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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헬렌 켈러 전기를 읽는 것을 본 직장동료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낸다. 누구나 아는 사람인데 뭘 새삼스레 전기까지 찾아 읽는가 하는 표정이다. 헬렌 켈러, 초등학생조차 익히 아는, 장애를 극복한 위인. 시각, 청각, 그리고 목소리까지 잃어버려 소통의 문이 완전히 닫힌 상태에서, 기적처럼 다시 세계를 찾은 聖者.
그런데 오래전, 헬렌 켈러가 장애극복 후에 무엇을 한 지에 대한 짦은 기사에서, 그녀가 사회운동가, 특히 사회주의자로 활약하며 미국 사회에 비판을 일삼았기에 FBI의 감시대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다. 나는 아니 우리는 장애를 극복한 후에 그녀가 무엇을 한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헬렌 켈러는 장애를 극복한 후에, 대중의 삶에 바탕해 노동투쟁과 여성참정권과 전쟁반대를 외쳤다. 사회주의당 당원이었으며, 파업을 지지했고, 사회주의자 대통령 후보였던 유진 뎁스를 지지했다. “잔학한 자본가들에게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이겨내려는 자신의 투쟁과 비슷하다고 여겼”(279쪽)고 “ 사회주의자만이 사회의 불평등과 도시 빈민촌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287)
놀랍지 않은가? 이런 사회주의자로서의 헬렌을, “단지 그녀를 기적을 일으킨 장애인 여성으로 남겨두려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운 일이었다”(278) 헬렌의 사회활동을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 앤 설리번과 헬렌의 가족들조차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들은 헬렌이 장애를 극복한 미담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기를 바랬고, 사회적 논쟁에 휩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헬렌의 자본주의 공격이, 자본가들의 후원으로 유지되는 헬렌의 재단과, 핼렌과 그 주변 사람들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헬렌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자본가의 후원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순에 처해 있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헬렌의 사회주의 경도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주입한 결과일 뿐이라며, 헬렌의 언행을 폄하하곤 했다. 왜냐하면 헬렌이 접하는 모든 정보는 앤 설리번과 주변 사람들과의 수화로만 가능했기 때문에 그렇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이다. 그런데 정작 헬렌이 앤 설리번 선생을 평가한 대목을 보면, “선생님은 여성 참정권론자가 아니었다. (…) 우리는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89) 고 한다. 물론 헬렌이 주변 사회주의자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주변에 영향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헬렌을 주체적, 사회적 인격으로 인정하지 않는 주류 사회의 시선이 늘상 따라 다녔던 것도 부정할 수도 없다. 신체 장애를 극복한 헬렌이었지만, 사회 소통에서 또다른 차원의 장애와 마주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 교류한 ‘헬렌을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때도 FBI가 조치하지 않았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녀를 불순분자로 몰아붙이면 (FBI가) 대중의 신임을 잃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란다. “헬렌이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지만 국가 안보에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456쪽)다. 내 생각엔 FBI의 이런 조치들이, 헬렌의 사회주의 활동을 역사적으로 부각시키지 않는 역설의 효과를 초래한 것 같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았기에, 헬렌은 장애를 극복한 성자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헬렌은 민중적 세계관을 지지했지만, 대중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헬렌은 대중과 접촉하는 일반칸 기차여행을 즐거워했지만, 대통령에서부터 유명인들에 둘러싸이곤 했다. 헬렌의 대중 접촉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기 일쑤였다.
위인전은 한 사회 속에서 살았던 사람을 박제화하는 폭력을 자주 행한다. 사회와 시대를 ‘극복한’(?)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어, 숭고의 표상으로만 삼는다. 그래서 그 인간의 사회적 맥락이 삭제되고, 그(녀)의 결핍과 불안과 나약함도 잊힌다. 그래서 간디의 소아성애나 테레사 수녀의 병적 강박과 정치적 무지도 덮이고 오직 무결점의 인간으로만 聖化된다. 위인전의 해악이다. 유아와 청소년 대상의 위인전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이유다.
오늘날 헬렌 켈러를 소환하는 주된 이유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 때문인데, 이는 아무리 칭송되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성공 담론이 개인 노력에 의한 개인 성과로만 수렴되는 경향은 위험하다. 헬렌이 지난한 장애를 극복했듯이, 당신의 장애도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는 것,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무능 때문일 수 있다는 함의를 갖게 하기에 말이다. 그리고 헬렌의 사회적 발언과 실천 역시 시종 폄하되었는데, 이 역시 장애인을 대하는 이중적 태도이다. 사회는 삼중의 장애를 극복한 헬렌은 칭송했지만, 헬렌의 세계관은 삼중의 장애 때문에 결함있는 것으로 덧씌웠다. 장애인의 사회적 발언을 인식 장애로 매도했다.
장애인의 장애극복은 휴머니즘에 헌신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덧붙여, 장애인이 어떤 사회적 실천을 했는가도 함께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를 극복한 헬렌 못지않게, 사회 개혁에 매진한 헬렌도 부각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언제나 시대의 주류권력자들은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것만을 칭송할 뿐이다. 헬렌을 위대한 개인으로만 박제했고, 사회개혁가의 헬렌은 봉해 버렸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위대하기만 한 인간도 있을 수 없다. 삶에 수반되는 결핍과 불안 때문에 인간은 결함과 혼란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 헬렌과 앤 설리번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앤 설리번이 헬렌의 가정교사로 온 것은 박애주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생계 때문이라는 것, 빈민구제소에서 동생을 읽고 비참한 환경에서 형성된 성격적 결함, 헬렌을 독점하려는 지배욕과 독선적 태도, 그 자신 시력을 잃게 되는 참담함 등 이 모든 것이 설리번의 정체성이 되었다.
또 대중은 헬렌을 지고지순하게 여겼지만, 헬렌 자신은 이성적 육체적 사랑을 갈구했고 어머니와 소원했으며 자기를 돌봐주는 주변 사람들과 갈등에 휩싸이곤 했다. 이것이 인간이다. 너무도 당연히! 이런 삶의 과정에서 설리번과 헬렌은 필요에 의해 서로 의지하면서 또 이용한 이중적 관계였다. 설리번과 헬렌, 각자의 결함만큼 그들 서로의 고통도 컸던 것이다. 자기 삶을 이끈 설리번에 기대어 헬렌도 자기 삶을 끌어낼 수 있었기에, 헬렌이 위대한 만큼 설리번도 위대하다. 교육자의 힘뿐 아니라, 결함과 결핍도 학생에게 함께 묻어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장애극복 이후 헬렌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의 대부분은 헬렌의 장애극복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 문제들을 서술하고, 사회참여는 28개의 장 가운데 두 장에서만 짧게 다루고 있다. 역시나 헬렌의 장애극복과 그 후 일생을 이어가는 장애극복운동이 주가 되어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물렁한 독서였고, 내 목적에 비하면 많이 아쉬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