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학교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이 물음은 ‘바꿀 수 없다’는 단정적 결론을 암시하거나 혹은 반대로 ‘바꿀 수 있다’는 급진적 선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두 상상에 앞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어떤 변화를 위한 것인가’하는 인식의 정립이다. 소위 좌파는, 신자유주의가 관철한 세계에서 교육은 이미 철저히 우파의 도구가 된지 오래라는 시각이다. 그런데 우파는 신자유주의를 확산 고착시키는 데에 ‘일부’ 의식화된 교사 그리고 좌편향된 교육이 장애가 된다고 한다. 교육이 자기를 배반한다고 서로 비난한다. 이 둘은 전혀 교섭하지 못한다.
애플은 평생 비판적 교육학자로 연구하고 참여한 바탕을 토대로 자기의 답을 준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꿀 수 있다’이다. 그렇지만 그는 시종 이를 쉽게 말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성공하고 실패했던 많은 사례를 제시하며 적지 않은 조건을 덧붙였다. ①우리의 차이를 서로 존중하며, ②집단적인 힘을 제공해 줄 탈중심 연합을 건설하고 지켜내며, ③그 길이 멀고 험할 것임을 각오하고, ④더 큰 프로젝트에 기반하고 있을 때만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한다. (318쪽)
하긴 평생 사회변혁을 위한 교육운동에 투신했던 저자가 ‘바꿀 수 없다’라고 한다면 이는 자기 삶에 대한 부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꿀 수 있다’고 쉽게 말하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 전세계를 관통하는 신자유주의 교육 지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그 지배의 강고함을 쉽게 부정하지는 못하리라.
애플은 파울로 프레이리에 대한 존중을 줄곧 강조하며 그의 영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많은 교육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위한 수단으로 프레이리를 호명하는 것을 비판하며, 교육현장에서 실천과 참여가 없다면 프레이리의 교육론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질문한다. 그러면서 애플은 “교조적이고 지나치게 공격적인 담론, 기계적인 제안과 분석, 역사적 특수성과 인간 행위자를 무시한 경직되고 목적론적 역사관, 소외된 계급의 세계관”(73)을 점검하자고 한다. 애플은 대중에게 시혜적인 오만함을 비판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일상을 대면하는 것에서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줄곧 강조한다. 이는 프레이리가 말한 것이기도 한데,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이해는 또다른 식민지화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3장에서 애플은 조지 카운츠의 경우를 빌려, 학교가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확신을 경계한다. 카운츠는 학교가 지역사회와 ‘연계하고 잘 조직’되지 않으면 그런 변혁의 희망은 비현실적인 것이라 한다. 카운츠는 ‘다양한 수준들에서 진지전’을 수행해야 하며, 특히 ‘혼자서 감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116).
그리고 애플은 진보적 교육자들의 ‘주입의 문제’를 언급한다. 예를 들어 존 듀이는 진보적 교육이라 해도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강제로 주입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열린 자세로 수행하는 질문법이 최상의 해결책’이라 했다. 이에 반해 다른 이들은 ‘학생들에게 현존하는 지배계급의 가치와 지식들을 비교 검토하게 해야 하고, 그 후에 더 적절한 가치를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진보적인 교육의 ‘방법론’에서 불일치가 있었다(120~121).
어쩌면 질문의 방식을 익히게 하고 스스로 비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이라는 점에서는 존 듀이의 방법이 옳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존 듀이의 방법이 도덕적일지는 모르나, 이 방식으로 저항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지배계급의 의식화 교육은 매일매일 명시적/암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폭포처럼 쏟아 붓는 이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는 듀이의 원론적인 방법은 너무나 한가한 소리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교사들이 교실에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갖가지 비판/비난을 저항교육으로 여기는 것은 더더욱 천박하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지배권력의 헤게모니가 학교 교육과정과 학교생활에서 어떻게 관철되는지를 학생들의 언어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훈련을 교사와 함께 연습해야 한다. 이는 어느 정도 교사의 단정과 주입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교사-학생의 상호 대화와 비판의 공간을 열어두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교사의 ‘주입’에 대응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기에 교사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계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공유하고 비판하는 수업의 방법론에서 동지적 관계를 느끼게 해야 한다. 실제로 학생들은 예민하게 느낀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말이다.
애플은 카운츠가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학교·교사·학생은 다양하고 중충적이고 모순적인 정치적 신념들을 갖고 있다(130). 그래서 애플은 한 곳에 묶이지 않고 여러 이익집단들이 “탈중심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줄곧 강조한다. 그렇다. 세상은 선과 악처럼 이분법적이지 않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집단은 서로의 이익이 만나는 지점에서 연합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일시적 전술이라도 말이다.
4장에서 듀보이스와 우드슨의 경우를 앞세워 학교에서 흑인교사들/여성교사들이 마주한 복잡한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애플은 ‘다양성에 대해 열린 인식과 사소한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강조한다. 그래야 ‘더 풍부하고 더 다양한 우리’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지배를 중단시키는 전략이라고 한다(191).
5장에서는 교육이 사회를 변화시킨 사례로,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를 든다. ‘주민참여행정’과 ‘시민학교’를 소개하며, 민중들과 어떻게 밀착 연결하여 사회적 관계를 구축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포르투알레그리가 이룬 성과가 정권이 바뀌어도 바로 예전의 패턴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듯이, 그 원리는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의 원천은 “교사들이 학교에서 민주적인 우선성을 두고 삶을 살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들이 학생들과 지역사회와 같이 교육과정을 만들 때, 지속적인 진정한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
6장에서는 반대로, 보수 우익이 교육을 이용해 사회를 변혁시킨 사례를 제시했다. 미국의 월마트가 기독교 논리와 결합해 자유기업정신을 어떻게 확산시키는지를 살펴본다. 그들은 ‘매일 일상의 대중들의 구체적 이해를 체화’하는 방법으로, 대중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도움을 준다는 의식을 대중에게 심어주고 있다. 물론 저자는 월마트의 경영을 옹호하지 않지만, 사회변혁을 위한 월마트의 여러 방법론은 배울 점이 있다 한다.
7장에서는 애플이 한국에서 경험한 사례를 제시한다. 한국 대학 강연과 정부기관원에 압박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운동은 위험을 감당해야하는 것이고 또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특히 전교조 결성과 관련된 것 같은데, 역자가 후기에서 말하듯 한국인에게는 그리 ‘주목할 만한’ 경험도 아닌 것을 미국인 학자에게는 ‘강렬한 사건’이었을 테다. 이 모든 것을 거쳐 그는 마지막 8장에서 교육은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이 글 앞머리에 정리했듯이 몇 가지 조건을 덧붙여 말이다.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물론 이에 앞서, 물어야 하는 것은 애플이 줄곧 지적한 것처럼, 누구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일 터인데, 지배권력의 입장에서는 교육이 사회를 충분히 바꾸어(지배해) 왔지 않던가! (물론 그들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지만!) 그런데 나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답해야할 텐데, 어떤 답을 하더라도 수많은 반론을 마주할 것이다.
내 어릴 때 기억을 되살려보면, 초등학교부터 수많은 국가주의 교육의 세례를 받았다. 집단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철저히 복종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았다. 이는 중고등학교에서도 다르지 않았는데, 성적에 따른 서열화가 오히려 추가되었다. 정치적으로 유신시대부터 80년대 초중반 군사 독재정권까지, 교육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이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판적 사고를 멈추지 않았고 순종하지도 않았다. 비판적 독서와 비판적 대안을 모색했고 수많은 저항을 촉발했다. 지배권력이 주입한 지배의 언어를, 대중은 저항의 언어로 대체했다.
어떻게 이 전환이 가능했을까? 지배의 언어세례를 받은 내가 어떻게 점차 지배에 어긋나는 언어로 점진적인 균열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아마 글을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면 이런 변혁은 불가능했으리라. 지배집단이 대중에게 ‘언어/글’을 쥐어주면서 강제했던 ‘국민교육’이었지만, 대중은 이를 변혁의 도구로 삼았다. 그래서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제3세계에서 변혁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가 낮은 문맹률 때문이라 한다면, 이는 너무 단순한 진단일까?
그렇지만 반대의 증언도 가능하다. 지금 박근혜 정권의 퇴행과 억압을 동조/강화하는 수많은 대중은, 바로 우리가 받은 ‘국민교육’의 결과이기도 하다. 국가주의와 반공주의 교육에 길들어진 대중의 자기확신이 대중의 억압에 스스로 동조하고 있다. 교육의 무서운 생명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사회를 변혁시킨다기보다는 억압사회 자체다.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 가능성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주장과 반론과 희망이 뒤섞일 화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계산하는 것보다 ‘단지 나아가는 것’뿐이다. 포기와 절망을 허락하지 않는 교사의 의지만이 삶의 자세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