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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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미셸푸코의 전기작가로 저자를 기억하고 선택했다. 단지 한 작가의 자기분석으로만 접근한다면 크게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프랑스 지식사회를 얼개삼아 계급의식, 동성애의 사회적 분석에 관심있다면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탁월한 성찰과 자기기술. 너무 재미있어 아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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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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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는 여전히 쉽지 않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한 그의 문체와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의미에 독자는 당혹스럽다. 그런 아렌트를 친절하게 소개하는 책이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다.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한다는 제목은 다분히 상업적이지만, 요즘 아렌트가 다시 주목받으며 곳곳에 회자되는 만큼 아렌트는 지금 이 시대에 중요한 철학자다. 저자는 아렌트를 우파 자유주의자로 설명하며, 그런 아렌트가 좌파의 주목을 받을 만큼 중요해진 것은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에서 전체주의를 전근대적 야만이 아니라, 서구 사회의 근대화와 대중의 정치참여가 이루어지는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기인하는 문제(41)라고 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우리’라는 의식을 확인하는데, 서구사회가 자기 안에 섞여 있던 유대인을 적으로 설정하면서 ‘국민국가’를 형성해 갔다고 한다. 이런 반유대주의는 특정 국가나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현상이었는데,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더욱 확장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국민국가>의 형성→이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발달→<제국주의> 정책이 전체주의의 기원이 되었는데, 특히 제국의 기반을 이루는 ‘국민국가’의 쇠퇴와 위기가 전체주의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58) ‘구성되지 않은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 ‘세계관 정당’(현실적 이익에 호소하지 않고 세계관적 원리에 호소하는 정당=나치스, 파시즘, 볼세비즘)이 출현하여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전체주의는 현실 세계의 불안이나 긴장감을 견딜 수 없게 된 대중이 도망갈 수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공상세계를 구축한다. 총체적인 공상적 세계 안에서 대중은 편안함을at home 느낄 수 있다. 다만 이 공상적 세계는 전면적으로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상당히 왜곡시킨 형태로 가공됨으로써 전체주의적 공상의 기반이 된다.”(63)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고대의 인간관을 기준 삼아 인간의 조건을 ①노동labor ②작업work ③행위action의 세 가지로 제시한다. 이 때 ‘노동’과 ‘작업’은 다른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도 수행할 수 있지만, ‘행위’는 다른 인격을 전제하고 작용하는 것이다. 즉 아렌트는 복수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복수성(plurality)의 이해를 중요하게 강조한다. 복수성이란 사람들 사이in-between의 공간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 사이의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다양한 행위의 여지를 없애는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 다양한 행위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찾는다. 바로 사적private 영역과 공적public 영역의 분리다. <공적영역>이 ‘행위’에 의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유로운 영역이라면, <사적영역>은 물리적 폭력이 지배하고 식사나 생식처럼 생물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이다.(112) 아렌트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은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지, 사적인 공간을 인간다움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공적영역에서 복수성을 인정하며 다양한 가치관을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고대의 폴리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만인에게 인권을 부여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해온 서구시민사회가 대중사회적인 상황에 빠져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전체주의를 배태”(134)하게 되었다 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행위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자유를 말하며, 외적 장애물만 제거되면 사람들이 자유로운 상태가 될 것이라는 해방사상을 경계한다. 그래서 『혁명론』에서, 이런 공화주의를 정착시킨 미국 독립전쟁을 높이 평가하고, 선천적 인간성을 해방시킨다는 프랑스 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144) 그에게 해방이 곧 자유는 아닌 것이다.

이런 해방의 정치는 대체로 공감의 정치에 기초하는데, 아렌트는 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아렌트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을 인간적이고 올바른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배타적 가치관으로 기울어 사회의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153)

 

  이렇게 약자에 대한 공감을 원동력으로 하는 해방의 정치는,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 스탈린주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 폴 포트처럼 철저하게 불순분자를 숙청하게 된다. 아렌트는 행위를 위해서 위선이나 가면 persona 이 필요하다하는데, 이 위선의 가면을 제거한다 해서 훌륭한 인간성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이 가면 persona을 제거해버리면 사적 영역에 쌓아 두어야 할 폭력성, 지배욕, 성욕같은 것들이 비어져 나올 뿐이다. 즉 이를 해방시켜 정치의 앞 무대로 끌어올리면 프랑스 혁명처럼 폭력만 남게 된다고 한다.

  아렌트에게는 ‘가면’이야말로 인격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보다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을 ‘인간의 조건’으로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아렌트에게는 ‘겉으로 내보이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인간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아렌트에게 행위=연기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합치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나타남=등장=겉으로 보임=가상appearance’에 일관성이 있고, 다른 시민들이 그것을 인정해주는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마음속으로 ‘착한 사람’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착한 시민’이라는 역할을 공중의 눈 앞에서 연기해 낼 수 있는가 아닌가가 문제다.”(165)

  아렌트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다. 이 책의 저자도 지적하는 것처럼, “한나 아렌트를 따라가며 사고를 전개하다 보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녀가 『인간의 조건』에서 재발견한 의미의 인간성을 획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현대사회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완전히 벗어나 모든 시민이 대등한 입장에서 스스로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적 영역’ 따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한나 아렌트의 공공성론이 지닌 한계라고 비판하는 정치사상 및 사회사상 연구자도 적지 않다.”(131)며 비판한다.

 

   나는 아렌트에게 얼마간의 근본주의적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인간과 세상을 단순하게 일반화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는 그의 깊이를 좋아한다. 철저히 사고하는 그의 태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렌트의 주장만을 본다면 그만큼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도 없다. 그런데 그 주장에 닿기까지 그의 사고과정은 엄청 길고 깊다. 아렌트는 우리가 쉽게 단정하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며, 사고의 깊이를 단련시킨다. 무엇이든 쉽게 생각하지 않아서 어려운 아렌트를, 이만큼 쉽게 설명한 책도 없을 텐데, 그런 아렌트를 쉽게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야말로 아렌트를 배반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렌트에 대한 훌륭한 정리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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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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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8년 ‘조제프 자코토’라는 프랑스 학자가 네덜란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토대로, 자크 랑시에르가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전개한 책이다.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몰랐고 네덜란드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가르치고 배움이 일어나기 위한 언어/매개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이 출간되었고, 이 책을 중간에 두고 수업이 이루어졌다. 수업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자코토가 한 일이라고는 학생들 스스로 그 책을 되풀이 읽고 외우도록 한 것뿐이다. 물론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학습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은 채, 학생이 배운 것을 써보라고 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있었다. 학생들은 작가 수준의 프랑스어를 구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코토는 전통적인 교수-학습의 관점을 뒤집는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책을 설명한다는 것은, 학생이 ‘글’로 적힌 책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로 된 설명은 이해할수 있다는 전제에 바탕하는데, 이는 ‘글’보다 ‘말’이 특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설명하는 것, 그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또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설명의 논리는 무한 퇴행의 원리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설명을 설명해야하는 지점을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그 설명자일 수밖에 없다. 즉 스승(설명자)의 절대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전통적 교수-학습법의 기본관계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떤 스승의 설명 없어도 모국어를 모두 잘 배우듯이, 자코토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설명자의 논리’를 뒤집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내는 허구다.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즉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그런 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먼저 상대가 혼자 힘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음을 그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다. 그것은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똑똑한 자와 바보 같은 자로 분할되어 있는 세계의 우화인 것이다.”(19쪽)

 

 자코토는 이러한 ‘유식/무지, 유능/무능’ 등의 구분이야말로 “바보 만들기”라고 한다. ‘이해한다’는 말이야말로 누군가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 말은 세계를 둘로 쪼개는 위계, “지능의 세계에 세워진 위계에 복종”하는 것이 된다. 자코토는 자신이 학생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학생들 스스로 익혔다는 사실에서, 배움에 어떤 다른 지능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모든 문장, 결국 그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모든 지능은 같은 본성에 속한다. 이해하는 것은 번역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텍스트에 상응하는 것을 주는 것이지 그것의 이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글로 쓰인 페이지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른 지능, 즉 설명자의 지능 작업이 필요한 이중의 바탕도 없다. 스승의 언어, 언어의 언어-어떤 텍스트에 왜 그ㅡ 단어와 그 문장이 쓰였는지 그 이유를 말하는 권력을 가질 단어와 문장-도 없다”(24~25쪽)

 

 즉 평등하다는 것이다.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29쪽)이라며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한다. 이것이 바로 “해방하는 스승”이다. 자코토가 했던 것은 학생을 이해시키는 설명이 아니라, 자코토의 지능을 그 일에서 빼냄으로써, “학생들의 지능이 책의 지능과 스스로 씨름하도록 내버려”(30쪽)둔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에서 “지능과 의지가 서로 분리되고 해방”된 것이다. 즉 스승이 자신의 지능(설명)을 학생의 지능(이해)와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학생의 의지 (스스로 이해하겠다는 의지)와 관계한 것이다. 스승의 의지가 학생의 의지(학생의 지능이 책의 지능과 대결하려는 의지)와 관계한 것이다.

 

 자코토[랑시에르]는 한 지능이 다른 지능에 종속되도록 하는 것은 ‘바보 만들기’라 한다. 이 예속을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해방/해방하는 스승이라는 것이다. 해방하는 스승이냐/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무지한 스승이냐/유식한 스승이냐에서 전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의 고유한 지능을 사용하도록 강제한다면, 우리(스승이든 부모든)는 우리(무지한 스승)가 모르는 것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무지한 자는 스승이 모르는 것을 홀로 배우게 될 것”(34~35쪽)이다.

 

 이는 기존의 대부분 교육학과 교육논리를 뒤집는 것이다. 옮긴이가 해제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은 모두 불평등을 축소하거나 평등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세계 인식을 보인다. 그런데 랑시에르[자코토]는 이와 반대로 평등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지적 능력의 평등은 교육에서 하나의 공리로 보며, 이를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정치적 문제로 옮아간다. 즉 랑시에르는 평등에 대한 사유를 중요하게 제기한다. 진보란 지능의 불평등을 가정하고 이를 축소하겠다는 논리가 아니라, 지능의 평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은 실현해야할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상정한다.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투쟁이 아니라 평등을 가정하지 않고는 정치자체를 발명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이 다른 이들과 평등하게 말하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공통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경험을 자신의 정치적·철학적 사유로 발전시키지만 상당히 근본주의적인 느낌이 든다. 자코토의 특별한 경험을 교육과 정치와 철학으로 확장하는 랑시에르를 ‘철학하는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야말로 관념적이고 극단적인 사유의 결과일 거란 생각도 든다. 사유를 계속 밀어붙이고 확장하는 것 자체가 관념이고 근본주의적이니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1장에 있고, 2장도 어느 정도 읽을 만은 했다. 그런데 자코토의 경험을 정치적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는 3장, 4장, 5장은 정말 읽기가 괴롭다. 어느 정도 난해한 철학책을 읽어왔지만, 이 부분은 의미의 연결도 통찰도 다가오지 않는다. 번역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랑시에르의 ‘빈약함’ 때문으로 여겨진다. 자코토의 경험을 랑시에르가 정치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려는 것이 억지로 여겨지는 부분이고, 그래서 석학들도 때로는 이렇게 조잡한 글을 쓰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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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 또 다른 교육 더 나은 세상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번역 총서 2
마이클 애플 지음, 강희룡 외 옮김 / 살림터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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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학교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이 물음은 ‘바꿀 수 없다’는 단정적 결론을 암시하거나 혹은 반대로 ‘바꿀 수 있다’는 급진적 선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두 상상에 앞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어떤 변화를 위한 것인가’하는 인식의 정립이다. 소위 좌파는, 신자유주의가 관철한 세계에서 교육은 이미 철저히 우파의 도구가 된지 오래라는 시각이다. 그런데 우파는 신자유주의를 확산 고착시키는 데에 ‘일부’ 의식화된 교사 그리고 좌편향된 교육이 장애가 된다고 한다. 교육이 자기를 배반한다고 서로 비난한다. 이 둘은 전혀 교섭하지 못한다.

 

애플은 평생 비판적 교육학자로 연구하고 참여한 바탕을 토대로 자기의 답을 준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꿀 수 있다’이다. 그렇지만 그는 시종 이를 쉽게 말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성공하고 실패했던 많은 사례를 제시하며 적지 않은 조건을 덧붙였다. ①우리의 차이를 서로 존중하며, ②집단적인 힘을 제공해 줄 탈중심 연합을 건설하고 지켜내며, ③그 길이 멀고 험할 것임을 각오하고, ④더 큰 프로젝트에 기반하고 있을 때만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한다. (318쪽)

하긴 평생 사회변혁을 위한 교육운동에 투신했던 저자가 ‘바꿀 수 없다’라고 한다면 이는 자기 삶에 대한 부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꿀 수 있다’고 쉽게 말하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 전세계를 관통하는 신자유주의 교육 지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그 지배의 강고함을 쉽게 부정하지는 못하리라.

 

애플은 파울로 프레이리에 대한 존중을 줄곧 강조하며 그의 영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많은 교육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위한 수단으로 프레이리를 호명하는 것을 비판하며, 교육현장에서 실천과 참여가 없다면 프레이리의 교육론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질문한다. 그러면서 애플은 “교조적이고 지나치게 공격적인 담론, 기계적인 제안과 분석, 역사적 특수성과 인간 행위자를 무시한 경직되고 목적론적 역사관, 소외된 계급의 세계관”(73)을 점검하자고 한다. 애플은 대중에게 시혜적인 오만함을 비판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일상을 대면하는 것에서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줄곧 강조한다. 이는 프레이리가 말한 것이기도 한데,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이해는 또다른 식민지화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3장에서 애플은 조지 카운츠의 경우를 빌려, 학교가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확신을 경계한다. 카운츠는 학교가 지역사회와 ‘연계하고 잘 조직’되지 않으면 그런 변혁의 희망은 비현실적인 것이라 한다. 카운츠는 ‘다양한 수준들에서 진지전’을 수행해야 하며, 특히 ‘혼자서 감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116).

그리고 애플은 진보적 교육자들의 ‘주입의 문제’를 언급한다. 예를 들어 존 듀이는 진보적 교육이라 해도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강제로 주입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열린 자세로 수행하는 질문법이 최상의 해결책’이라 했다. 이에 반해 다른 이들은 ‘학생들에게 현존하는 지배계급의 가치와 지식들을 비교 검토하게 해야 하고, 그 후에 더 적절한 가치를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진보적인 교육의 ‘방법론’에서 불일치가 있었다(120~121).

어쩌면 질문의 방식을 익히게 하고 스스로 비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이라는 점에서는 존 듀이의 방법이 옳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존 듀이의 방법이 도덕적일지는 모르나, 이 방식으로 저항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지배계급의 의식화 교육은 매일매일 명시적/암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폭포처럼 쏟아 붓는 이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는 듀이의 원론적인 방법은 너무나 한가한 소리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교사들이 교실에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갖가지 비판/비난을 저항교육으로 여기는 것은 더더욱 천박하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지배권력의 헤게모니가 학교 교육과정과 학교생활에서 어떻게 관철되는지를 학생들의 언어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훈련을 교사와 함께 연습해야 한다. 이는 어느 정도 교사의 단정과 주입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교사-학생의 상호 대화와 비판의 공간을 열어두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교사의 ‘주입’에 대응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기에 교사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계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공유하고 비판하는 수업의 방법론에서 동지적 관계를 느끼게 해야 한다. 실제로 학생들은 예민하게 느낀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말이다.

애플은 카운츠가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학교·교사·학생은 다양하고 중충적이고 모순적인 정치적 신념들을 갖고 있다(130). 그래서 애플은 한 곳에 묶이지 않고 여러 이익집단들이 “탈중심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줄곧 강조한다. 그렇다. 세상은 선과 악처럼 이분법적이지 않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집단은 서로의 이익이 만나는 지점에서 연합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일시적 전술이라도 말이다.   

 

4장에서 듀보이스와 우드슨의 경우를 앞세워 학교에서 흑인교사들/여성교사들이 마주한 복잡한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애플은 ‘다양성에 대해 열린 인식과 사소한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강조한다. 그래야 ‘더 풍부하고 더 다양한 우리’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지배를 중단시키는 전략이라고 한다(191). 

 

5장에서는 교육이 사회를 변화시킨 사례로,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를 든다. ‘주민참여행정’과 ‘시민학교’를 소개하며, 민중들과 어떻게 밀착 연결하여 사회적 관계를 구축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포르투알레그리가 이룬 성과가 정권이 바뀌어도 바로 예전의 패턴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듯이, 그 원리는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의 원천은 “교사들이 학교에서 민주적인 우선성을 두고 삶을 살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들이 학생들과 지역사회와 같이 교육과정을 만들 때, 지속적인 진정한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

 

6장에서는 반대로, 보수 우익이 교육을 이용해 사회를 변혁시킨 사례를 제시했다. 미국의 월마트가 기독교 논리와 결합해 자유기업정신을 어떻게 확산시키는지를 살펴본다. 그들은 ‘매일 일상의 대중들의 구체적 이해를 체화’하는 방법으로, 대중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도움을 준다는 의식을 대중에게 심어주고 있다. 물론 저자는 월마트의 경영을 옹호하지 않지만, 사회변혁을 위한 월마트의 여러 방법론은 배울 점이 있다 한다. 

 

7장에서는 애플이 한국에서 경험한 사례를 제시한다. 한국 대학 강연과 정부기관원에 압박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운동은 위험을 감당해야하는 것이고 또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특히 전교조 결성과 관련된 것 같은데, 역자가 후기에서 말하듯 한국인에게는 그리 ‘주목할 만한’ 경험도 아닌 것을 미국인 학자에게는 ‘강렬한 사건’이었을 테다. 이 모든 것을 거쳐 그는 마지막 8장에서 교육은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이 글 앞머리에 정리했듯이 몇 가지 조건을 덧붙여 말이다.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물론 이에 앞서, 물어야 하는 것은 애플이 줄곧 지적한 것처럼, 누구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일 터인데, 지배권력의 입장에서는 교육이 사회를 충분히 바꾸어(지배해) 왔지 않던가! (물론 그들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지만!) 그런데 나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답해야할 텐데, 어떤 답을 하더라도 수많은 반론을 마주할 것이다.

내 어릴 때 기억을 되살려보면, 초등학교부터 수많은 국가주의 교육의 세례를 받았다. 집단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철저히 복종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았다. 이는 중고등학교에서도 다르지 않았는데, 성적에 따른 서열화가 오히려 추가되었다. 정치적으로 유신시대부터 80년대 초중반 군사 독재정권까지, 교육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이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판적 사고를 멈추지 않았고 순종하지도 않았다. 비판적 독서와 비판적 대안을 모색했고 수많은 저항을 촉발했다. 지배권력이 주입한 지배의 언어를, 대중은 저항의 언어로 대체했다.

 

어떻게 이 전환이 가능했을까? 지배의 언어세례를 받은 내가 어떻게 점차 지배에 어긋나는 언어로 점진적인 균열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아마 글을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면 이런 변혁은 불가능했으리라. 지배집단이 대중에게 ‘언어/글’을 쥐어주면서 강제했던 ‘국민교육’이었지만, 대중은 이를 변혁의 도구로 삼았다. 그래서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제3세계에서 변혁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가 낮은 문맹률 때문이라 한다면, 이는 너무 단순한 진단일까?

그렇지만 반대의 증언도 가능하다. 지금 박근혜 정권의 퇴행과 억압을 동조/강화하는 수많은 대중은, 바로 우리가 받은 ‘국민교육’의 결과이기도 하다. 국가주의와 반공주의 교육에 길들어진 대중의 자기확신이 대중의 억압에 스스로 동조하고 있다. 교육의 무서운 생명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사회를 변혁시킨다기보다는 억압사회 자체다.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 가능성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주장과 반론과 희망이 뒤섞일 화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계산하는 것보다 ‘단지 나아가는 것’뿐이다. 포기와 절망을 허락하지 않는 교사의 의지만이 삶의 자세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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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이데올로기
마이클 W. 애플 지음, 박부권.이혜영 옮김 / 한길사 / 1985년 1월
평점 :
절판


  학교가 그리고 학교 교육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내가 20년 교직에서 깨달은 가장 극명한 진실이다. 학교가 가르치는 것들(명시적 교육과정)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이런저런 행동규칙(잠재적 교육과정)은 학생을 통제하려는 지배권력의 명백한 의도이다.

  어쩌면 이는 단순한 진실이기도 할텐데, 이 단순한 학교의 본질을 모든 교사들이 통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교사들은 모두 지배의 언어, 지배의 논리로 이미 훈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지배를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학교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 구체적으로 매순간 자각하기란 더욱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 20년 학교 생활에서, 학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실행하는지를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목도하게 되었다. 이는 나의 지나친 과신인지 모르겠지만 내 과신을 무릅쓰고라도 분명 말할 수 있다. 이를 가장 날카롭게 깨달은 것은, 학교의 억압과 부정을 비난하던 교사들이 정작 학교의 억압과 부정에 침묵 동조하며 오히려 강화하던 그 숱한 모순을 체험하면서이다.

  왜 저 교사들은 그렇게 분노하던 학교에 이리도 순종적일까, 그리고 왜 학교부정에 맞서는 교사를 오히려 핍박할까 하는 깊은 슬픔을 경험하면서, 이는 이제껏 우리가 학교에서 익혀온 것들(순종과 침묵과 융화)들이 바로 지배의 이데올로기이고, 이에 충직한 것을 올바른 것으로 내면화한 결과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마이클 애플의 이 책은 학교의 전반적 교육활동이 어떻게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명저이다. 나는 이 책을 몰랐다. 우연히 2년 전, 마이클 애플을 접했지만, 1985년에 번역된 이 책을 구할 수 없어, 도서관에서 대출 복사해 읽으면서, 애플의 한 문장 한 문장에 공감했다. 어쩌면 이제껏 내가 20년 학교생활에서 깨달은 것의 총체적 정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되돌아보면 내가 글로 썼던 상당수가 애플의 관점을 구체적으로 예시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인데, 그래서 내 책의 독자들은 내가 학교 전반에 갖는 관점을 애플의 영향으로 이해할 듯도 하다.

 

 애플에 따르면 학교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학교의 명시적 교육과정뿐 아니라 잠재적 교육과정 전체가 정치적이다. 그리고 당연히 교사도 정치적 역할을 벗어날 수 없다. 애플은 학교가 경제자본뿐 아니라 문화자본을 어떻게 배분하는지를 줄곧 설명하는데, 그 기본은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기초한다. 학교가 어떻게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상식적인 것으로 배분하는지, 누구를 위해, 그리고 어떻게, 지배의 이데올로기가 일상의 학교생활에서 구현되는지를 설명한다.

 

 그 한 예로, 아이들이 처음 접하는 교육기관인 유치원에서부터, 학습 능력보다는 권위와 제도에 복종하는 훈련을 최우선 가치로 습득하기 시작함을 지적한다. 또 학교는 ‘합의’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함으로써 ‘갈등’을 배제한다. 사회교과에서도 갈등을 부정적인 것으로 다루고, 사회를 협동체제로만 규정하면서 결국 기존의 체제와 지배의 이념을 지속시킨다. 또 과학 교과에서도 과학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서술하는데, 이는 과학의 본질이 혁명과 논쟁이라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교육과정에서 이주민, 민족, 인종, 계층의 차이를 지능의 차이로 대체하면서, 차별을 자연적인 것으로 지속하고 있다.

 

 이처럼 학교의 다양한 교육과정에 따라, 결국 각 개인은 학교에서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의 침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대단히 어렵다. 애플은 이를 <세계에 대한 이해가 ‘자기 정당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학교는 학교의 규칙 자체를 문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이해방식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의 이데올로기로 세계를 이해하는 개인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허위와 부당함을 깨닫는 것은 어려우리라. 

 

  애플은 교육에서 체제용어의 사용은 학교를 공장으로 가정하는 체제경영론자들에 의한 것으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신념에 기초한다고 지적한다. 체제경영은 기술적 합리성과 전문성을 강조하며 결국 기존의 정해진 사회 속에서 개인의 역할을 배정 규정하는 기능을 한다. 또 학교가 학생들에게 사용하는 언어(‘학습 부진아’, ‘적절한 행동’ 등의 명명과정)는 중립적이지 않고 왜곡된 관점을 내포하는데, 이처럼 교육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

이처럼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학교를 넘어서기 위해서, 애플은 기존과는 다른 사고와 행동방식 즉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으로, 지배적 헤게모니에 대응하는 인식과 활동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책은 줄곧 교육과정의 비중립성·정치성을 문제 삼는다. 교육의 본질이 정치적이라는 통찰을, 혹자는 상식적이라 할 것이고 혹자는 지나친 편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가 경험한 바대로 말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리라. 이는 애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정당화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의 이해방식 자체를 비판 교정하기란 그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애플은, 교육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향유하고 있기에, 교육을 통한 사회변혁에 부정적이지 않다.

 

 이 책에서 애플의 분석이 좀 더 구체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교육의 자율성이 어떻게 반헤게모니 투쟁을 전개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서술이 없다. 들뜬 독서의 즐거움 가운데서도, 책 전반에 걸쳐 추상적 진술의 반복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이 문득문득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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