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
권라빈 지음, 정오 그림 / 스튜디오오드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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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 

책의 제목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지어지는 미소는 아마도 그런 경험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무언가 하고 있는데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그것, 저자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 한다.

사실 SNS등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작가들의 글을 보면 살짝 아쉬운 점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무언가 엉성한 구성도 그렇고, 이것저것 감성들을 모아놓은 잡화상 느낌도 나고, 작가

자신의 개성도 뚜렷하게 러나지 않는 글을 여러번 접한 이후론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것

같다. 일단 책은 제목에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다행이다. 작가 특유의 간결함과 섬세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시원하다. 타인의 슬픔을 보며 이상한 소리를 해서

상대방의 속을 긁어 놓는 사람에게 던지는 '염병 떨고 있네' 가슴 응어리까지 던져버리듯 시원하다. 


행복은 내것 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도

아닌 오롯이 내것 이어야 한다. 기준이 나에게 있는데 타인이 뭐라 이유는 없다. 그들의 눈엔

'애개, 겨우 정도'일지 모르지만 내겐 그것이 행복이고 전부다. 저자는 이것을 '먼지와 우주'

표현한다. 비교조차 없지만 그것이 내겐 우주로 전부일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것이기

때문이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눈에 별것 아닌것 처럼 보이지만 내겐 가장 아픔이고

고통이다. 제발 그냥 내버려두면 좋겠다. 괜한 오지랖으로 끼어들어 힘들게 만들지 말고 저자의

표현처럼 '그냥 꺼져' 주면 좋겠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하나가 '비교'. 그냥 하나만 보면 되는데 자꾸 비교한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는데 그냥 비교만 하고 그냉 자리다. 자신은 발전도 변화도

없으면서 비교 당하는것은 죽기보다 싫어 한다. 아이러니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대상과의 비교에서

좌절과 박탈감을 느끼고, 상대적으로 약자와의 비교에서 비교 우위를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정도면....'이라는 자기 만족과 함께. 


자신을 '기억의 조각을 줍는 사람이라 소개하는 권라빈 작가. 책에는 작가 자신의 삶이 묻어난다.

아픔과 고통, 외로움과 아쉬움과 같은 가장 감성적인 삶의 흔적들이 하나하나 살아나듯 펼쳐진다.

보일러가 고장난 방에서 강아지를 끌어 안고 우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라 여름인데도 옷깃을

여미게 되고, 가족들이 보고 싶어 안타까워 하는 작가를 떠올리며 부모님 댁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책을 읽노라면 마치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고 나에게 전하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짧은 글이지만 깊은 울림과 감동이 전해지는 권라빈 작가의 글과 글을

완성시키기라도 하는듯 그려 일러스트 정오의 그림은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각 정도로

절묘하다. 소중함을 잊은 대가는 결국 내가 치러야 하며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말은 두고두고

기억나는 구절이다. 책을 읽으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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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하루 10분 글쓰기
조이 캔워드 지음, 최정희 옮김 / 그린페이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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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어려서부터 가진 습관이 하나 있다. 무언가 생각나는 글이나 좋은 문장을 보면 메모를 한다.

처음에는 그냥 메모를 했는데 조금은 정리를 해보는 것이 좋을것 같아 분류를 시작했다. 그러다

컴퓨터라는 유용한 기기가 등장하면서 플로피 디스크와 하드디스크를 이용하여 저장을 시작했고,

지금은 클라우드라는 가상 저장 공간까지 이용하게 되었는데 양이 제법 많고 가끔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렇듯 글쓰기는 우리 삶의 일부일수도 있고 희망사항일수도 있다.

저자는 삶의 일부 속에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발견하고 진짜 숨은 목소리를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펜은 마치 마술 지팡이 같다'. 책을 시작하는 저자의 말이다. 공감한다. 종이에 끄적이는 순간,

정성스레 찍는 마침표 하나, 가끔 여백으로 남겨 공간, 잠간 쉬어 가기 좋은 쉼표, 모든것이

어우러져 벌이는 축제가 문장이고 글이다. 저자의 말처럼 작업은 굉장히 예민하고 노력이

요하다. 끊임없이 감각을 유지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글은 깊은 산속 어디메로

도망가 버린다. 그뿐인가. 글에는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분노도

기쁨도 슬픔과 아쉬움 마저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펜을 들고, 안에 잠재된 힘을

발견하며 끄적거린다.


! 이제 마법의 방망이를 손에 쥐었으니 종이든 혹은 마음판이든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어떤것이라도 좋다. 감정이 이끄는대로, 혹은 펜이 움직이는대로 보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무죄다. 오히려 상상하지 않는 작가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무려 몇백년이나 전에 천공의 라퓨타와 거인국과 소인국의 이야기를 담은 '

걸리버 여행기' 조나선 스위프트도 있지 않은가. 물론 내면의 목소리를 소재로 사용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작가의 의지에 달려 있지만 언젠가 부딪치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당당할 있도록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저자의 특별히 공감이 되는 말이 있다. '글을 쓰는 것을 특별히 직업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을 정원사라고 부르지 않듯이 굳이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글을 있다. 좋은 글은 장차 나무로 자라날 씨앗과 같은 잠재력을

가진다. 이런 잠재력이 모여 좋은 글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글을 쓰려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걸음마 없이 걷기가 불가능하듯 글쓰기도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책은 노력을

위한 준비를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렌즈를 가지고 있다. 사건을 확대시켜 보는 광각렌즈가 있는가 하면,

사건을 축소시켜 보는 접사렌즈도 있고, 멀리 있는 사물을 가까이 당겨서 보는 망원렌즈도, 사건을

조금은 변형시켜 보는 어안렌즈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렌즈들을 통해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며 최대한

판단을 배제하고, 주변을 관찰하고, 감각을 통해 세상을 느끼며 모든 경험들을 통해 글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풍성한 소재로 가득한 삶을 얼마나 들여다 보느냐에 따라 글의 질감이 달라진다.

사람의 일생이 항상 파란만장하지는 않듯이 글도 항상 스펙터클하고 긴장감이 넘치지는 않는다.

적절한 '책갈피'라는 쉼표가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소재들을 얼마나 조절하고 사용하느냐에

달린것 같다. 


저자는 책의 전반에 걸쳐 '상상력' 이야기 한다. 풍부한 작가의 상상력은 노력의 산물이다. 경험과

습득을 통해 얻어지는 재료들을 가지고 상상의 폭을 넓혀 나갈수록 좋은 글이 만들어 진다.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에서도 다가가야 목표가 있듯 작가의  상상력은 뚜렷한 목표의식 속에서 좋은 글감으로

표현되는것 같다. 책은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 보면 좋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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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리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 지금 느헤미야를 묵상하다
황성은 지음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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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주의 일에 참여 ,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한 손을 의지하며 거룩한 주의

일에 기쁨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P60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P 144



코로나 19 사태는 우리에게 교회당의 크기와 모이는 사람의 숫자와 같은 천박한 과시가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알게 하고, 마스크로 입을 막고 생활하다 보니 그동안 무책임하게 내뱉었던

말들이 생각나 억지로 틀어 막고 있는 마스크가 감사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느헤미야의 모습은 잃어 버렸던 혹은 잊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되찾기 위한 최고의 기회임을 깨닫게 해준다. 


느헤미야를 공부해 사람이면 것이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교포 3세다. 할아버지가 바벨론으로

끌려 땅에서 아버지 하가랴가 태어났고 대를 이어 느헤미야가 태어 났다. 고대 엘람 왕국의

수도인 수산궁에 거할 정도로 출세한 그는 '왕의 술관원'(1:11) 된다. 고대 근동 지방의 왕의

술관원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을 겸하는 막강한 실세이다. 포로로 끌려온 3세가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은 느헤미야의 능력이 출중했음과 그가 완벽한 바사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느헤미야에게 포로로 잡혀 오지 않고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무너진 성벽을

세우지도 못하고 노략질 당하며 환난과 능욕에 시달리고 있는 예루살렘의 상황이 전해지자 그는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1:4)했다. B.C 597년과 B.C 538

두차례에 걸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은 스룹바벨과 에스라에 이어 느헤미야

3 귀환을 하게 되는데 성전을 보호하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느헤미야를 공부하며 만났던 단어 하나 때문에 참을 씨름한 기억이 난다. '그때에'라는 단어이다.

'그때에 내가 왕의 술관원이 되었느니라'(1:11) 나오는 단어이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의 지경을 넓혀 민족의 죄를 자기 죄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기도를 바로 '그때에'

응답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때란, 시기 상으로 가장 적절한 ,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수도 있지만 그때가 바로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 것이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항상

적절하다. 우리가 원하는 그때가 아닌 당신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타이밍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때를 바라 있는 영적인 눈이다. 


느헤미야의 기도의 다른 특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 위해 기도했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술관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출세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그곳으로 유대 백성들이

들어오게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그때에' 일을 있는 적절한 자리로 가는 은혜를

더하셨다. 자리는 도구일 뿐이다. 자리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면, 도구가 목적이 된다. 자리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수단을 간구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벌어진다.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한다.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 온다. 그리고 문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 닥친다. 세상은 영적

전쟁터이기 때문에 선한 일을 위기가 오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사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공격일것이다. 우리 밝게 깨어 있고 선한 일을 하면 자신의 영역이 축소되고 힘을 잃게

되므로 격렬하게 저항하고 방해할 밖에 없다. 느헤미야의 성전수축 과정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진다.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인물들이 자기의 영역이 침해 당하고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유대 백성들을 공격한다. 온갖 거짓말로 이간질을 획책하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술책에도 성전수축이 진행되자 이제는 유다 백성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 넣는 심리전을 펼친다. 힘도 없고 돈도 없어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무슨 수로 자신을

지키겠느냐며, 하나님께 버림받아 이미 황폐해진 성에서 예배를 드려봤자 하나님이 받으시겠냐며,

하루만에 지을 듯이 덤벼 들지만 결국 부실 공사에 불과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린다.(4:2).  우리의

삶과 흡사하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중요한 결단, 믿음의 결단을 내리려 마다 자주 듣던 소리다.

이때 느헤미야의 대처가 멋지다. 산발랏의 조롱과 비아냥거리는 말도 안되는 이간질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몸부림치며 기도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문제는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점점 커져서 결국은 하나님을 보게 가려버린다. 느헤미야는 문제와

씨름하는 대신에 하나님과 씨름했다. 문제 해결의 키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 



느헤미야에는 감격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우는 장면이다. 성벽을

재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를 청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청한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청하매'. '같은'이라는 의미의 '일제히' 많은 백성이 사람인것 처럼, 모든 백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망했다는 것이다. 같은 목적, 같은 ,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것이다. 그때

모인 사람이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8:2) 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새벽부터

정오까지' 대략 6시간 동안 말씀을 들은 것이다. 설교 시간이 25분이 넘어가거나 예배 시간이 한시간이

넘어가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우리의 상황과 너무도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렇게

6시간을 말씀을 듣는 이들의 태도는 '귀를 기울였다' 표현된다. '귀를 기울였다' 단어와 '마음에

새기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말은 지금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새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책을 폈을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는 말씀을 통해

그들의 마음과 자세가 어떠했는지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이 9절에 나온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우는지라'(8:9) 조상들이 죄를 지어서 죄로 인하여 포로로 끌려갔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돌아온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무너진 성전과 성벽이 모두 재건된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감격의 눈물이,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의 눈물이 말씀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감격이 있어야 한다. 주일이

되었으니 어쩔 없이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벅찬 감격과 기대감으로 가야하며

무거워진 눈꺼플과의 싸움에서 져서 낮잠 보충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게 주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눈물로써 말씀을 대하는 그런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의 회복은

이런 것이다. 숫자와 크기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예배의 대상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자신들의 만족을 위한 쇼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예배를 드려야 것이다. 


책은 우리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다. 예배의 본질과 자세에 대한 좋은 지침이 될것 같다. 젊은 나이에

예배에 대해 바로 알고 드린다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예배의 회복이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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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롭게 - 이규현 목사의 말라기
이규현 지음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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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내어놓는 것입니다. p69

하나님의 간섭은 분의 사랑입니다. P278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은 세상이 어수선하면 종말이 가까웠다고 말한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과 믿는다는 사람은 많은데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악하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속에서 산다. 예수의 흔적은 사라지고 예수의 모양만 남아

우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적 혼탁함이라는 현실 앞에 우리의 맹목적이고 우둔한 종교적

위선을  아쉬워하며 깊은 영성으로 토해내는 이규현 목사의 말라기를 접한다. 


제목 부터 도전적이다. '다시 새롭게' 그러나 나는 여기에 다시 한번 도전한다. "우리에게 '다시'라는

지점이 존재하는가?". '다시'라는 말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과연 우리에게

돌아갈 그것이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 잠시 멈칫해진다. 우리는 믿음의 모양만 가진 것은 아닌가? 

우리는 흉내만 내는 광대는 아닌가?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책장을 연다. 


책은 기본, 관계, 본질, 시간을 새롭게라는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기본'이라는

단어에 집중된다. 저자의 말처럼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이든 아니든은  중요하지 않다. 말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집중해야 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질된 종교에 불만을

느꼈고, 제사장들은 성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했다. 도처에서 불순종이 벌어지고 사회는 그야말로

'종말' 이야기하던 시대이다. 예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렸고 모이기에

힘썼다. 문장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만 빼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세상을

이끌어가던 교회가 어느새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었고, 세상 속에 소금이던 성도들이 세상속

'처리 곤란자'들이 되었다. 이런 우리 앞에 던지는 말라기 저자의 경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이다. 


세상의 사랑이 변질되듯이 우리의 신앙의 열정도 기복을 가지며 변질되고 왜곡되고 타락했다. 신앙의

뜨거움을 끝까지 간직하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우리에겐 그런 간절함도 절박함도 없다. 그런데 변질과

타락은 순간에 오는것이 아니다. 살며시 들어오는 여우처럼 서서히 스며들어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같은 착각에 빠트린다. 처음에는 알맹이가 있었는데 어느새 껍데기만 남아 불신앙의 삶이 문화가 되고

삶의 패턴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아드 폰테스(Ad Fontes, 근본으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을 부르짖었다. 잘못된 곳으로 왔으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무너지고 망가졌다면

성벽을 수축하고 고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Matin

Luther) '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무너진 신앙을 향해 외쳤던 것이다. 


경고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치고 , 되돌리라'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그치고,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경고의 목적은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심판은 반드시 있다. 하나님은

악을 그냥 두지도 않으시고 대충 다루시지도 않는 분이다. 그분은 구원자이시지만 또한 심판주이시다.

십자가에 명확한 죄의 기준이 존재하기에 심판은 반드시 있다.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면

악에 대한 심판이 있다. 뒤집혔던 것이 바로 잡힐 것이며 위선과 진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것이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경고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감정과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하심을 잊지 말라'(3:2) 구했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우리도 무릎으로 나아가 긍휼을 구해야 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예배가 실패했음을 경고한다. 예배의 대상과 본질이 바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자신들과 비슷한 존재로 여겼기에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여러 신들 하나에 불과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예배를 통해 나타난다.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없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짖지만 안에서는 바알신을 섬겼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섬기는 자리에서 우상을 동시에 섬겼다. 예배는 치열한 영적 전투의 자리인데 자리를 우상에게

내어준 그들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6:6) 가인과 라벨의 인생을 구분한 것은 예배이다. 자기 만족을 위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을 숭배하기 위해 제사를 드린 가인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린 아벨의 인생은 여기에서 결정된다. 제사는 모든 과정이 거룩해야 한다. 자신들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 졌음에도 하나님의 눈도 감겼다고 착각을 한다. 제단에 올리는 제물도 거룩해야 하고,

제물을 드리는 자도 거룩해야 한다. 열정적으로 부르짖고 찬양해도 거룩을 놓치면 하나님은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오늘날 제물은 예배를 드리는 자신이다. 더럽혀진 양심은 흠이 있는 제물이 된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지금의 우리도 죄에 대해 너무

관대하고 여유가 있다. 죄의 경중을 따지는 하나님이 아니신데 우리는 죄의 경중을 따져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그러다보니 예배의 자리에서 위선이 공공연하게 행해진다. 위선은 스스로

인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섭다. 예수님 당시에도 가장 거룩하다고 인식되던 사람들이 가장

위선적이었다. 거짓된 예배는 헛되고 가증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는지 망각한채

드리는 예배는 의무감으로 드리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면 지루해진다. 마음에도 없는 찬양을 부르고,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단어를 늘어 놓고, 의미 없는 기도를 읊조린다. 매일 아침마다 새로우신(3:23)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예배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고 내어 놓는 것이다. 은혜 받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드리는 것이 희생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자발적

헌신이어야 한다. 예배를 온전히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여 드릴때 우리 삶의

질서가 잡히고 삶이 안정되고 평화가 찾아온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예배자 다윗을 향해

'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13:22)이라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두려움과 사랑은 공존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경외' 이런것이다. 무서움과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권리와 위엄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는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았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사라지자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이

거룩을 거룩으로 여기지 않고 두려워해야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을 맞이 비극적인

최후를 기억해야 한다. 여호수아가 삶을 마감하며 설교에 나오는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24:14)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아니었다면

이제라도 돌아와서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 늦기전에 이제라도 예배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 곳에 있으며 분의 간섭하심을 느끼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우리에게 '돌이키라' 경고한다.


책은 신대원 동기들과 같이 읽고 싶다. 지금의 때에 가장 위협받는 존재들인 우리가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으면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기에 바른 분별력으로 성도들을 향해

'돌이키고 회개하고 돌아오라' 분명한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해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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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의 탄생 - 모리나가 요우의 일러스트로 보는 건들건들 컬렉션
모리나가 요우 지음, 전종훈 옮김 / 레드리버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기차를 데포르메(deformer)하는데 있어선 모리나가 요우를 빼놓고 말하긴 어렵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그림은 사물을 그리되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변형, 축소, 과장을 통해

사물의 특징을 잡아내는 데포르메 작업의 특징을 표현한다. 사물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표현해 내는 그의 기차와 전철 그림을 보면 '역시나'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나가 요우는 '기계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있다. 


전차란 '화력을 가지고 장갑으로 둘러 싸여 어디라도 달릴수록 있는 '이라는 저자의 정의는 전차의

범주를 1915 갑자기 등장하는 탱크 이전의 것으로도 눈을 돌리게 한다. 고대 시대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채리엇(고대 전차), 막강 화력으로 상대를 제압했던 브뤼헐의 전차, 다빈치에 의해 만들어진

다빈치의 무적 전차와 실제로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현대의 전차와 아주 흡사한 모형의 코웬 전차등은

'전투 장갑 차량'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만한 것들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일본의 전투 우차인 미토의

전차 우차인 '안진샤' 소개한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제암스 코웬이 '헬멧 전차' 구상하던

바쿠후 말기 일본에서는 장갑 전투 차량 '안진샤' 제작하고 있었다. 소가 끄는 토치카 형태의

모델은 이동 수단인 소가 공격을 당하면 그대로 멈춰 버리는 단점을 가지지만 나름 상륙전에는

유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본다.

 

전차라는 탈것은 적의 탄환을 튕겨 내면서 거친 땅을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거친 길이나 황야를

달리기에 좋은 모델을 찾던 인류는 드디어 '무한궤도(캐터필러)' 발명하게 되고 전차의 성능은

급발전하게 된다. 초기 무한궤도는 '휴대용 철길'이라고 했는데 track 첫번째 뜻도 '선로'이다.

이렇게 무한궤도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혼스비 트렉터(1909) 홀트 트렉터이다. 


1916 최초의 탱크인 마크1 생산된다. L자형 뼈대에 장갑판을 리벳과 볼트로 고정하고, 중추부

장갑 두께가 10mm 나머지의 두께가 6mm, 스프링이 없어서 20-30마일을 이동하면 무한궤도가

끊어지는 전차엔 8명의 전차병이 탑승한다. 이들은 상하 일체형의 전투복을 입었고 스패너로

벽을 두드려서 조타수에게 속도를 지시해야 정도로 굉음을 냈으며 방향 전환을 위해서는 승조원

모두가 달려들어 타이밍을 맞춰야 방향 전환이 가능했고 조타수는 30분에 한번씩 윤활유를

주입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초의 탱크인 마크Ⅰ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장을 향해 출발한

49대의 탱크 독일군 진지에 돌입한 탱크는 9대에 불과했을 정도로 이동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그래도 최초의 탱크는 적에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는 '장갑 탱크는 처음에는 놀림을 받았지만 결국 중요한 무기가 된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최초의 탱크는 마크Ⅰ,Ⅱ,Ⅲ 거쳐 참호를 건널 사용하는 섭나무를 싣고 있는 사진으로

유명한 마크Ⅳ 이르게 된다. 


이밖에도 책에는 프랑스의 전차인 슈니데르(Schneider)CA, 생샤몽(St. Chamond), 수작업으로

20대밖에 만들지 못했지만 영국의 마크4 최초의 전차전을 펼친 독일의 A7V, 초충전차인 K 바겐

(K-Wagen)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남자라면 어릴적 비행기든 탱크든 하다못해 커다란

트럭이라도 운전해 보고 싶은 욕망을 가져 봤을 것이다. 역시도 한국은행 앞에 있던 탱크의

웅장함을 보고 눈에 반해 ' 크면 탱크 조종사가 될거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책은

그런 꿈을 한번 정도씩 가져 우리에겐 행복한 '추억 여행'이다. 거기에다 저자의 섬세함은

지식까지 더해지는 행복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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