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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ㅣ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평점 :
이 책 『전쟁의 슬픔』을 처음 읽었을 때, 깊은 슬픔을 느꼈고 낯선 충격을 받았다. 그 슬픔과 충격은 내가 접해 왔던 기존의 전쟁 소설과 영화에서 느낀 것들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시점의 변화였다.
이제껏 우리가 접해온 베트남 관련 소설과 영화는 주로 미국(혹은 한국)의 관점에서 생산된 것들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베트남 영화 중에 1986년 미국이 제작한 플래툰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기존의 전쟁 영화와는 달리, 전쟁의 참상을 휴머니즘 시각으로 살렸다며 전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전쟁을 영웅주의로 다루지 않고 인간성의 파멸을 잘 드러낸 영화라 했고, 나도 ‘그렇게’ 느꼈다. 아군 사이의 갈등이 전투 중에 동료살해로 이어지는 장면이 충격이고, 베트남해방전사들(베트콩(Viet Cong San)은 남베트남 공산주의자의 비하적 명칭으로, 1960년 이후에 남베트남의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에 통합되어 북베트남 정규군의 지휘에 따름)에 포위된 미군이 탈출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나도 안타깝게 몸을 떨었다. 미군이 정글을 행군하며 언제 어디에서 출몰할지 모르는 베트남해방전사들에 두려움을 느낄 때, 나도 그들이 안전하게 정글을 벗어나기를 함께 빌었다. 미군은 엄청나게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도 베트남해방전사들을 두려워했는데, 그들은 죽음의 사자이고 악의 현현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 베트남해방전사들이 미군을 두려워했다. 베트남해방전사들은 정글에서 미군을 마주할까봐 극도로 긴장하고 미군의 총격에 혼비백산하기도 한다. 최첨단의 포격과 헬기의 공격에 온몸이 찢기며 죽음의 공포로 정신을 잃곤 한다. 이제까지 접해왔던 영화나 소설에서와는 달리, 이 소설에서 두려움에 떠는 자들은 미군이 아니라 베트남해방전사들이었다. 베트남해방전사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군들이 두려워하던 그들이, 오히려 미군의 출현에 온 몸을 떨며 두려워했다. 미군은 죽음의 사자이고 악의 현현이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내게 베트남인들을 한 인간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으로 만나게 했다. 죽음의 공포에 영혼이 찢기고 두려움 앞에 비열해지며 사랑의 욕망에 몸을 떠는, 그들도 인간이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내게 되돌려 주었다. 결국 미군들이 정글속 베트남해방전사들에 극도의 공포를 느낀 바로 그 순간, 베트남해방전사들도 극도의 공포로 몸을 사렸던 것이고, 서로 보이지 않는 그들은 제각기 상대방 때문에 공포에 떨었다. 전쟁의 참담함이다.
그리고 또다른 참담함도 있다. 서로가 두려움에 떨며 총을 겨누었기에, 그렇다면 이 전쟁은 양쪽 모두 어리석어서 일어난 일인가? 그렇지 않다. 베트남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민족해방전쟁을 수행한 것일 뿐이다. 역사적 평가는 명확하다. 이 소설이 전쟁의 참상과 어리석음을 말한다해서, ‘침략에 맞선 해방전쟁’이라는 역사적 평가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배트남 입장에서 ‘전쟁은 참혹하니 전쟁을 거부한다’며 미군의 침략을 용인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전쟁의 어리석음을 베트남보다 미국에게 먼저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토록 무의미하고 끔찍한 전쟁을 왜 시작했느냐고 말이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다가 2차 대전 중에 프랑스가 약화된 틈에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일본 패망 후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지배하려 하자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프랑스를 물리쳤다. 그런데 해방을 눈앞에 둔 시점에 미국의 간섭과 침략이 시작된, 피식민지배 역사 그 자체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프랑스와 미국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침략을 일상으로 해왔다.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시작하고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그들 정치인과 관료들은 결코 정글속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피지배 국민의 찢어진 시체를 볼 일도 없고, 총알이 그들의 뱃속을 긁어낼 일도 없다. 그들은 저 멀리 책상에 앉아 가난한 나라의 전쟁터로 자기 나라의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보냈다.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과 자본을 불렸다. 힘없는 나라에, 힘 있는 나라의, 힘없는 자들을 보내, 모두를 파멸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또다른 참담함이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 미국을 물리친 베트남은 피식민국가들의 등대로 빛났다. 베트남은 자랑스러운 역사를 썼고, 그만큼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수많은 영웅의 이야기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럼에도 승리와는 무관하게 고통과 절망이 넘쳐났기에, 전쟁은 역시나 참담한 것이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은 베트남에 세계 제일의 고통과 비참을 뿌려 놓았는데, 『전쟁의 슬픔』은 바로 이 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승리한 기쁨이 아니라, 승리했지만 역시 비참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베트남의 권력자들은 이 소설의 제목을 『사랑의 숙명』으로 강제했고 오래 억압했다.
바오닌은 승리한 국가의 상처를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작가의 존재이유에 충실했다. 전쟁의 고통과 공포는 승리한 조국에도 깊다는 것을, 전쟁은 인간 보편의 비참이라는 것을 증거하기에, 바오닌은 위대한 작가이다. 바오닌은 자신의 분신인 ‘끼엔’을 통해 전쟁의 수많은 비참을 그대로 전해준다. 남베트남 첩보대가 민간인 여성을 강간 살해하자 끼엔 일행 역시 증오와 광기로 이들을 처치한다.(57). 전사한 전우 ‘빈’의 유품을 전해주러 들른 집에서 창녀로 살아가는 ‘빈’의 여동생과 조우(97)하게 되고, 신참인 끼엔을 이끌던 분대장 ‘꾸앙’이 끼엔의 눈앞에서 죽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끼엔은 전쟁후에도 자책을 멈추지 못한다. 포탄에 창자가 쏟아지고 온몸이 짖이겨진 고통에 제발 자기를 죽여달라고 총을 쏴달라고 끼엔에게 애원하던 꾸앙의 절규가, 전쟁이 끝나도 끼엔을 따라다닌다. 전쟁에 승리했다해서 끼엔의 고통이 씻기지 않는다. 끼엔은 이 전쟁의 공포와 비참과 무의미함을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하기에 외롭다. “그것은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전쟁이 되어 버렸고, 자기 혼자만의 전쟁이 되어 버렸다”(70) 영광스러운 조국해방 전쟁에서 나약한 감상은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그렇지만 해방전쟁의 전사들은 “그동안 수없이 싸워 왔지만 솔직히 말해 한 번도 이 놀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적이 없어”(36)하는 ‘깐’처럼 탈영을 시도하기도 한다. “가만히 앉아서 태연스럽게 전쟁의 녹이나 처먹는 영악한 놈들도 많”(35)은데 “끝도 없이 싸우고 죽이고 하다 보면 인간성마자 잃게”(34)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깐처럼 탈영을 시도하다가 죽고 또 다른 탈영이 계속된다. 탈영은 유행처럼 번져갔다. 항미 전쟁의 위대한 전사들을 칭송하던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이런 탈영과 죽음을 공식화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끼엔이 이를 “자기 혼자만의 전쟁”이라 한 것은, 인간성이 사멸되는 경험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이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하는 고독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 “전쟁의 녹이나 처먹는 영악한 놈들”은 모두 전쟁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기도 하다며, 계급의식을 내보인다.
“만약 싸워야 한다면 싸울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것처럼 베트남 남자들이 정말로 전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면 다리 짧고 배가 불룩한 일부 중년의 지식층에 불과할 것이다. 평범한 일반인들에게는 최근의 짦은 전쟁도 족히 천 년은 지고 갈 깊은 고통이었다.”(99)
이 길고도 참혹한 전쟁중에도 청춘들은 사랑한다. 사랑이 그들을 견디게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끼엔은 ‘한’ 누나에게 느낀 어질한 풋감정과 말못한 이별(90)의 추억도 있지만, 프엉과의 사랑을 끝까지 품고 있다. 끼엔이 프엉을 사랑하는 마음은 나무 뿌리처럼 굳건하고, 프엉 역시 끼엔을 깊이 사랑한다. 전쟁의 경과에 따라 둘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지만, 전쟁의 광기만큼 이 사랑도 뒤틀린다. 입대 기차를 놓친 끼엔의 원대복귀 여정에 프엉이 즉흥적으로 합류하는 장면은 로드무비처럼 낭만적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애틋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은 폭격과 살육이 난무하는 전장이다. 프엉이 ‘항꼬’역 기찬칸에서 성폭행당하는 장면은 작위에 가깝지만 실제 전쟁은 소설보다 더 작위적인지도 모른다.
전쟁후 끼엔이 돌아오자 프엉은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헤어져 끼엔에게 온다. 그들은 서로를 갈망하지만, 자책으로 그들 사랑은 뒤범벅되어 또다시 멀어진다. 전장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사랑을 살리지는 못했다. 끼엔과 (전쟁 중에 매춘생활을 하는 듯한) 프엉은 전쟁 중에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며 서로를 갈망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어둡고 깊은 심연 때문에 프엉이 먼저 끼엔을 떠난다. “그것은 바로 전쟁의 슬픔 속에 사라져 간 자신의 청춘, 이미 지나가 버린 자신의 삶이었다.”(113)
전쟁은 청춘남녀의 사랑만 조롱하지 않았다. 참전 병사들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조롱을 느끼곤 했다. 전쟁이 끝나자 기쁨은 잠깐이고 “병사들의 귀에다 대고 한껏 조롱을 퍼붓는 듯”(105)한 사람들과 끼엔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104) 라며 불안해진다.
“전쟁이 끝나고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허망한 꿈만이 남았을 뿐, 전쟁 이후 그는 누구와도 섞일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끼엔은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109)
승리한 전쟁을 비참하게 그렸다해서 베트남은 이 소설의 출판을 금지했다. 이에 비해 또다른 베트남 전쟁 작가 ‘반레’는 항미해방전쟁에 임하는 베트남인들의 용기와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여 베트남 대표 작가로 인용된다. 반레의 작품은 너무나 애국적이고 충분히 전투적이다. 그렇지만 반레의 소설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은 뒤로 물러나 있고 오직 민족해방의 당위만이 앞선다. 그러나 바오닌은 전쟁의 무의미함에 집중한다. 승리한 전쟁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파멸되어 가는지를 말하며, 결국 전쟁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모두에게 슬프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단지 슬픔, 거대한 슬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쟁의 슬픔만이 영혼을 뒤덮고 있다. (…) 끼엔은 전쟁의 무서운 얼굴과 발톱을 보았다. 추악하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전쟁의 비인간성은 그러한 시대를 겪었다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고통의 기억에 시달리게 만들고, 영원히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만든다.”(265)
끼엔이 글을 쓰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죽은 자와 산 자, 우리 모두의 공동 운명” (142)에 대한 기록이면서 잃어버린 사랑과 잃어버린 삶을 위한 진혼이기도 하다.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 사는 것, 그 옛날 사랑의 길을 다시 더듬어 찾아 가는 것, 그 전쟁과 다시 싸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었다.”(111)처럼 오직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자신이 잃어버린 사랑을 힘들게 다시 찾는 것처럼 전쟁의 광기와도 싸우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라 했다. 사랑을 회복하고 전쟁을 넘어설 때라야 진정한 해방을 맞는 것이다. 그러기위해 그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살아남은 자의 삶을 살기 위해 글을 쓴 듯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동네 작가인 그’(끼엔)는 소리없이 떠나고 ‘나’는 그의 방에서 바람에 흩어진 원고를 발견한다. ‘나’는 순서를 확인할 수 없는 원고를 놓여 있는 대로 한 장씩 읽어간다. 글의 맥락이 수시로 끊기고 하나의 줄거리로 이어지지 않지만 ‘나’는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작품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연의 연속”(322)이라 한다. 이렇게 바람에 흩어진 원고를 ‘나’가 순서도 없이 모은 것이 『전쟁의 슬픔』으로 탄생한 것이란다.
이는 이 소설의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전쟁터의 시간과 끼엔과 프엉의 시간이 서로 섞이고 또 역으로 배치되어, 독자에게 퍼즐을 맞추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시간과 사건이 뒤섞여 결국 전체를 조망해야만 의미가 간신히 드러나는데, 전쟁이야말로 뒤죽박죽 퍼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장에서 삶과 죽음도 우연히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전쟁을 하는지 이 전쟁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떻게 끝나는지 누가 알 것인가? 전쟁에 휘말린 삶이란 우연과 뒤죽박죽 그 자체이리라.
한때 문학의 힘을 믿지 않았다. 방황하는 청춘에, 문학은 내 삶을 관통하지 못하는 ‘무른 낭만’에 불과했다. 나는 단단한 언어로 여겨진 철학을 중심으로 내 고통의 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다 삶에는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행(利行)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그냥 유동하는 것, 그래서 고통의 이유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 그래서 질문이 없으니 답도 자연스레 해소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고야 다시 문학이 읽히기 시작했다. 소설과 시는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행을 펼쳐놓은 것이다.
나는 『전쟁의 슬픔』을 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삼곤 한다. ‘나’를 죽이려는 상대를 온전히 한 인간으로 체감하게 하는 문학에는, (건조한) 철학이나 역사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삶의 느낌이, 힘이 있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20여년 전,1999년 예담 출판사의 반찬규 번역본이었다. 프랑스 번역본의 도움을 받은 이중번역으로 추정되고 있다지만, 당시 받았던 아주 강렬한 인상을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베트남본을 저본으로 삼은 이번 번역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아주 크다. 16개국 언어로 번역된, 베트남 문학의 최고봉일 뿐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 남을 이 작품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확장이 일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