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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평점 :
「저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 치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같이 돌을 던질 것인가」라는
lovedolee 님의 (2월 13일) 리뷰글에 많은 댓글들이 논쟁하고 있기에, 몇 일 전 나도 댓글을 단 적이 있다. 그런데 실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인지 삭제 당했다. 그래서 삭제된 댓글을 그대로 다시 올리고, 내용을 덧붙인다.
먼저 lovedolee 님은 자신을 미국 변호사로 소개하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① 삼성은 국부를 창출하는 기업이며, 삼성의 비리는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피할 수 없었던 비리이며, 어쩌면 우리 한국인 모두의 자화상이라는 것
② 미국변호사 협회의 제 1윤리규정이 고객비밀보호인데, (한국도 아마 그러할거라며,) 김용철은 변호사 윤리를 위반했다는 것. 전문가들인 의사, 변호사, 회계사들이 김용철처럼 고객의 비밀을 들고 나오는 것이 정의와 양심이 되는지, 문제제기하고 있다.
③ 그러면서 lovedolee 님은 <죄 없는 자가 간음한 저 여인을 돌로 쳐라>는 성경의 이야기를 줄곧 인용하며, 지금 삼성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자들은 <우리 자신이 죄가 없는 척 하기 위해서 서로들 돌을 들어 여인을 향해 내려 찍으려하던 예수시대의 군중들과 같은 생각일까>라고 한다.
내가 이렇게 굳이 lovedolee 님의 글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김용철을 비판하는 대체의 논리가 이런 경향이기 때문인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사태의 핵심을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사태의 핵심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해를 구하겠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류의 윤리성 비판이 끝없이 유통되고
이것이 이 사태의 본말을 전도해버리는 것 같아 한 마디 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물타기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추악한 일면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태의 핵심은 비껴가고
단지 개인의 윤리적 차원으로 환원하여 역공격하는 것은
내가 가장 혐오하던 것이기도 해서, 굳이 댓글로라도 반박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반론으로 제기했지만, 삭제된 나의 댓글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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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는 예수의 말이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윤리적 환기라면, 우리는 그 누구도 실천적 비판을 제기할 수 없다.
이 말은 자신들만이 온전하다는 바리사이들 만의 율법에 갇히지 말고,
(간음했기에 율법을 어긴) 율법 밖의 여인에게로
즉, 공동체로 나아가길 바라는 예수의 말씀으로도 읽힐 수 있다.
김용철 책의 핵심은 자신의 직장을 내부 고발함으로써
더 나은 공동체를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님의 말대로 김용철이 비난 받아야할 일도 있을 것이다.
직업 윤리를 어겼다는 님의 말을 인정한다 해도,
사법부까지 농락하며 공공성에 반하는 삼성을 먼저 비난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우리가 돌을 거두어야할 우선 대상은 삼성이 아니라, 바로 김용철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님이 내세우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윤리적 자세일 것이다.
즉 님이 들이대는 윤리적 순서가 잘못 됐다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본 회퍼가 왜 히틀러를 죽이려고 했을까?
“목사가 감히 살인을?”이라는 그 직업 윤리적 잣대로만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사태의 전후 맥락을 소거해버리고,
논점을 단지 김용철 혹은 변호사의 직업 윤리로 환원해버리고 싶은 것이
바로 삼성의 희망사항이란 것을 님은 모르시는지?
여기에서 “왜 나는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라는 시인 김수영이 떠오른다.
(김용철 자신은 삼성의 변호사로서가 아닌 삼성직원으로 일했다고 한 것을 첨부해 둔다. )
그리고 님은 미국의 예를 들곤 하는데
미국에서 기업가의 불법들이 어떻게 제지당하는지를 먼저 밝히는 것이 공정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에서 엘론 같은 회계 부정은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미국처럼 누가 처벌받은, 책임진 경영자가 있던가?
특히 님의 미국 변호사의 직업 윤리 운운하는 부분을 보면,
전문가주의를 내세우는 자들이
어떻게 한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윤리를 왜곡하는지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상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바로 그 <전문가주의>, 즉 전문 기술자들이야말로,
누군가 말했듯 한 사회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권력과 자본의 실무자들로만 복무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 님이 전문가, 윤리규정 운운하며, 결국 이 사태를 호도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온전한 무사유'의 전형임을, 안타깝지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하다. 조직의 배신자가 되지 않고 내부 고발자가 되는 방법이 있나?
“당신은 배신자”라는 논법이
바로 삼성의 논리였고 권력의 논리였고 지배의 논리였음을 모르는가?
삼성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이 슬픈 모습을,
우리는 그 누구도 무관하다 할 수 없고 또 초월해 있을 수도 없다.
나 역시 이 사태와 무관하다 할 수 없으며,
중요한 것은 이제 앞으로 우리 사회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성찰하는 것이
건전한 상식에 더 부합할 것이다.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하워드 진의 말을 첨부해 두며,
님이 말한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가장 고귀한 것을 추구하는 척하는 자들은 없는 것일까? 혹은 우리 모두가 그런 속물이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것이 남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님의 말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듯이, 님에게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는 것도 함께 말해 두고 싶다.
이 말이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는,
작은 것에만 분노하지 않고 큰 것에도 분노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나와 당신의 행동이 그 기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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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과 그의 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온갖 논리를 늘어놓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직 김용철의 개인 윤리만을 물어 뜯고 있다.
바로 그것이 불의한 자본과 권력의 작동 방식임을 모르는 것일까?
그런 어긋난 비난을 퍼붓는 바로 ‘당신’을 통해
불의한 자본과 권력이 유통되며 재생산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일까?
삼성에 근무하는 친인척이 없고, 또 얽힌 이해관계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일 것이라는 것은 유치한 순결주의요, 무지한 착각이다.
자신의 담론이 자본과 권력의 폭력에 결국 어떻게 일조하게 되는지 성찰하지 못하는 ‘순진함’ 못지 않게,
현실사태를 초월한 듯한 자세로 ‘나’와는 무관하다는 ‘자칭 객관주의자들'이야말로
사실은 이 사태의 공범자들이기도 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한국 사회의 이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화가 났고, 슬펐고, 또 부끄러웠다.
그래서 책을 빌려보는 도중에 리뷰들을 살펴보다가 댓글을 달았었다.
내 댓글이 삭제된 것을 확인했지만,
책을 완독한 후에 다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정확할 것 같아 미루었었다.
(이 책이 각종 매체에 전혀 광고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구입해서 읽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lovedolee 님처럼 김용철 변호사를 비판하는 여러 글들을
다시 살펴보니, 그들이 이 책을 정확히 읽었는지 살짝 궁금하다.
왜냐하면 예상되는 비판에 대해 김용철은 책에서 상당한 해명을 이미 제시했다.
그런데도 네티즌의 김용철 비판은 다분히 선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김용철의 윤리성을 비판하고, 삼성의 행태를 변호하고 싶은 자들은
김용철이 책에서 이미 밝힌 여러 해명과 고백에 대해 대해
다시 구체적 재비판을 해주어야, 논의가 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다.
예를 들면, “삼성이 분식회계 조작으로 엄청난 비자금을 빼돌려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책 내용에 대해, 자본주의를 보수(保守)한다는 자들이 비난해야 할 대상이 김용철인지, 삼성의 회계 조작인지 밝히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또 예를 들면 자동차 사업 실패에 따른 엄청난 손실에 대해 경영자는 전혀 책임 지지 않아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시민들은 세금으로 보전해 줘야 하는지 논의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또 하나 더, 오직 이건희 일가의 개인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회사의 엄청난 손실은 아랑곳 하지 않는 숱한 사례보다 김용철의 윤리성이 이 사회에 더 중대한 해악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김용철의 윤리성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가 고민해야할 사례들은 너무 많지 않던가? 이 순서가 그렇게 어렵나? 간단하지 않은가?
김용철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넌 배신이야, 배신!”이라는 조폭 논리 따위로는,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양심고백을 둘러싼 윤리적 논란에 대해 ‘전국철학 앙가주망네트워크'에서 입장을 정리하고,
210명의 철학자들이 서명 발표했단다.
“불의에 함께 가담했던 자라도 양심 고백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익적 진실을 알게 해주며, 사적인 이익과 무관한 고백이고, 양심이 타락할 위험에 자신의 의지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공개적인 비판에 자신을 노출했으므로, 양심고백의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라며, “진실을 알리는 양심고백은 완전무결한 인격을 가진 이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49~50쪽)라고 밝힌다. 그래도 김용철의 윤리에 대해 계속 시비를 가리고 싶은 자는, 이 발표에 대응하는 구체적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효율적 논쟁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다.
그렇다. 만약 우리가 윤리적 완전주의만을 앞세운다면, 그 누구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 사회 대부분의 문제를 개인 윤리적 차원으로만 바라보게 할 것이다. 더불어 그 윤리적 잣대를 엄격하게 우선 적용해야할 대상이 누군인지 판단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전문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 많은 코메디를 보라! J. P. 사르트르가 왜 지식인과 전문 기술자를 구분하여, 자본과 권력에 복무하는 전문가들을 조롱했는지 알 것 같다. 또 E. 사이드가 왜 전문가주의를 비판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우리사회에서 삼성의 행태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아니어도 이런저런 자료에서 삼성의 반윤리적 반공공적(反 公共的) 행태를
이미 상당 부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용철 책을 통해 그 구체적 전개 양상을 접하고 보니, 기가 막힌다.
이 정도까지인가 싶다. 글로벌이니 깨끗한 삼성이니하는 선전을 애초 믿지도 않았지만,
이건 완전 봉건 영주와 다름이 없다.
이건희 일가가 영주의 성에서 그들 가족과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개인의 문제일 것이다.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삼성은 이건희 일가의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기업과 소유자를 동일시하는 인식이 매우 강하다.
사회적 자산인 기업과 그 경영자를 구분하지 못하는데
이는 회사를 전적으로 개인 소유물로 착각하는 사고가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국가를 왕의 소유물로 인식한 왕조 시대의 사고이다.
삼성은 99%의 지분을 가진 주주들의 것일 뿐만 아니라,
온갖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고, 공적 인프라가 얽힌, 사회적 자산이다.
그 삼성의 침몰은 한국 경제의 침몰일 것이다.
항해권을 위임받은 선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피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삼성그룹 전체에서 이건희 일가가 가진 지분을 다 합쳐도 1.07% 밖에 안 되면서도,
온갖 불법으로 (사회적 자산인) 기업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더 심각한 것은 사회 공공성에 막대한 폐해를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사법, 행정, 입법부 등 국가 공공기관 전반을 돈으로 매수하여 사유화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폭력'인지를 이 책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상식을 가진 시민들의 숨 쉴 공간은 사라지고,
자본과 권력이 한 몸이 되어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은 이건희 일가의 몫 만큼만 향유하게 하자는 것,
즉 이건희 일가의 정당한 제 몫 찾아주기일 것이다.
이건희 일가가 자행하는 금권의 결탁과 타락이, 이미 통제 불능의 상태까지 왔고,
한국 사회의 공공성을 이미 심각하게 훼손해버린 그 사적 권력을
시민들이 각성하고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삼성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출세한다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한국 사회 전반에 던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위 지식전문가들이 어떤 기능을 하며 그들의 속살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 시민들은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사회지도층”이란 말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도한단 말이며 누가 지도 당한단 말인가? 모욕적이다. )
우리 사회 전문가들의 행태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도,
책을 읽어가며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페이지 페이지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300쪽 이후 약 100여 쪽은 앞 부분과 중복되는 내용이 많고 서술도 깔끔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가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에 근무하며 우리사회의 불의(不義)에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19장 「삼성과 한국이 함께 사는 길」에서 밝혔듯
이제 그가 희망하는 사회는,
그가 예전에 몸 담고 추구했던 사회와는 완전히 반대의 사회일 것이다.
그가 19장에서 밝힌 한국사회의 진단과 처방은,
한국사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상식의 수준이지만,
한국사회는 그 상식을 결코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과 권력이 막강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대중들도 이미 그 자본과 권력을 내면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대중은 바로 삼성에 분노하지 못하고, 김용철에게만 돌을 던지는 ‘당신’일 수도 있고,
다르게 말하면,
큰 것에는 분노하지 못하고 작은 것에만 분노하는,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중요한 것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손자손녀와 내 어린 딸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고민을
그와 나, 우리가, 함께 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 그 고민과 책임을 떠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딸이 사회를 고민하게 될 나이가 되어
윤리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나 혹은 정의가 패배하는 현실을 설명해야 할 상황이 오면
반드시 김용철 변호사의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 (448쪽)
우리는 나약한지라, 이기는 싸움만을 계산하고 이기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느 시대 어느 땅에서든 불의한 권력과 패배한 정의가 나뒹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진실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것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용기야말로 가장 윤리적인 자세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를 비굴하지 않게 하며,
또 수많은 패배의 역사 속에서도, 결국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