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생각한다
존 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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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젖이 젖에 떨어지는 아주 오래된 소리.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아는 소리이자 어린 시절의 소리이며

부모님의 소리이며 부모님의 부모님의 소리인 소리가 난다. 어릴때 시골에 있는 할머니댁

(할아버지가 계셨는데도 할머니댁이라 불렀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가면 들을 있었던 소리이다.

어떤 글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를 저자도 들었던 같다. 하나의 소리가 있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고 송아지에 대한 처치를 마치고 송아지가 초유를 받아 마시면 평소에 안하시던

'하나님 감사합니다' 연발하셨는데 저자도 그런 경험을 한다. 그때 순간 사람이 있는

가장 진실한 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연에 맡긴다. 농사는 어깨에 죽음을 짊어지고 왼쪽에

질병을, 오른쪽에 정신을 앞쪽에 생명에 대한 기쁨을 데리고서 생존과 함께 걷는 길이다. 


소에 대한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배웠다. 소는 1 500년경 전부터 개와 함께 인류의 오랜 동반자였고

기원전 700-600 경부터 가축화 정도로 기원이 오래된다. 집소의 기원이라 불리는 오록스(Auroch)

키가 2미터가 넘는 거우였기에 당시 인류에겐 신으로서 경배의 대상이 되거나 악마로서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현생종 소와는 사뭇 다르게 생겼지만 고대의 오록스는 경배의 대상이었고

카이사르는 '힘이 세고 날래며 사람이든 동물이든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공격한다'라고 평하기도 했고

최후의 오록스는 1627 폴란드 약토루프 숲에서 자연사했고 그곳에는 녀석을 기리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세상은 어느곳이나 종교적 갈등이 존재한다. 특히나 유럽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이 심해 이것 때문에

전쟁이 일어 나기도 한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축에게는 우리가 어떤 종교를 믿든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사람은 자신들을 편하게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는 그렇게 우리와 평생을 함께하며 그렇게 살아 간다. 인간과 중요한 관계를 맺은 최초의

동물은 말이 아니라 소였고 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였다. 인간은 소를 포식자들로부터

보호했으며 소는 이에대한 대가로 모든것을 내어 준다. 


역시 저자는 아직 젊다. 생각과 행동이 시골마을에서 소를 기르기에는 너무 도회적이고 아직 도시 냄새가

. 그런데 그는 원래 시골 사람이고 시골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비록 아이폰을 가지고 다니고

댄스 음악을 듣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아버지와 갈등 관계이다. 도무지 폭은 줄어들지 않는다.

조금 줄어 들었나 싶다가도 이내 벌어지고 조금 가까운듯 싶으면 냉냉하다. 저자 말대로 농사에 관한

모든것을 아버지에게 배웠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시골에 조금씩 스며든다. 


또한 아버지의 행동은 그가 있는 최대한의 '미안하다' '사랑한다'이고 그나 아버지나 여전히

그대로이다. 비록 욕은 하지만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바뀌면 좋으련만. 


저자가 전하는 그의 삶에 대해 적어 본다. 

'가축은 모두 우리 곁에 있고 가족 모두 같이 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 뿐이다. 우리가 배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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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글쓰기 - 공부머리 좋아지는 도쿄대 작문수업
니시오카 잇세이 지음, 김소영 옮김 / 생각정거장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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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생각하지 않은 일방적인 글은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책의 핵심이자 글쓰기의 핵심이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읽는 사람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은 글은 선뜻 읽혀지지가 않는다. 한때

'소통'이라는 단어가 유행 적이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불통' 이유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이와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가 '서로'이어야 한다.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전달하는

자와 전달 받는 자의 상호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 좋은 글이다.


'그래서 '

우리는 가끔 '보고'하는 듯한 글을 쓴다. 아쉽게도 우리의 이러한 글은 '그래서 '라는 의문만 남길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말하는 내용 자체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좋은 글이란 상호작용을 갖추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글이다. 상대의 반응까지도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마치 '비밀의 정원(조해너 베스포드)'이라는 책이 일본에서 베스트 셀러가 이유가 책을

사람들이 자신이 색칠한 그림을 SNS 자랑하듯 올렸기 때문인것 처럼 상호작용은 글쓰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친절한 문장은 논리적인 문장이다. 논리란 한마디로 연결이며 이론이나 문장,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논리이며 이것들을 연결짓는 법이 논리적 사고이다. 그래서 논리적인 글은 앞뒤 문장이 서로 호응하고

상대방도 이해하기 쉽다. 논리적인 문장은 설득력을 가지는데 설득력은 단언할 생긴다. 글을

주저주저하거나 우물쭈물하면 독자는 이미 만큼 가버린다. 독자를 잡아 두기 위해서는 강력한

방이 필요한데 이것이 '단언'이다. 단언 한다는 것은 '진짜 단언할 있어'라는 반론이나 비판을

감수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런 부분을 알면서도 단언한다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한다는 의미이므로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자신이 난처해 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전하는 말이기에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글을 나무에 비유하면 뿌리와 줄기, 가지, , 꽃이나 열매에 해당되는 문장들이 존재한다. 중요한것은

자신이 문장 모두가 필요한 문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무를 가지치기해서 보다 아름답고 탐스럽게

만드는 처럼 글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필요한 문장과 불필요한 문장을 구별해서 독자로 하여금

읽을 마음이 사라지게 만드는 문장은 과감히 지워버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글은 자연스럽게 짧아지게

비판적 사고력이 생기게 된다. 이때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타인의 시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필요한 것만 쓴다는 자세는 독자를 향한 배려이다.


어차피 글쓰기의 목적이 다른 사람이 읽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일방적 자기 주장이 아닌 쌍방향

상호작용이어야 하며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독자의 시선을 잡을 무언가가 필요하다. 저자는 이에 대해

글쓰기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읽고 배운 내용이든, 감상이든, 무엇이든 실제로 문장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하위 10%라고 칭하는 저자가 전하는 니시오카

잇세이가 일류대학인 도쿄대에 합격할 있었던 비결은 글쓰는 방법을 알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연습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책으로 인해 글쓰기의 공포에서 벗어나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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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아트 트립 - 일생에 한 번은 중세 미술 여행
김현성 지음 / 더퀘스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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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기억되는 중세는 인류 역사의 오점, 빛에 반대되는 시간, 이성의 시대, 암흑기로 대변된다.

당시의 미술은 너무도 강한 종교적 주제에서 오는 거부감도 강하며 특유의 투박함에서 오는 낯설음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르네상스와 비교되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편견에 조토 디본도네(Giotto di Bondone)라는 사실 나에겐 조금 생소한 그러나

미술사학자들에게는 중세 1000 동안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꼽히는 인물을 소개하며 조토의 그림은

우리의 미적 기준에 비교적 가깝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서 중세 미술이 어렵다는 편견 없이 감상

있을 것이라고 소개한다. 


첫번째가 아시시(Assisi)이다.  너무도 조용하여 찾는 이들을 오히려 당황하게 만들고 소박한 마음과

청빈에 대한 의지로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인구 3만의 작은 도시. 실제로 내가 가본 아시시는

투박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곳에 중세 가톨릭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인 프란치스코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프란치스코 성당이 있고 이곳에 조토의 연작 벽화 스물여덟점이 있다.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조토의 명성도 같이 상승했고 아시시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조토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사회는 계급으로 구분된다. 싸우는 자들(기사), 기도하는 자들(사제), 그리고 일하는 자들(농부,

수공업자)'라고 말한 11세기 주교이자 시인인 아달베론(Adalberon) 말은 한세기가 지나기전 '상업하는

자들'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부상했고 이는 도시의 성장과 산업발달의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시민들은 귀족 세력의 전횡을 견제하고 밖의 도적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코뮌(Commune) 설립한다. 코뮌의 등장은 견고하게 이어져오던 사회구조의 균열을 가져오게 되었고

견고했던 중세의 틈이 벌어지며 사이로 근대화라는 미지의 세계가 엿보이는 시기이고 시발점이

곳이 바로 코무네광장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포르치운콜라(Porziuncula)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안에 있는 작은 성당으로

프란치스코가 직접 흙과 돌을 나르고 발라서 지은 높이 4미터 7미터의 스무명 정도가 예배 드릴

있는 작은 성당이다. 별다른 장식도 없이 단출한 모습은 평생 가난하게 살며 선교에 헌신한 프란치스코의

삶을 닮아 있고 바로 여기에서 중세 유럽을 휩쓴 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놀라운 점은 프란치스코는

수도회에 입회한 수사로서 로마 가톨릭 교단이 인정한 사제는 아니었다는 사실이고 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Ordine die Frati Minon) 회칙이 상상을 초월할 만치 엄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교를

나갈 화폐는 물론 신발 심지어 성경책도 가지고 다닐 없었고 누더기 같은 의복에 가죽 허리띠를

두르는 것도 금지되어서 노끈으로 허리를 묶고 다녔는데 이것이 현대 작은수도회 수도복의 표본이다. 


저자가 우피치 미술관에서 소개하는 치마부에, 두초, 조토의 '마에스타(Maesta-영광의 그리스도상)'

스승이자 제자이자 라이벌이었던 명의 천재가 동일한 형식과 주제로 자신의 예술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비잔틴 미학을 집대성한 거장이자 성화에 인간적인 감성이 더해지고 시작한 후기

비잔틴을 대표하는 화가 치마부에(Cimabue), 고딕회화로 불리는 시에나 화파의 수장으로 고딕이념에

따른 회화의 방향을 제시한 두초(Duccio di Buonisegna), 중세회화의 페러다임을 바꾸며 근대 미술로의

길을 조토(Giotto di Bondone) 선보이는 예수 탄생에 대한 그림인 <마에스타> 각각의 그림에

자신들 만의 특징을 드러낸다. 아기 예수를 손으로 가르키는 성모의 동작은 ' 분이 길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비잔틴 시대의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떠오르게 하고(치마부에), 성모가 두른

외부의 금빛 선의 부드러운 흐름을 통해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모의 위엄을 전하는 사실적 묘사와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두초의 마에스타, 무엇보다 찬란한 황금빛 옥좌에 앉은 성모의 위엄을

 표현하고 무릎 꿇고 있는 천사의 모습에서 르네상스 예술의 씨앗이 발견되는 조토의 마에스타.

작품은 같은 하나 분명 표현하는 양식이나 방법, 의미하는 바가 다른 그런 작품인데 작품을

곳에서 있다. 조토의 작품은 중세 회화의 현실세계의 공간과 인간으로서의 성모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서양 회화의 출발점으로 매번 인용되며 치마부에로 대표되는 이전 시대의 예술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걸음을 옮기는 계기가 된다. 


책은 중세 미술에 관한 좋은 책이다. 그리고 책은 좋은 여행지침서이다. 피렌체, 아시시, 파도바로의

여행을 계획한다면 책에 실려 있는 작품 하나하나를 만나는 경이로운 시간을 욕심내도 만큼 훌륭한

지침서이다. 아마도 그러기에는 너무도 시간이 촉박하겠지만 도시 하나에 며칠을 투자해서라도 해보고

여행이다. 책의 부제 처럼 '일생에 한번은 중세 미술 여행'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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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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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신고를 한적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 가야 하는 어떠한 의무와 권리를 가지지 못했고 당연히

주정부와 연방정부에게는 존재 하지 않는 아이, 그러나 그녀는 존재했고 자연과 대지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 숨쉬면서 살아있었다. 정부의 간섭과 생존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위해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지만 결국 생활을 하고 살아야 하기에 제도권 아래로 나올 밖에 없으나 마저도 자신과의

적절한 타협으로 무마하고 넘기는 가족들. 모순이긴 하지만 출생증명서의 출생일에 대한 논란이나

어쩌다 동네 유일의 산파가 엄마 이야기는 재미있는 시트콤을 보는 흥미롭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법적 증거인 '출생증명서' 받아드나 사실 이마저도 날자가 정확하지

않다. 본인들은 모르지만 외부인 대부분은 그들을 허상과 피해망상으로 만들어진 덫에 둘러싸여

점점 고립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추억을 먹고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억이 희망이 되어 조금씩 조금씩 추억을 탕진하며

산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요즘 우스개 소리 마냥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한것 마냥 으스대기도

하고, 기억의 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저자도 그랬다. 저자가 가진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특별하다. 외부와 단절된 일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마음 놓고 얘기 있는

그런 존재였다. 물론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장의사들이 잘못 칠해 놓은 입술을 그대로 간직한 .

화장실을 다녀온 손을 씻어야 한다는 할머니와 손에 오줌을 싸지 말라고 가르치는 아빠 사이에서

저자는 혼란스러울 법도 한데 이쪽 저쪽 적응한다. 여기서 배운 적응력이 그녀를 자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성장시켰는지도 모른다. 


책은 1부에서는 태어나면서 17세에 ACT 시험에서 28점을 획득해 브리검 대학에 합격하기까지를 

2부에서는 1 보다 파란만장하고 스펙터클한 대학생활이 그려지고 3부에서는 캠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의 석사와 하버드에서의 박사과정이 소개된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입구는 돌문으로 막혀

있고 돌문에는 작은 나무문이 달려 있어 문으로 들어서야 칼리지 안으로 들어 있다. 이곳에

방문객도 손님도 아닌 자신의 이름이 문에 페인트로 있는 서류로도 이곳에 속한 사람이 저자의

경이로움과 기쁨은 '캠브리지는 여전히 기억 속에 있던 대로 오래되고 아름다웠다' 말로 충분히

표현된다. 그리고 속에 자주 등장하는 중세 시대의 흉벽은 마음의 쉼터이자 편안함을 제공하는

안식처였던것 같다. 누구나 그렇게 바라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과거는 영향을 끼칠 없는 대단치 않은 유령에 불과했다. 무게를 지닌 것은 미래뿐이었다'

저자의 삶의 자세를 말해주는 문장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물론 과거가 존재하기에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지만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책임질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현실에 충실해야 하며

충실한 현재가 미래를 가져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교육' 대해 이야기하며 '자아' 말한다. 때로는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변화된 자아이며 성장한 자아이고 그녀는 이것을 '교육'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녀는

책을 비망록(잊지 않으려고 중요한 골자를 적어둔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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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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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는 무수히 이야기 되어 왔다. 흔적과 신호를 통해 상황에 대해 말하며 증거를

제공하는 자연은 자체로 훌륭한 단서가 되고 유의미한 재료가 된다. 그것을 파악하고 파헤치고

탐구하는 이에게 . 저자는 법의학이라는 학문 '법의생태학' 선구자로 죽음에 대해 하나의

억울함도 없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은 알갱이 하나하나, 작은 흔적 하나하나의 인과 관계를

아내서 많은 억측과 가설을 부수고 보이지 않던 흔적을 끄집어 낸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 안에는 언제나 삶이 있다. 법의학은 바로 죽음 안에

있는 삶의 흔적을 찾는 학문이다. 어떠한 모습으로든 남게 되는 삶의 흔적을 찾아 죽음의 이유와

원인들을 밝혀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법의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에드몽 로카르(Edmond Locard, 1877-1966)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라는 '로카르의 교환법칙'이라는

절대 명제를 남겼다. 

저자는 화분학(Polynology)이라는 '먼지에 관한 연구' 하는 학문(좀더 쉽게 설명하면 공기, , 퇴적물,

토양, 실생활에서 수집할 있는 꽃가루, 포자를 비롯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할 있는 크기의 화분 분석과

미립자에 관한 연구를 말한다) 공부했고, 어느날 살인사건 때문에 찾아온 형사에게 도움을 주면서

법의학에 관심을 갖게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며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에 대한 놀라운 정확성, 호기심,

겸손 그리고 진실에 대한 열정으로 '법의학의 여왕'이라 불린다. 


사이먼 베킷의 말처럼 책은 실화가 소설보다 놀라울 있고 긴박하고 스릴이 넘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사건들 마다 진실을 찾는 (저자인 페트리샤 윌트셔의 애칭) 모습은 읽는 이의 모든 감각을

집중시킨다. 혹여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듯한 조각조각들을 하나씩 모으고 찾아내는 그녀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하다. 다이슨에 의해 살해된 조앤의 사체를 찾을때도, 삼합회에 의해 살해된 남성의 증거를

찾을 때도, 강간을 저지른 소년의 증거를 찾을 때도, 요크셔 광산층에서 미이라화 되어 발견된 시신의

흔적을 찾을 때도 그랬다. 


어떤 표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꽃가루와 포자의 종류와 양은 환경의 변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것을

'화석생성론적요인'이라고 부르고 화분학에서 화석생성론적요인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어떤 화분

화석이 발견될지 여부를 결정하는 모든 요소들' 그것이며 모든것은 절대적인 것이 거의 없고 확률적이다.

때문에 법의학자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며 모든 가능성이 대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자연과 죽음의 매혹적인 진실'

책을 정의하는 줄이다. 여기에는 자연이 주는 진실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신의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감추려 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자연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통해 실마리를 발견하고 하나의 '억울한 죽음' 생기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왔고 일흔이 넘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저자에게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이 가슴에 닿는다. 

'내가 이렇게 멋진 딸을 두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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