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찰스 스펄전의 위대한 설교
찰스 스펄전 지음, 김주성 옮김 / 두란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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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처하는 우리가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예수일 것이다. 그 예수로 인해 우리의 삶이 살아지고 그 예수 때문에 우리의 삶이 격동되고 그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변화됨이 마땅한데 아쉽게도 우리에겐 그 예수가 없다. 아니 혹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만든 예수를 정말 예수 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스펄전은 그런 우리의 신앙에 도전한다. 껍데기는 가라. 가짜 예수는 가라. 십자가의 복음이 진리이며 이 복음이 아닌것은 가짜다 라고. 책을 읽으며 영국의 심장을 울림직한 충격이 전해진다. 그런 충격과 감격이 오늘날 강단에서 사라졌음이 안타깝다.

 

특별한 내용이 하나 있다.

"들리면"이라는 말로 죽음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떻게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12:32-33) 죽음을 표현하는데 선택한 단어가 "들리면"이다. 못박히면이나 달리면이 아니라 '들리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헬라어로 그 의미는 높임이다. "내가 높여지면, 내가 높이 들리면"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참 오랫만에 보는 해석이다. 예전 학부시절 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하여 설명하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비록 수치와 조롱의 표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감당하심으로 영광과 소망이 되셨고 그 영광과 소망으로 인해 우리에게 나아갈 바와 희망을 선물하셨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그분이 지심으로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되었다. 다른 사람을 죽여 영광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에 비해 그리스도는 자신을 죽였다. 금면류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비해 그분은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남들위에 높아지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낮아짐으로 겸손함으로 그의 영광을 대신하셨다. 오히려 자기 몸을 굽혀 그것을 정복하신다. 모두가 회피하는 형벌을 십자가라는 최악의 형벌로 감당하시며 자신의 목적인 사랑을 이루어 가신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이 전해졌고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 그 사랑을 완성하신다. 그는 낮아지심으로 영광을 획득하시고 섬김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신다. 누가 그러라고 한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그것을 보여준다.

 

바로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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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세계기독교고전 33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김종흡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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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대하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어떤 의미를 가진 글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방법과 혹은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그것들을

해석하며 이해해 나간다. 검증되지 않은채 말이다. 무엇보다 성경은 철저한 검증과

확인이 필요한 책이다. 왜냐하면 그 글이 쓰여진 시기와 상황과 문자들의 특성에

의해 점이 하나가 찍히고 안 찍히고에 따른 해석이 달라지며 때로는 문장전체의

해석이 달라지기 떄문이다. 이글은 그러한 오류에 대한 어느정도의 가이드 라인을

만들어 주는 책이다. 고로 솔직히 조금은 난해하다.

 

책을 읽어 내려 가는 내내 저자가 주목했던 한가지를 발견한다. 그거은 "사랑"이다.

기독교하면 사랑의 종교다. 비록 지금은 많이 퇴색되어 세상의 사랑과 돌봄의 대상이

되어 버린 듯해 아쉽기도 하지만 어쨌든 2000년전 예수는 사랑 때문에 이땅에 오셔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시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사랑때문에 다시 살아

나셨다. 그런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도 빼놓지 않는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 만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두가지를 선지자와 율법과 강령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자신에 대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 할 수 없다고 전제 한다. 그러면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분명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음을 이야기 한다. 많은 교회에서 설교하며

메세지를 전하지만 미진했던 바로 그 부분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7,39) 분명 이 말씀엔 네자신을 사랑하라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에게 유익을

주려고 한다. 물론 더 나은 목적과 목표를 위해 고난을 겪고 난관을 극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

마저도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닌가. 이렇듯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줄

알며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선포한 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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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봄
K보리 지음 / 두란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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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린 그 남은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의

뜻에 맞게 살면 된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혹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가혹한 현실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저자는 그런 가혹한

현실 앞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서서히 변화한다. 점점 자기 자신을 내려 놓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인식하며 그분 앞에 겸손해 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생각도 변한다.

절망적이고 암울하기만 상황 앞에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글을

읽는 내내 감정이 이입된다. 마치 내가 그인냥 화도 내다가 눈물도 흘리다가 가슴이 뛰기도 한다.

 

눈에 확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보리씨,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장기려 선생을 기억하게 할 만치 정직하고 성실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이었던 레지던트 윤선생과의 인사 중 하나이다. 이 말 속에 담긴 의미가 가슴을 울린다. 이제 다시 만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하라는 윤선생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온다. 가슴 절절히 환자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진다. 이런 의사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 장기려 선생이 떠오른다. 어쩌면 저자는 장기려 선생을 떠오르게 하는 윤선생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았을 수도 있다. 아니 희망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면서 환자에 대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강한 집념과 책임감 마저 보여주는 윤선생의 모습을 통해 삶에 대한 애착과 의미가 생겼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글귀가 나를 붙든다.

"내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맞닥드려본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얼마나 절박한 말인지 모른다. 언제나 반복되어지는 삶이 아닌 아주 특별한 귀가이다. 죽음을 맞이해 본 사람이 그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갈 때 할 수 있는 말. "내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이 말을 한 분의 선교사님을 통해 들어 보았다. 이슬람권에서 선교하시는 그 분은 살해의 위협과 테러의 위협 앞에 늘 놓여 있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귀국할 때 항상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내가 살아서 집에 돌아간다" 저자의 마음이 전해진다. 얼마나 절실했을지, 또한 얼마나 기대했을지가 여실히 전해진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집은 그런 곳이다. 쉼과 허용과 살아 있음이 증명되어지는 삶의 공간이다. 그 공간안에 살아 있음이 다시금 감사해진다.

 

마지막으로 그의 편지 중 한 구절을 적어 본다.

"제가 왜 슬퍼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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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산다
가쿠타 미츠요 지음, 김현화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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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점점 들어 가면서 생긴 버릇들이 있다.

별일 아닌것에 화를 내거나 조급해 하거나 짜증을 내기도 하고 정 반대로 뭔가

큰일 인것 같은데 태연하고 별로 요동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상을 향해 무심해 진다는 말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한

점이 있어 흥미가 생겼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해서 반드시 더 나아지지만은 않는다. 더 똑똑해 진다거나

더 예의가 생긴다거나 더 바른 생활을 한다거나 하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는게 좋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많다. 저자의 말대로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강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물론 단점만 돋보이는건 아니다. 장점도 있지만

워낙에 단점들이 도드라지다 보니 그 장점들을 다 희석 시켜버린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로 부터 '꼰대'라는 소릴 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점들이 세상을 힘들게

하거나 삶 자체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는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우리안에 내재된

그래서 너무나 익숙한 그런 일련의 행동들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요리를 하다보면

어느 과정을 생략해도 되는지 어느 과정은 다른 일과 같이 해도 되는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덜 신경써도 무방한 것들을

스스로 발견해 내는 시간의 연속인 것이다. 그 연속의 시간을 얼마나 현명하게

보내느냐에 우리가 젊은 이들에게 '꼰대'라는 소릴 듣느냐 '멋지다'라는 말을 듣느냐가 

결정될것 같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목표를 삼아야 하는 것은 삶을 깨우치거나 현명해 지려는 것보다 '도무지 미워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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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한국사 - 고조선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고성윤 지음 / 나는나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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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강은 멈추지 않는다.

어느 시대이건 어떤 상황이건 역사는 이어지고 존재하고 살아있다.

그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 힘이고 용기다. 왜곡되거나 잘못된 역사는 개인 뿐만 아니라

나라 마저도 망가뜨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수치스럽더라도 우리의 역사고 부끄럽더라도

우리가 한 일이기에 역사의 흐름은 어느 누구도 막을수도 막아서도 안된다. 그 역사의 흐름 속

한자리를 차지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뒤돌아 보며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생각해 본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왕세손(훗날 정조)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의 지혜와 용기와 결단력,

그리고 추진력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후기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정조, 왕세손에 오르는 순간부터

죽음의 위기에 항상 직면해 있어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 왕이 되어서도 별반 달라짐 없이 여전히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야 했던 왕. 그가 즉위 후 처음 꺼낸 말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당시 노론이 정권을 쥐락펴락하던 시절에 본인이 그들과 대척점에 있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여 노론 일당의 권력 독점을 거부하고 강력한 탕평 정책을 펴겠다는

일성을 날리는 용기있는 왕. 규장각을 강화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고,  상업개혁의 일환인 신해통공을 발행하여 금난전권이라는 폐해에 대항하였던 지혜로운 왕.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온 것은 '상언'과 '격쟁'이라는 제도였다. 백성들과의 대화의 장을 열기 위한 방법으로 국왕의 행차시에 글로 적어서 아뢰는 '상언'과 꽹과리를 쳐서 임금의 발길을 잡은 후 대화를 하는 '격쟁'을 통해 수천차례나 백성과의 대화를 시도하려 했던 어진 왕 정조. 특별히 '격쟁'은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왕과의 유일한 소통 방법이었고 이를 통해 많은 부패한 관리들과 잘못된 관행들이 수정되고 고쳐지기도 하였다.

소통이 없어 망가져 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 앞에 이미 몇백년전에 백성과의 소통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했던 정조의 모습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귀감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듣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수정하고 개혁하고 다듬는 행동이 수반되었다는 점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한다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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