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간섭은 그 분의 사랑입니다. P278
늘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은 세상이 어수선하면 종말이 가까웠다고 말한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과 믿는다는 사람은 많은데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악하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속에서 산다. 예수의 흔적은 사라지고 예수의 모양만 남아
우상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적 혼탁함이라는 현실 앞에 우리의 맹목적이고 우둔한 종교적
위선을 아쉬워하며 깊은 영성으로 토해내는 이규현 목사의 말라기를 접한다.
제목 부터 도전적이다. '다시 새롭게' 그러나 나는 여기에 다시 한번 도전한다. "우리에게 '다시'라는
지점이 존재하는가?". '다시'라는 말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과연 우리에게
돌아갈 그것이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 잠시 멈칫해진다. 혹 우리는 믿음의 모양만 가진 것은 아닌가?
우리는 흉내만 내는 광대는 아닌가?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책장을 연다.
이 책은 기본, 관계, 본질, 시간을 새롭게라는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기본'이라는
단어에 집중된다. 저자의 말처럼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이든 아니든은 중요하지 않다. 말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집중해야 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질된 종교에 불만을
느꼈고, 제사장들은 성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했다. 도처에서 불순종이 벌어지고 사회는 그야말로
'종말'을 이야기하던 시대이다. 예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늘 예배를 드렸고 모이기에
힘썼다. 이 문장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만 빼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세상을
이끌어가던 교회가 어느새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었고, 세상 속에 소금이던 성도들이 세상속
'처리 곤란자'들이 되었다. 이런 우리 앞에 던지는 말라기 저자의 경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이다.
세상의 사랑이 변질되듯이 우리의 신앙의 열정도 기복을 가지며 변질되고 왜곡되고 타락했다. 신앙의
뜨거움을 끝까지 간직하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우리에겐 그런 간절함도 절박함도 없다. 그런데 이 변질과
타락은 한 순간에 오는것이 아니다. 살며시 들어오는 여우처럼 서서히 스며들어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
같은 착각에 빠트린다. 처음에는 알맹이가 있었는데 어느새 껍데기만 남아 불신앙의 삶이 문화가 되고
삶의 패턴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아드 폰테스(Ad Fontes, 근본으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을 부르짖었다. 잘못된 곳으로 왔으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무너지고 망가졌다면
성벽을 수축하고 고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Matin
Luther)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무너진 신앙을 향해 외쳤던 것이다.
경고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치고 , 되돌리라'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그치고,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경고의 목적은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심판은 반드시 있다. 하나님은
악을 그냥 두지도 않으시고 대충 다루시지도 않는 분이다. 그분은 구원자이시지만 또한 심판주이시다.
십자가에 명확한 죄의 기준이 존재하기에 심판은 반드시 있다.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면
악에 대한 심판이 있다. 뒤집혔던 것이 바로 잡힐 것이며 위선과 진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것이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경고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감정과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하심을 잊지 말라'(합3:2)고 구했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우리도 무릎으로 나아가 긍휼을 구해야 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예배가 실패했음을 경고한다. 예배의 대상과 본질이 바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자신들과 비슷한 존재로 여겼기에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여러 신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예배를 통해 나타난다.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수 없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짖지만 안에서는 바알신을 섬겼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섬기는 자리에서 우상을 동시에 섬겼다. 예배는 치열한 영적 전투의 자리인데 그 자리를 우상에게
내어준 그들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호6:6) 가인과 라벨의 인생을 구분한 것은 예배이다. 자기 만족을 위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을 숭배하기 위해 제사를 드린 가인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린 아벨의 인생은 여기에서 결정된다. 제사는 모든 과정이 거룩해야 한다. 자신들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 졌음에도 하나님의 눈도 감겼다고 착각을 한다. 제단에 올리는 제물도 거룩해야 하고,
제물을 드리는 자도 거룩해야 한다. 열정적으로 부르짖고 찬양해도 거룩을 놓치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오늘날 제물은 예배를 드리는 자 자신이다. 더럽혀진 양심은 흠이 있는 제물이 된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지금의 우리도 죄에 대해 너무
관대하고 여유가 있다. 죄의 경중을 따지는 하나님이 아니신데 우리는 죄의 경중을 따져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그러다보니 예배의 자리에서 위선이 공공연하게 행해진다. 위선은 스스로
인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 무섭다. 예수님 당시에도 가장 거룩하다고 인식되던 사람들이 가장
위선적이었다. 거짓된 예배는 헛되고 가증스러운 것이다.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는지 망각한채
드리는 예배는 의무감으로 드리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면 지루해진다. 마음에도 없는 찬양을 부르고,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단어를 늘어 놓고, 의미 없는 기도를 읊조린다. 매일 아침마다 새로우신(애3:23)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예배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고 내어 놓는 것이다. 은혜 받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드리는 것이 희생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자발적
헌신이어야 한다. 예배를 온전히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여 드릴때 우리 삶의
질서가 잡히고 삶이 안정되고 평화가 찾아온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 많은 예배자 중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행13:22)이라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두려움과 사랑은 공존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경외'가 이런것이다. 무서움과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권리와 위엄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는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았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사라지자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거룩을 거룩으로 여기지 않고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을 때 맞이 한 비극적인
최후를 기억해야 한다. 여호수아가 삶을 마감하며 한 설교에 나오는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수24:14)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아니었다면
이제라도 돌아와서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 더 늦기전에 이제라도 예배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 곳에 있으며 그 분의 간섭하심을 느끼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우리에게 '돌이키라'고 경고한다.
이 책은 신대원 동기들과 같이 읽고 싶다. 지금의 때에 가장 위협받는 존재들인 우리가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으면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기에 바른 분별력으로 성도들을 향해
'돌이키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