 해. 이렇게 슬프고 평온하게. 엄마가 돌아가시지 전에 뭐라고 했는지 아니?
'모두에게 인기있는 사람이 되려고 너무 안달하지 마. 그냥 재미있게 살아' 그 말이 정말 와닿더라. '모두에게 인기 있는 사람.' 사실이거든. 난 정말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거든. 너도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니? 난 이만하면 괜찮다고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아. 지금 인생을, 그러니까, 나 혼자서 직면하게 된 일이 아마 내겐 이로울거야."
<친구 리바는 엄마와의 추억이라도 있었다>

"하늘은 희부옇고 내 귀를 때리는 바람의 거센 일렁임에 도시의 소음은 지워졌다. 그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렵기는 했다. 미친 짓이었다. 잠을 통해 새 인생으로 들어간다는 이 아이디어는.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여행의 깊은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계속 숲 속을 헤매고 있었던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동굴의 입구에 다가가고 있다. 내면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불의 역한 냄새가 난다, 동굴에서 다시 빛으로 나오면.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 모든 세상이 다시 새로워지겠지."

엄마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알려준 방법으로는
양을 세지말고 중요한 것을 세라는 것이었다.
잠이 오지 않을 대는 먹을 것 이름이나
대통령의 이름 꽃이름 등을 세었다.
이 부분이 그나마 따스한 부분이었다.

약물 중독에 빠진 고아가 된 주인공은 누구든 호감을 갖는 사람은 아니다. 사랑스럽고 자기 일을 잘하는, 누구가 좋아하는 캐릭터로서가 아닌 비호감형인 인물을 내세워 어두운 일면을 알고나면 응원하며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나는 기분이 든다.

반쯤 몽롱한 상태가 지속되는 글들 속에서 염세적이지만 세상의 고요함을 위해 나의 휴식과 이완을 위해 잠을 자는 해로 만든다는 발상이 특이했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게 가장 힘든 일일 수도 있는 지금, 그렇다고 약물에 의지하는 방법은 위험할 수도 있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시도한 주인공은 그만큼 다급했을 것인지도 모른다.

글들은 섬세하고 진솔해서 인용하고 필사하고 싶은 부분도 많았다. 처음엔 읽히지 않고 어색한 표현이었지만 드러내놓고 아파할 수 없는 젊은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프게 느껴졌다.

결국 알약을 먹고 사흘간 잠을 자고 , 일어나서 피자 한조각과 물에 약을 먹고 또 사흘간의 잠을 자는 반복이 몇달간 지속된다.

그런 휴식기를 갖고 나서 세상은 달라졌을까?
나는 원하는 새로움을 장착하고 눈을 떴을까?
여전히 그대로인 나와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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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류형정 지음 / 뜻밖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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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란 표지를 들추니 이쁜 만화와 정갈한 손글씨로 가득한 책이다. 봄분위기 타듯 마음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어 가볍고 재밌게 읽었다.
세상엔 재주많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아기자기한 그림에 손글씨까지 써서 나만의 책 한 권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작업일까?

"나는 믿는다.
언젠간 나의 꽃이 피리라는 것을.
보이지 않는 틈에서 필 수 있으니
나를 많이 들여다봐야지"

표지부터 너무 귀염미를 발산한다.
네컷이나 두컷 혹은 한 페이지에
생각과 글을 정성껏 손글씨로 눌러 쓴 에세이 만화

"가끔은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여러 가지의 나는
여러 사람을 만나거나
여러 일을 통해 드러난다.
그럴 때마다
그런 모습이 정말 내가 맞을가 고민하고
여러 모습의 나를 보며 흔들리지만
다양한 감정과 태도를 배우게 된다.
그렇게 다른 누구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단단해지기도 한다."

직업병으로 어깨가 아파서 뒤의 여러 장은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는데 너무 정감이 가고 웃음이 나오는 책이다.
자기의 일에 의미를 찾고 자꾸 잠자고 있는 자신을 깨워내는 일을 하는 작가의 노력들이 너무 부러웠다.

스무 살에도 서른 살에도 나를 찾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남들보다 뒤늦게 나를 알아간다. 사실 아직도 나를 나 자신이 잘 모르고 내가 어렵기도 하다. 누군가 나에 대한 것을 질문할 때 의미를 부여하며 확신있는 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 들여다본다.

어느 날의 바다.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바다 사진만 찍는다.
바다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과
그날의 나의 마음을 바라다 보는 일
시선을 바꿔보는 일은 참 멋지다♥

"작은 것들은 작지 않다.
늘 제일 큰 노트 대신 작은 메모지를 쓰고
큰 소리 보다 작은 소리에 집중한다.
작은 연필이 연습의 길이를 보여주고
작은 말이 모여 큰 힘이 된다.
나의 작은 그릇에는
작지만 소중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학창시절부터 무언가 글감이 떠오르면 바로 쓰라는 문예부 선생님의 지도에 수업 중에도 문득 창밖을 보다가 시가 떠오르면 연습장을 꺼내 끄적거렸다.
문학 소녀를 꿈꾸던 나의 10대와 20대를 잃어 버리고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살아온 시간들이 훅 하고 지나간다.

결국은 내가 지치지 않을 정도로 했어야 했는데 나를 너무 혹사시켰다. 몸도 마음도 망가진 후에 돌보는 나의 삶을 찾아가려니 어설프고 서툰게 한둘이 아니다.
작가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왼손으로 그린 그림까지 멋스럽다.
살짝 웃음도 나는 재미난 책이다

"무용수의 동작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들뜬다. 인간이 저래도 되나.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어도 되나.
무언가에 매혹된 인생은 황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단한 바위같이 곧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 어디에도 사로잡혀 있지 못한다.
유연한 몸을 가지고 싶고,
유연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유연석을 보면 그렇게 설레고 좋은가 싶다. 계속 설레서 유연해져 미끌미끌거리고 싶다."

무용수의 유연함, 영원한 댄신 퀸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을 볼 때 느끼던 황홀함이 이런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유연함과 우아한 몸짓, 그 안에 깃든 마음까지 유연할 것 같은 그들의 마음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는 유연석이 좋단다. 나는 밥잘사주는 예쁜 누나부터 정해인의 미소가 좋다.
요즘 스치듯 보게된 반의반이라는 드라마에도 그 선한 미소가 고스란히 담겨 설렌다.
이 누나같은 이모(?)마음 설레게 하는 정해인.

부록에는 스무장 정도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손글씨 대신 워드로 대신 했지만
책에 대한 작가의 열심과 애정이 보였다.

봄에 피는 꽃이 다르고 여름에 피는 꽃이 다르고, 가을과 겨울을 기다리는 꽃이 다르듯이 내 안의 꽃도 언젠가는 피어날 것을 믿어본다.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를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을 즐겨보는 일.
바람직한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기며 서서히 농축되어 가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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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당 오가와 - 오가와 이토 에세이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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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책을 읽을 때는 주로 한국문학이나 에세이를 즐겨 읽었다. 그나마 다양한 독서를 하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번역의 쓴맛을 어릴 때 보아서 그런지 세계의 문학은 왜 그리 어렵기만 한건지, 그들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못하는 페쇄적인 성격때문인지 독서편식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일본 문학에 대한 편견도 있어서 걸러 읽게 되었고, 독서모임을 통해 몇 권 읽으며 역시 일본스럽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요즘의 일본 소설과 에세이를 접하게 되면 의외로 감수성이 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난다. 뭐든 나의 좁은 식견으로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다양성을 인정해 가는 일은 책읽기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은 <츠바키문구점>집필 당시 기록한 1년 간의 일기로, 소박하고 단정한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과 남다른 인생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지난 번 권남희 번역가의 에세이를 읽고나서 그런지 느낌이 오가와 이토의 일상과 닮은 권남희 번역가 문체가 은연 중에 친근하게 겹친다. 아니나 다를까 권남희 작가 역시 자신과 닮은 느낌이 있어 이토 작가의 일곱 권째 번역을 계약하며 기뻤다고 한다. 직업으로서 번역을 하지만 감성이 비슷한 작가의 글을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작가는 '유리네'라는 강아지를 키운다. 그리고 독일, 그 중에서도 베를린을 오가며 글을 쓴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올해는 조금이라도 평화로워졌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이미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거의 날마다 슬픈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츠바키 문구점>을 내던 해의 일기임에도 지금의 현실과 많이 다르지 않아 살짝 무거워졌다. 세상은 여전히 슬픈 뉴스로 잠잠할 기색이 없다. 코로나 19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데다 우리나라는 텔레그램의 n번방인지 박사방인지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다. 이번에도 형량이 너무 적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제대로 죄값을 치루고 반성을 해도 모자를텐데 이런 ....!!!!

후,,,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글을 읽으며.

"내가 지향하는 것은 틈.
시간에도, 공간에도, 인간관계에도 틈을 만들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생각없이 살다보면 물건은 계속 늘어나니 의식해서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요없는 물건은 손에 넣지 않는다, 집에 들이지 않는다, 인생에 덧붙이지 않는다, 이런 의식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꼼꼼하고 완벽하게, 그리고 빠르고 정확하게
수학문제를 풀어나가 듯
인생의 문제들도 그렇게 풀어나가면
될 줄 알았다.
나도 완벽하게 그렇게 살아내고 싶었다.

무엇이든 책임을 다하려는 욕심이
어쩌면 차갑고 도도해 보이기도 했을
내 젊은 날에 비해 지금의 나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각까지 노후되는 것을 원치않기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어지는 틈...
빈 구석이 보여지고, 느리고 어설프지만
여유있게 웃을 수 있는 지금이 오히려 인간미가 느껴진다.^^;;,; (은근 허당이다)

아직도 풀어내야 할 인생의 문제들
예전처럼 완벽함을 꿈꾸지 않는 지금
그 틈이 고맙다.

"하루 15분이어도 좋으니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을 보는 게 좋다."
그 말에 헉하고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선이 닿는 모든 것에 인간의 손이 닿은 것만이 있었다.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지 하고 슬퍼하다 하품하는 유리네를 발견하고 안심했다.
바다며 산을 당연하듯 보는 사람과, 나처럼 도시에서 인공물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은 정서가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베를린은 개에게 너무도 다정한 도시다.
그 때 들은 꼬리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일본에서는 푸들 꼬리를 짧게 자른다.
개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을 때는 푸들의 꼬리가 원래 그렇게 짧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태어나서 바로 자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르는 것은 단순히 그 편이 귀여워서라고 한다."

인간에 의해 무너지는 것은 환경만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쉽지않다.
거기에 사람들은 동물에게까지 가혹하다.
그저 더 귀엽다는 이유로 강아지의 꼬리를 태어나면 바로 자른다니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몸서리를 치게 된다. 어떤 아픔을 느낄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생각을 하지않는 모양이다.

독일에서는 인위적으로 꼬리를 자르거나 귀를 자르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선진국은 경제성장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의 성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츠바키 문구점>은 결코 화려한 얘기는 아니지만 책장에 꽂아두고 싶은 책이라는 독자의 편지에 기분 좋아진 작가처럼 나도 함께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을 글로 담아 책으로 나오는 것도 신기할텐데 대상까지 받으면 정말 맥주 맛이 제대로 일 것 같다^^

하루하루의 일상을 강아지와 함께, 요리를 하고 기분에 따라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때때로 느끼는 감정들을 담아 낸 일기도 책으로 만들 수 있구나.
작가의 삶은 그 자체가 작품이 된다니 더 없이 멋진 일이다.

독가들의 호평을 받아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어 편지를 받으면 얼마나 의미있는 작품으로 남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많은 분들의 응원에 힘입어 다음 속편을 이어서 쓰고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속편이 나오기 전에 <츠바키 문구점>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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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 - 내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취향수집 에세이
신미경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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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경 작가는 지난 해 <혼자의 가정식:나를 건강히 지키는 집밥 생활 이야기>로 만나고 두번째 책이다.

지난 책에서는 소소한 일상에서 건강을 위해 직접 장을 보고 밥을 지어 먹는 혼자만의 집밥 레시피를 소개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이 인상적이어서 기억하는 작가였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다양한 일상과 취향을 좀 더 내밀하게 털어내고 있다. 생각을 쓰고 문장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은데 참 정갈하다고 느낀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책벌레처럼 많은 책을 읽어오신 분이었다. 오빠의 책들을 보이는 대로 읽어서 초등학교 5학년때 <죄와 벌>을 읽고 사람이름이 너무 어렵고 잔인한 내용이라고 독서록을 썼을 정도라고 하니 역시 글솜씨는 독서의 능력이다.
많이 읽어야 내 안에 품었던 말들이 글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테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오래전 나는 사는게 허무해서 작은 물건이라도 쇼핑하며 하루를 견디듯 살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미니멀리스트로 나의 태도를 변화시킨 뒤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 물건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자 내 몸과 마음을 편안히 돌보는 데 신경을 쓴다. 친절과 긍정을 가져온 운동과 좋은 식사, 규칙적인 생활이 이어지는 이유다."

"물건보다 경험을,
경험보다 배움과 깨달음을 얻으며 충만함을 느낀다.
나는 생활, 건강, 일, 지성, 감성처럼 내 삶을 이루는 영역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

미니멀리스트로 최소한의 짐으로 가벼운 삶을 선택했다. 그대신 다른 것들에게 더욱 마음을 쏟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며 건강으르 챙기고 배움과 지성을 채워가는 일이다. 어찌보면 욕심이 없어보이는 듯하지만 자기를 챙기는 일에 남들의 시선으로 아웃사이더가 될망정 좋은 것에 욕심을 내고 길들이는 모습이 배울만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수집하고 있는 물건은 지금 내가 빠져 있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간결하고 명확한 증거물."

예전에 한창 십자수 취미에 빠졌을 때 십자수 실을 모으는게 취미였다. 불면증을 이기며 시간을 보내는 데는 십자수만한 것이 없었다. 큰 바느질 실통으로 네 통의 실이 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할 틈이 없어졌다^^

누군가는 쓸데없어 버리는 쇼핑백을 모으는 것이 또한 내 취미이다. 간혹 딸아이도 외출하고 이쁜 쇼핑백은 꼭 챙겨오는 편이다.
어느 때는 그 안의 물건보다도 특이한 쇼핑백을 보면 그것에 탐을 낸다. 쇼핑백을 보며 세상 다가진 듯 즐거워하는 내 모습을 보면 재밌다.

작은 것부터 크기도 다양하고 색도 두께감도 모두 다양하게 모은다. 필요할 때 물건을 담기도 하지만 모으다보니 점점 살림이 늘어서 이것들을 챙겨서 이사할 때마다 종종 버리기도 한다. 아마 20대부터 시작된 작은 취미생활이다. 아기자기한 쇼핑백을 모았다가 필요할 때 꺼내 딱 맞는 포장을 하게 될 때 뿌듯하다.

"진짜 휴식은 아무것도 안하는게 아니고 몸과 마음에 뭉치고 쌓인 것을 풀어내야 생기는 것임을 예전에는 몰랐다.
바쁘고 짜증나고 정신없다고 느낄 때도 깊은 호흡 세 번이면 마음이 준비된다. 고작 숨쉬기 몇 번이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건 몸의 신비로움이다. 마치 컴퓨터를 껐다 켜는 것처럼 몸과 마음의 리셋열쇠는 호흡에 있었다.
순환과 균형의 시간.
내면에서 은은하게 차오르는 차분함으로 급한 성질과 날카로운 신경을 다듬고 중간에 이르게 하는 여정이다."

"늙어서 할 일이 없으면 어떻게 해.
그게 바로 죽은 거지.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니 일할 계획, 그거 굉장히 중요해요. 체력과 능력의 한계를 넘지 말아야 해요.
10퍼센트를 남겨두세요.​
뛰지말고 걸으세요. 오래 살면서 오래 일할 플랜을 세우는 거.
이거 굉장히 중요해요. 꼭 기억하세요"
--아흔을 넘긴 현역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의 조언

너무 급하게 달리는 인생인데도 자꾸 주위에서는 더 빨리가라고 채찍질을 하며 내 한계치를 넘어서 뛰고 달리게 만든다.
오래 할 수 없고 지치는 이유겠지...
누가 뭐래도 뚜벅뚜벅 걸으면서 즐기듯이 10퍼센트의 재능과 능력을 남겨두는 일.
기억해야겠다~^^

"표정에서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 좋다. 무언가에 사로 잡혀서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사람.
우직하게 어떤 일에 매달려 있는 열정적인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즐겁다. 힘든 일을 털어놓을 때도 결국 긍정적인 말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자기 연민은 살짝 스쳐갈 정도로만, 남을 비난하는데 소중한 시간과 체력을 절대 낭비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작가처럼 구체적으로 나열하기에는 빈약하지만 내게도 명백한 기준이 있다. 약속을 하고 쉽게 잊지않고 잘 지키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시간관념이 있는 사람, 너무 많은 말은 아니지만, 꼭 해야 할말은 하는 사람이 좋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투명한 사람, 거짓없고 의리를 알고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 밝지만 가볍지 않은 사람..

작가의 의견과 동일하게 자기 연민은 스쳐갈 정도로 자존심과 자존감을 적당히 부릴 줄 아는 사람이 편하고, 웃음 코드가 맞아 함께 빵하고 웃는 게 닮은 사람이 좋다. 눈이 맑아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주고 그 눈에 눈물을 담아내는 사람이 좋다.

다른 사람의 일상을 공유하고 내 삶과 견주어 보는 일. 듬성듬성 구멍나고 허술한 나의 일상을 다시 배열해보는 일은 즐겁다. 기울어지고 고장난 곳을 점검해보고 균형과 조화를 맞춰 나가려는 노력을 다시 해야겠다.

올해 시작하면서 나를 좀 더 챙기고 건강에 신경쓰기로 했는데 코로나를 핑계삼아 하고싶던 수영까지 못하니 가벼운 산책도 안 나가고 게을러진다.
계단 오르기부터 산책으로 이어지는 나의 일상을 마스크와 함께 하면 될 것임에도 마음 먹기만 한달째....
굳은 몸을 활보하며 나의 일상을 회복해보기로 다시 한번 의지를 활활 태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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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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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 35주년을 기념하여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 4개국에서 동시 출간되며, 202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작가의 감회와 새로운 세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았다.

아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지 않아서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벽돌책 느낌이라서 차일피일 미루며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다. 반짝거리는 금박 포인트가 있는 나무숲 표지는 몽환적이고, 겉지를 벗긴 양장본도 매력적이다.
한번 읽으니 끝까지 읽고 싶어 자리를 뜨기 아까울 정도로 흡입력이 좋은 소설이었다.
읽을수록 짙은 인간의 본성들이 나오면서 뭉클해지고 마음으로 무언가를 함께 염원하고 싶어지는 책이었다.

녹나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일까?
보름달이 뜬 밤이나 그믐 날, 말초를 피우고 녹나무에게 마음을 다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나라면 어떤 것을 빌고 누구에게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을까?
책을 읽는 동안 여러가지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끝까지 읽고나니 글 속에서 자연스레 녹듯이 풀리는 것이 매력이다.

요즘 들어 번역의 힘이 크다는 것을 느끼며 읽게 된다. 일본 문학을 우리 감성으로 번역하면서 원작을 될 수 있는 한 훼손하지 않아야 하는 노력들이 보인다. 세련되고 품격있게 가족의 숨은 이야기들과 개인들이 살아가며 지켜가는 숨은 노력들이 감동적이다.
내가 가진 언어와 필력으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해서 아쉽다.

소설가들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일까?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들어주고
말로 전하지 못하는 서로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장소, 녹나무는 전설일까? 실제일까?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감정과 정신과 마음까지 세세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질 수 있다면 그 순간에 내가 알 수 없었던 삶의 깊숙한 내면을 만날 수 있다면...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쿠오는 다시 음악에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연주같은 건 할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서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억에 남은 피아노 소리를 떠올리며 지금까지 자신을 뒷받침해준 어머니에게 후회와 감사의 마음뿐 아니라 피아노 선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신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마침내 기쿠오에게도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있을자리 따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다카코의 아들로 있었으면 그거로 좋았던 것이다. 반드시 음악으로 성공하지 않으면 안되다는 것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면 그걸로 좋았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에게 자식의 특별한 재능은 꿈이 되어버린다. 천재적 재능이라 여기고 살아온 기쿠오는 대학에 들어가 탁월한 경쟁자들 속에서 이탈자가 되고 삶의 방향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한번 정한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방황하고 제자리를 찾아가기 쉽지 않다. 좌절감에 시작한 알콜의존은 큰 병을 가져오게 된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꿈으로 키워주고 싶었고, 당연히 아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엄마는 망가져가는 아들의 삶을 보며 어떤 회한이 들었을까?

죽기 전에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몸으로 녹나무로 향한다. 녹나무는 모든 마음과 정신과 전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대로 전해준다. 생각만해도 벅차고 놀라운 체험일 듯하다.

"녹나무의 정식 기념은 밤에 이루어졌다. 특히 그믐날과 보름날 밤이 적합하다. 그 밤의 모든 준비와 절차를 관장하는 사람이 녹나무 파수꾼이다."

"다만 한가지 충고를 하자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라는 건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만은 독똑히 기억해 두도록 하세요"

차가워 보이는 치후네의 삶에도 후회와 함께 밀려드는 지난 추억들이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았을 시간들. 가정을 꾸리는 아빠에게 마지막까지 등을 돌린 후회. 속마음을 속이고 자존심을 내세워 가족을 잃어버리고 산 세월..

그리고 자신의 병을 알아버린 순간에 겉으로는 차가워보이지만 내면의 약함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모든 것을 숨기고 가문의 대를 이은 가업을 물려 주고 떠나려한다.
자신의 과오를 들추는 일.
사과하고 싶었지만 이미 상대가 사라지고 난 뒤의 뼈저린 아픔들.
무너지는 몸과 마음을 추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녹진하게 내려앉는 결말이다.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안 했던 것이었다. 별것도 아닌 자존심이며 하잘 것 없는 고집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거짓말을 했다. 그런 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는데.
미치에의 죽음은 치후네의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랜 동안 애써 그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으려 해왔다. 여전히 자신을 속이고 또 속였던 것이다."

"레이토는 이해를 못하겠지요. 젊은 레이토는, 기억해 두고픈 것들, 소중한 추억들, 그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 내리듯이 사라져가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어요? 친하게 지내던 들의 얼굴마저 차례차례 잊어버립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잊어버렸다는 자각마저 없어져요. 그게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괴로운지, 리에토가 알겠어요?
레이토에게 묻습니다.
내가 앞으로 조금 더 살아도 괜찮을까요
그럴 가치가 있나요?"

살아가야할 이유와 가치를 묻는 소설이다.
살아온 아픈 흔적을 어루만져주는 감동적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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