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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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 대해 단 한 권을 고르라면, 나는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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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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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성역할을 전도시켜, 현재의 가부장제 사회를 낯설게 보게 한다. 그래서인지 1부 도입부에는 가독성이 떨어졌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름들, 오직 서술과 행동에 의해서만 성별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사건의 진행을 빨리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이는 현실에서 우리가 사람의 이름만으로 성별을 즉각 인지하면서, 그 성별 선입견에 의지해 사건을 이해해 왔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할 테다.

(여성)이 직업수행과 출산 등에서 맨움(남성)을 희생시키며 사회를 지배한다는 발상은 일차원적인 상상력일 수 있다. 그런데 곳곳에 기발한 상상과 세밀하게 배치된 언어들이 소설을 풍성하게 해 준다. 맨움의 작은 페니스와 뚱뚱한 몸이 매력이라는 이갈리아의 미적 관점은, 현실 세계 남성 페니스 신화와 여성의 날씬한 몸에 대한 전도적 비판으로, 웃음을 머금게 했다. 맨움의 페호 착용이라는 기발한 상상력은 놀라웠다. 대머리와 털 난 가슴이 맨움의 생물학적 열등성을 증거하고, 생리와 출산이 움의 우등성을 증거하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성별 인지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의 결과라는 것을 강변한다.

교사인 노총각 올모스의 수업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는 맨움 억압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수업에서 적극 드러내지 못하는데, 이는 교장권력의 개입과 맨움조차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 “언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해. 그러면 움들이 사회를 통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든 말들을 체계적으로 뿌리 뽑을 수 있을 테니까.” ”(210)처럼 이갈리아의 언어(의식)은 철저히 움을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1부는 곳곳에 뒤바뀐 성역할에 따른 세부 서술이 독자로 하여금 낯선 경험을 하게 한다.

 

2부는 훨씬 쉽게 읽힌다. 성억압을 깨닫고 해방 운동을 결심한 페트로니우스의 결단과 각종 실천이 서술되어 있다. 맨움 해방을 위한 실천과 이론의 팜플랫이기도 하다. 현실세계의 여성해방 운동의 그것처럼! 그래서 오히려 쉽게 읽힌다.

특별한 것은 스파크스주의(마르크스주의 계급투쟁 역사관)와의 관계였다. 노동자 계급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보다 맨움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훨씬 더 지독하고 극단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성적 억압이 계급 억압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극심하기 때문일 거야”(247) “스파크스주의는 오직 계급 적대에 대해서만, 그리고 갑싼 노동력의 착취에 대해서만 말한다.”(367)

마르크스 이론에 기댄 계급해방보다 성해방이 더 근본적 해방이라는 선언이다. 이는 페미니즘 논쟁에서 항상 일어나는 계급해방과 성해방의 충돌 혹은 선후 다툼에, 성해방을 분명하게 앞세우는 것이다. 이는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는 입장이다.

여러분들이 목격한 것은 성적 반란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제적 불공평에 대한 하나의 반란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자립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당신들의 성적 노예가 되도록 강요받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섹스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들이 경험하는 성적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우리의 반란을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맨움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은 노예 반란입니다. 노예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하는 것은 노예 국가의 특징입니다. 노예는 주인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열심히 일하고 노예 주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주인은 사회적 기생충이며 노예는 실제로 사회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319~320), 오히려 맨움 해방이 곧 계급해방을 아우르는 것으로 선언한다. 맨움이 움에 의존하지 않고 해방되는 것은, 맨움의 노동을 주체적으로 세우고 확보하는 것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움이야말로 맨움에 기생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사회적 차별은 가장 개인적인 것 즉 성관계 방식과 맞닿아 있다. 갑자기 그들은 너는 성관계를 어떻게 하니?”라는 단순한 질문이 사회가 총체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265)처럼 곳곳에 서술되는 맨움과 움의 성관계 양상(움이 맨움을 지배하는 관계)이 사회 지배 방식임을 간파하고 있다.

또 동성애도 시종 다루고 있다. 움들이 아름다운 요트와 움 전용 클럽과 회사에서, 스포츠 경기장에서 그들의 신성한 자매애를 추구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동안에 말이에요. 그래서 신체적으로 동성애자인 것과 정신적으로만 동성애자인 것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구요. 왜냐하면 내게는 움들이 서로 사랑하고 맨움을 경멸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모두 동성애로 보이기 때문이에요”(341) 맨움과 동성애자는 소수자 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질 뿐 아니라, 성별 구분 자체를 무화(無化)시키는 전위성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차별이든 동성애든 모든 억압의 해방은, 억압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억압의 언어를 정당한 것으로 주입하고, 피억압자도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맨움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맨움들 자신이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299)처럼, 여성 억압은 결국 여성의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억압은 그 억압이 정당하다는 사회적 상식, 즉 피억압자의 동의 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해방은 의식 해방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1975년 발간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이런 전복적인 발상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성차별과 해방에 대한 고단한 성찰없이는 불가능할 테다. 이 소설이 단지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뒤바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폄훼도 있겠지만, 곳곳에 배치된 기발한 언어와 발칙한 상상은, 가부장제에 익숙한 우리 감각을 흐트러 놓기에 충분하다. 성차별과 억압을 , 이론언어로 접하는 것보다 소설언어로 접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다. 그만큼 생경/생생하고도 구체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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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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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전기를 읽는 것을 본 직장동료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낸다. 누구나 아는 사람인데 뭘 새삼스레 전기까지 찾아 읽는가 하는 표정이다. 헬렌 켈러, 초등학생조차 익히 아는, 장애를 극복한 위인. 시각, 청각, 그리고 목소리까지 잃어버려 소통의 문이 완전히 닫힌 상태에서, 기적처럼 다시 세계를 찾은 聖者.

그런데 오래전, 헬렌 켈러가 장애극복 후에 무엇을 한 지에 대한 짦은 기사에서, 그녀가 사회운동가, 특히 사회주의자로 활약하며 미국 사회에 비판을 일삼았기에 FBI의 감시대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다. 나는 아니 우리는 장애를 극복한 후에 그녀가 무엇을 한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헬렌 켈러는 장애를 극복한 후에, 대중의 삶에 바탕해 노동투쟁과 여성참정권과 전쟁반대를 외쳤다. 사회주의당 당원이었으며, 파업을 지지했고, 사회주의자 대통령 후보였던 유진 뎁스를 지지했다. “잔학한 자본가들에게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이겨내려는 자신의 투쟁과 비슷하다고 여겼”(279)사회주의자만이 사회의 불평등과 도시 빈민촌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287)

놀랍지 않은가? 이런 사회주의자로서의 헬렌을, “단지 그녀를 기적을 일으킨 장애인 여성으로 남겨두려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운 일이었다”(278) 헬렌의 사회활동을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 앤 설리번과 헬렌의 가족들조차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들은 헬렌이 장애를 극복한 미담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기를 바랬고, 사회적 논쟁에 휩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헬렌의 자본주의 공격이, 자본가들의 후원으로 유지되는 헬렌의 재단과, 핼렌과 그 주변 사람들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헬렌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자본가의 후원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순에 처해 있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헬렌의 사회주의 경도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주입한 결과일 뿐이라며, 헬렌의 언행을 폄하하곤 했다. 왜냐하면 헬렌이 접하는 모든 정보는 앤 설리번과 주변 사람들과의 수화로만 가능했기 때문에 그렇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이다. 그런데 정작 헬렌이 앤 설리번 선생을 평가한 대목을 보면, “선생님은 여성 참정권론자가 아니었다. () 우리는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89) 고 한다. 물론 헬렌이 주변 사회주의자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주변에 영향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헬렌을 주체적, 사회적 인격으로 인정하지 않는 주류 사회의 시선이 늘상 따라 다녔던 것도 부정할 수도 없다. 신체 장애를 극복한 헬렌이었지만, 사회 소통에서 또다른 차원의 장애와 마주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 교류한 헬렌을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때도 FBI가 조치하지 않았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녀를 불순분자로 몰아붙이면 (FBI) 대중의 신임을 잃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란다. “헬렌이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지만 국가 안보에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456). 내 생각엔 FBI의 이런 조치들이, 헬렌의 사회주의 활동을 역사적으로 부각시키지 않는 역설의 효과를 초래한 것 같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았기에, 헬렌은 장애를 극복한 성자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헬렌은 민중적 세계관을 지지했지만, 대중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헬렌은 대중과 접촉하는 일반칸 기차여행을 즐거워했지만, 대통령에서부터 유명인들에 둘러싸이곤 했다. 헬렌의 대중 접촉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기 일쑤였다.

위인전은 한 사회 속에서 살았던 사람을 박제화하는 폭력을 자주 행한다. 사회와 시대를 극복한’(?)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어, 숭고의 표상으로만 삼는다. 그래서 그 인간의 사회적 맥락이 삭제되고, ()의 결핍과 불안과 나약함도 잊힌다. 그래서 간디의 소아성애나 테레사 수녀의 병적 강박과 정치적 무지도 덮이고 오직 무결점의 인간으로만 聖化된다. 위인전의 해악이다. 유아와 청소년 대상의 위인전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이유다.

오늘날 헬렌 켈러를 소환하는 주된 이유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 때문인데, 이는 아무리 칭송되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성공 담론이 개인 노력에 의한 개인 성과로만 수렴되는 경향은 위험하다. 헬렌이 지난한 장애를 극복했듯이, 당신의 장애도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는 것,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무능 때문일 수 있다는 함의를 갖게 하기에 말이다. 그리고 헬렌의 사회적 발언과 실천 역시 시종 폄하되었는데, 이 역시 장애인을 대하는 이중적 태도이다. 사회는 삼중의 장애를 극복한 헬렌은 칭송했지만, 헬렌의 세계관은 삼중의 장애 때문에 결함있는 것으로 덧씌웠다. 장애인의 사회적 발언을 인식 장애로 매도했다.

장애인의 장애극복은 휴머니즘에 헌신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덧붙여, 장애인이 어떤 사회적 실천을 했는가도 함께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를 극복한 헬렌 못지않게, 사회 개혁에 매진한 헬렌도 부각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언제나 시대의 주류권력자들은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것만을 칭송할 뿐이다. 헬렌을 위대한 개인으로만 박제했고, 사회개혁가의 헬렌은 봉해 버렸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위대하기만 한 인간도 있을 수 없다. 삶에 수반되는 결핍과 불안 때문에 인간은 결함과 혼란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 헬렌과 앤 설리번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앤 설리번이 헬렌의 가정교사로 온 것은 박애주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생계 때문이라는 것, 빈민구제소에서 동생을 읽고 비참한 환경에서 형성된 성격적 결함, 헬렌을 독점하려는 지배욕과 독선적 태도, 그 자신 시력을 잃게 되는 참담함 등 이 모든 것이 설리번의 정체성이 되었다.

또 대중은 헬렌을 지고지순하게 여겼지만, 헬렌 자신은 이성적 육체적 사랑을 갈구했고 어머니와 소원했으며 자기를 돌봐주는 주변 사람들과 갈등에 휩싸이곤 했다. 이것이 인간이다. 너무도 당연히! 이런 삶의 과정에서 설리번과 헬렌은 필요에 의해 서로 의지하면서 또 이용한 이중적 관계였다. 설리번과 헬렌, 각자의 결함만큼 그들 서로의 고통도 컸던 것이다. 자기 삶을 이끈 설리번에 기대어 헬렌도 자기 삶을 끌어낼 수 있었기에, 헬렌이 위대한 만큼 설리번도 위대하다. 교육자의 힘뿐 아니라, 결함과 결핍도 학생에게 함께 묻어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장애극복 이후 헬렌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의 대부분은 헬렌의 장애극복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 문제들을 서술하고, 사회참여는 28개의 장 가운데 두 장에서만 짧게 다루고 있다. 역시나 헬렌의 장애극복과 그 후 일생을 이어가는 장애극복운동이 주가 되어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물렁한 독서였고, 내 목적에 비하면 많이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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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 그늘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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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황석영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지만 전투보다는 후방 근무를 한 까닭에, 소설 역시 PX를 둘러싼 물자 유출에 중점하고 있다. 미군 PX에서 유출되는 물건이 암시장을 통해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통해, 미군의 군산복합체 성격 혹은 경제 제국주의로서의 미국을 통찰하겠다는 취지인 것 같지만, 빈약한 경험으로 거대 서사를 시도하는 무리가 곳곳에 느껴졌다. ‘고작한국군 상병인 안영규가 거대 암조직에 맞서 베트콩으로 흘러나가는 무기거래를 파헤친다는 설정이, 헛헛한 얼개로 느껴졌다.

 미국이 2차 세계 대전보다 많은 폭탄을 소진한 베트남 전쟁에서, 고작 미군 식량인 씨레이션을 대단한 미군 물자로 삼고 시종 긴장을 끌어내려는 서술이, 블랙마켓의 야채 등을 둘러싼 전개를 거대 서사에 접목하려는 불균형이, 그것도 한군국 상병(안영규)이 중심이 되어 이 거대 전모에 접근한다는 설정이, 내게는 설득력도 흡입력도 없었다. 유약하던 팜 민이 키엔 중위와 협상하는 장면에서 일시에 능란한 전문 협상가로 서술되는 생뚱함(160),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대화법이 생략과 암시의 스타일로 일관하는 점, 결말에 비해 너무 긴 소설 분량 등 곳곳이 매끄롭지 못하다.

 그런데 이런 서사의 결함과는 별개로 중간중간 삽입된 보고서(강간과 미라이 학살, 어린 베트콩의 고문과 살해 등)에서 오히려 베트남 전쟁의 참혹함이 더 드러났다. 작가가 이처럼 전쟁의 끔찍한 묘사나 참혹함을 부각하는데 급급해 전쟁의 본질을 놓치기보다는 전쟁의 배후와 핵심에 접근하려 했다는 의견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이 의견 역시, 작가의 제한적인 경험을 만회하려는 소설적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소설이 군산복합체로서의 전쟁본질을 드러내는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저 피의 밭에 던진 달러, 가이사의 것, 그리고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 곰팡이꽃, 달러는 세계의 돈이며 지배의 도구이다. 달러, 그것은 제국주의 질서의 선도자이며 조직가로서의 아메리카 신분증이다.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군대와 정치적 힘 보태기, 다국적 기업망의 그물로 거두어진 미국 자본의 기름진 영양 보내기(290)처럼, 작가가 결말 부분에 총정리하듯, 미국 자본의 세계지배를 베트남 전쟁의 본질로 제시한다.

 아쉬운 서사 밀도와는 별도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 능력은 주목할만 하다. 남베트남 정부군과 베트콩으로 갈리는 팜 형제와 구엔 형제의 설정 등 소설 초입부터 결말을 얽어매는 작가 솜씨는 녹록치 않다. 또한 이 소설이 발간된 당시에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것들 중에는 이 소설이 매우 앞서는 것이었다. 지금 2021년에는 베트남 전쟁 관련 자료들이 그나마 있지만, 당시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 소설의 기초가 된 난장(亂場)1978년 연재로 완결되고, 1988무기의 그늘로 재편되었다 하니, 그 시대성은 매우 앞서는 것이다. 지금도 이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80년대 전후의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은 오직 반공과 경제논리로만 규정되었고, 다른 의견이나 상상은 없었던 시대 아니었던가. 이는 소설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도 그대로 지적된다.


처음 발표되던 무렵만 해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은 파병의 정당성을 강변한 정권의 통제로부터 한치도 자유롭지 못했으며, 사태의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최소한의 문제제기도 공론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그늘은 당시까지 베트남 전쟁에 관해 공유된 국내외의 지배적 편견을 일소하고 전생의 실상을 최대한의 객관적 시각으로 조명한 값진 성과(353)라는 임홍배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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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우 나루터 아시아 문학선 14
응웬 옥 뜨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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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웬 옥 뜨은 베트남 젊은 작가 중 최고로, 베트남 문학의 미래라고도 하는 작가란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번역를 선택했다면 그만한 위상을 갖는 작가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술이 매끄럽지 못하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이 갑자기 훅 건너뛰는 느낌이랄까. 번역자 하재홍이라면 호치민 대학에서 수학한 전문 번역가이기에, 번역문제보다는 작가의 스타일로 짐작한다. 응웬 옥 뜨의 대표작인 중편 끝없는 벌판이 그나마 일을 만하고, 나머지 글들은 사건의 메모처럼 단편적이고 평이하다.

 작가 반 레와 응웬 옥 뜨 읽기로 베트남 문학의 위상을 가늠해 본 기회였다. 대체로 초판본 수백 권도 소화하지 못하는 베트남 출판 시장의 열악함을 생각하면 또 아시아 다른 나라 역시 베트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면, 우리의 출판시장과 독서문화에 그나마 안도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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