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의 탄생 돌베개 한국학총서 11
강명관 지음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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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학자 강명관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무척 인상적이었다. ‘고루한’(?) 한문학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상당히 현대적이었 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이 세련되었다거나 자료가 새롭다거나 한 것 이 아니라, 옛 서책을 대하는 그의 ‘관점’이 신선하다는 것이다. 대개    한문을 좀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현학 취미를 내세워 현대인을 경박 하다 비판하고, 자신들의 복고 지향을 내세워 현대 문화 자체를 경멸하기까지 한다.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자신을 스스로 도덕적 인간으로 규정고, 그 우월감으로 현대인들을 겁박하려는 불순한 권력 욕망도 엿보인다.   

 만약 그들 한학자들이 복고적 사회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오늘날에 적용 가능한 현대적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강명관은 옛 텍스트를 통해 ‘지금’을 말한다. 특히 옛 텍스트에 드러난 권력 관계를 오늘날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그가 언급하는 과거 자료들은 모두 지금 이 땅의 모습들과 대비되어,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에게 옛적 우리 선조들의 삶은 찬미 받아 마땅한 것으로만 읽히지 않고, 인간을 억압하는 옛 사회의 모든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지금-여기’의 삶과 유리된 학문은 쓸모없는 현학 취미일 뿐이다. 모든 학문이 현실에 바로 적용 가능한 실천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옛 것을 혹은 외국 것을 공부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 여기>의 문제와 접속되어야 한다. 지금 -여기의 삶과 무관한 지식은 그것이 아무리 상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죽은 지식일 뿐이며, 그런 단절된 앎으로는 ‘나’의 삶을 추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히 이 땅의 한학자들은 우리 선조들의 텍스트를 주로 찬양하는데 급급하고, 그런 회고적 찬양은 나를 매우 불편하게 한다. 선조들의 텍스트는 언제나 찬미 받아야 마땅한가? 특히 고전 문헌을 다루는, 그리고 외국 문헌을 다루는 자들 가운데, 지금-여기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외눈박이들이, 너무 많다. (나는 특히 한문학자들이 자신들의 한문 실력을 마치 지식과 교양의 척도인양 하는 것을 경멸한다. 일반인들이 한문 원텍스트를 독해할 필요가 없도록 번역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서양 애들이 라틴어 해석을 다 잘하는가? 학자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이 한문 해석까지 할 필요는 없다. 영어 잘 하는 무식한 인간들이 많듯이, 한문 잘하는 무식한 인간들도 많다.)   

 

 강명관의 작업은 인문학의 모범 사례이다. 학문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을 억압하는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우리가 개혁 군주로만 칭송하는 정조에 대해서도 그가 어떻게 백성을 억압했으며, 당대 사회의 한계와 함께 정조의 한계가 무엇인지도 지적하곤 하는 것처럼, 그는 언제나 인민의 시각에서 텍스트를 읽는다.  

 

 이 책의 제목이 『열녀의 탄생』이라는 것에서, 미셀 푸코의 방법론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푸코를 언급하지도 않기에, 푸코의 방법과 무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줄곧 푸코의 계보학적 방법론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자신의 주체를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푸코의 기본입장이다. 인간 주체(지식, 도덕, 앎)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권력의 전략이 행사되는데, 도처에 배치된 권력은 미세혈관처럼 세세하게 기능함으로써 인간 주체를 구성해간다는 것이다. 이 때 권력은 가시적이거나 폭력적인 물리력이 아닌, 여러 ‘담론’의 형태를 띠게 된다. 푸코는 이런 권력의 작용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계보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즉 주체를 둘러싼 관계항들을 통사적으로 훑어 내려감으로써 주체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들이 『임상의학의 탄생』, 『감옥의 탄생』, 『성의 역사』로 이름 지어진 것이리라.

  『열녀의 탄생』 역시, 여성의 의식화가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지는가를 추적한 책이다. 이 책은 <조선-남성>이 여성을 의식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열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국가의 의식화 교육이 → 여성의 내면화를 거쳐 → 여성의 자발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의식화 작업은 여성의 성적 종속을 기본으로 하고, 결국 남성에 대한 전반적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국가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국가-남성-교육이 함께 동원된다. 한 사회의 보편 의식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어떤 의도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구성되어지는 ‘구성물’임을 보여준 것이다.

 저자와 푸코를 자꾸 연결시키는 것이 저자에게 결례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우리 학계에 미셀 푸코에 대한 많은 소개와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 책처럼 우리 사회의 권력 담론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한 작업은 흔치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열녀’라면 대체로 수절하거나 정절을 위해 목숨을 버린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본 구체적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우아한 정절의 여인 이미지가 아니라, 한마디로 엽기적이었다. 이 책의 부제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라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저자는 많은 인용을 제시하는데 하나같이 끔찍한 이야기들 뿐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봉양하기, 허벅지 살을 구워 남편 먹이기, 혼인도 하기 전 사망한 남자를 따라 목 매달기, 어린 자식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사회가 요구하는 죽음으로 나아가기, 왜구의 칼 앞에 팔 다리가 잘리고, 머리가 짓이겨 죽어도 오로지 저항하기, 다른 남자의 손이 닿은 것만으로 자신의 손을 끊어내기, 자신의 육신을 고기로 팔아 남편 여비 보태주기 등등,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 잔혹함에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더구나 이런 끔찍한 행동들이 여성들 스스로 내면화한 ‘자발성’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가-남성에 의한 끊임없는 의식화 교육의 결과였다. 대단한 의식화 교육 아닌가? 조선 여성들의 신체에는 국가-남성의 언어가 깊숙하게 박혀 있는 것이다. 신체에 각인된 기표!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캉이 생각났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언어에 몰수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단지 살아 있는 시체(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기생하는 언어에 의해 덧쓰여져 있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 치명적인 운명을 스스로 주체화하여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이런 맥락에서 라캉은 분석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는 자신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의해 지배당하도록 놔둬선 안 된다”(『라캉과 정신의학』, 브루스 핑크 著, 353~354쪽)처럼,

 국가-남성의 욕망을 여성 자신의 욕망으로 의식화하기.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소외시킨 조선조 여성들. 라캉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는데, 자신의 진짜 욕망과 대면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지 않는가! ‘나’의 욕망은 누구에 의해 욕망되어지는 것일까? ‘나’의 의식 그리고 무의식은 어떻게 구성되어진 것일까? 결국 ‘나’란 무엇인가?  

 

 그래서 이 책의 의미는 조선 여성의 잔혹사를 고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결국 지금 ‘나’의 욕망과 의식 역시 상대적이고 구성되어진 역사적 산물임을 성찰하게 하는 것에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조선 시대 남성-양반 국가권력을 동원해 가부장적 욕망을 실현하는 텍스트를 여성의 대뇌에 설치하는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와 통한다. 내가 일상에서 내뱉는 언어, 어떤 사태에 갖는 태도, 나아가 나의 가치관, 미의식 등은 과연 나의 것인가? 국가와 자본은 교육과 미디어라는 권력 기구를 통해 개인을 끊임없이 제작하고 간섭한다. 그 목적은 겉으로 내건 ‘인간평등’의 원리에 반하는 인간의 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와 자본의 권력이 지향하는 바대로 한 개인의 주체성이 만들어진다. 그 개인은 국가와 자본의 욕망을 자기 대뇌에 설치하고는, 그 욕망에 따라 인간의 차별을 당연시하게 된다. (…) 이렇듯 ‘나’는 권력적 타자에 의해 제작된 존재다.” (7)  

 

 그래서 또 이 책은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담론들이 결국 어떤 모습인지를 날것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서구의 의무교육은 시민권의 확장에 따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산업 사회의 노동자 생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국가-지배계급은 교육을 통해 인민을 ‘신체-규율’ 기계로 재코드화하여 노동자를 생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래서 교육은 언제나 국가주의와 시장주의의 자장 아래 놓이게 된다. 물론 지배권력을 노동 대중이 접수할수록 당연히 교육 헤게모니의 변동도 일어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하물며 모든 책의 발행과 유통을 국가가 담당한 조선사회에서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책은 850여 쪽의 두께로 선뜻 손이 안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약 300여쪽의 주석과 부록을 빼면 본문은 500쪽 정도가 된다. 저자가 어떤 인터뷰에서 말하길, 그토록 세세하고 많은 주를 단 이유는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마초들의 공격을 의식해서 일일이 사료를 제시한 때문이란다. 저자가 수많은 사료를 추적하고 제시하고 분류한, 꼼꼼함이 돋보인다. 철저한 원문 인용과 그에 바탕한 설명은 충분히 객관적이다. 본문 읽기도 수월하여 가독성이 높아 힘든 독서는 아니다. 책의 두께에 눌리지 말고,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이다. 단지 저자가 할말이 많은 관계로 군데군데 중복된 설명이 나온다. 엄밀하고 정치한 서술이라기보다는, 자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본 개념이 반복 서술되는 곳이 꽤 있다. 물론 이것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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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2-2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학자들의 거드름 피우는 자세에 대한 파란말 님의 비판이 아주 아주 시원합니다.강명관 씨가 민족편향과 근대화 논리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도 괜찮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