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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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 35주년을 기념하여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 4개국에서 동시 출간되며, 202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작가의 감회와 새로운 세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았다.

아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지 않아서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벽돌책 느낌이라서 차일피일 미루며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다. 반짝거리는 금박 포인트가 있는 나무숲 표지는 몽환적이고, 겉지를 벗긴 양장본도 매력적이다.
한번 읽으니 끝까지 읽고 싶어 자리를 뜨기 아까울 정도로 흡입력이 좋은 소설이었다.
읽을수록 짙은 인간의 본성들이 나오면서 뭉클해지고 마음으로 무언가를 함께 염원하고 싶어지는 책이었다.

녹나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일까?
보름달이 뜬 밤이나 그믐 날, 말초를 피우고 녹나무에게 마음을 다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나라면 어떤 것을 빌고 누구에게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을까?
책을 읽는 동안 여러가지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끝까지 읽고나니 글 속에서 자연스레 녹듯이 풀리는 것이 매력이다.

요즘 들어 번역의 힘이 크다는 것을 느끼며 읽게 된다. 일본 문학을 우리 감성으로 번역하면서 원작을 될 수 있는 한 훼손하지 않아야 하는 노력들이 보인다. 세련되고 품격있게 가족의 숨은 이야기들과 개인들이 살아가며 지켜가는 숨은 노력들이 감동적이다.
내가 가진 언어와 필력으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해서 아쉽다.

소설가들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일까?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들어주고
말로 전하지 못하는 서로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장소, 녹나무는 전설일까? 실제일까?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감정과 정신과 마음까지 세세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질 수 있다면 그 순간에 내가 알 수 없었던 삶의 깊숙한 내면을 만날 수 있다면...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쿠오는 다시 음악에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연주같은 건 할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서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억에 남은 피아노 소리를 떠올리며 지금까지 자신을 뒷받침해준 어머니에게 후회와 감사의 마음뿐 아니라 피아노 선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신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마침내 기쿠오에게도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있을자리 따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다카코의 아들로 있었으면 그거로 좋았던 것이다. 반드시 음악으로 성공하지 않으면 안되다는 것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면 그걸로 좋았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에게 자식의 특별한 재능은 꿈이 되어버린다. 천재적 재능이라 여기고 살아온 기쿠오는 대학에 들어가 탁월한 경쟁자들 속에서 이탈자가 되고 삶의 방향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한번 정한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방황하고 제자리를 찾아가기 쉽지 않다. 좌절감에 시작한 알콜의존은 큰 병을 가져오게 된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꿈으로 키워주고 싶었고, 당연히 아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엄마는 망가져가는 아들의 삶을 보며 어떤 회한이 들었을까?

죽기 전에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몸으로 녹나무로 향한다. 녹나무는 모든 마음과 정신과 전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대로 전해준다. 생각만해도 벅차고 놀라운 체험일 듯하다.

"녹나무의 정식 기념은 밤에 이루어졌다. 특히 그믐날과 보름날 밤이 적합하다. 그 밤의 모든 준비와 절차를 관장하는 사람이 녹나무 파수꾼이다."

"다만 한가지 충고를 하자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라는 건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만은 독똑히 기억해 두도록 하세요"

차가워 보이는 치후네의 삶에도 후회와 함께 밀려드는 지난 추억들이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았을 시간들. 가정을 꾸리는 아빠에게 마지막까지 등을 돌린 후회. 속마음을 속이고 자존심을 내세워 가족을 잃어버리고 산 세월..

그리고 자신의 병을 알아버린 순간에 겉으로는 차가워보이지만 내면의 약함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모든 것을 숨기고 가문의 대를 이은 가업을 물려 주고 떠나려한다.
자신의 과오를 들추는 일.
사과하고 싶었지만 이미 상대가 사라지고 난 뒤의 뼈저린 아픔들.
무너지는 몸과 마음을 추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녹진하게 내려앉는 결말이다.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안 했던 것이었다. 별것도 아닌 자존심이며 하잘 것 없는 고집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거짓말을 했다. 그런 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는데.
미치에의 죽음은 치후네의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랜 동안 애써 그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으려 해왔다. 여전히 자신을 속이고 또 속였던 것이다."

"레이토는 이해를 못하겠지요. 젊은 레이토는, 기억해 두고픈 것들, 소중한 추억들, 그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 내리듯이 사라져가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어요? 친하게 지내던 들의 얼굴마저 차례차례 잊어버립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잊어버렸다는 자각마저 없어져요. 그게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괴로운지, 리에토가 알겠어요?
레이토에게 묻습니다.
내가 앞으로 조금 더 살아도 괜찮을까요
그럴 가치가 있나요?"

살아가야할 이유와 가치를 묻는 소설이다.
살아온 아픈 흔적을 어루만져주는 감동적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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