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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818년 ‘조제프 자코토’라는 프랑스 학자가 네덜란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토대로, 자크 랑시에르가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전개한 책이다.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몰랐고 네덜란드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가르치고 배움이 일어나기 위한 언어/매개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이 출간되었고, 이 책을 중간에 두고 수업이 이루어졌다. 수업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자코토가 한 일이라고는 학생들 스스로 그 책을 되풀이 읽고 외우도록 한 것뿐이다. 물론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학습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은 채, 학생이 배운 것을 써보라고 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있었다. 학생들은 작가 수준의 프랑스어를 구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코토는 전통적인 교수-학습의 관점을 뒤집는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책을 설명한다는 것은, 학생이 ‘글’로 적힌 책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로 된 설명은 이해할수 있다는 전제에 바탕하는데, 이는 ‘글’보다 ‘말’이 특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설명하는 것, 그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또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설명의 논리는 무한 퇴행의 원리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설명을 설명해야하는 지점을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그 설명자일 수밖에 없다. 즉 스승(설명자)의 절대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전통적 교수-학습법의 기본관계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떤 스승의 설명 없어도 모국어를 모두 잘 배우듯이, 자코토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설명자의 논리’를 뒤집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내는 허구다.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즉 설명자가 무능한 자를 그런 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먼저 상대가 혼자 힘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음을 그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다. 그것은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똑똑한 자와 바보 같은 자로 분할되어 있는 세계의 우화인 것이다.”(19쪽)
자코토는 이러한 ‘유식/무지, 유능/무능’ 등의 구분이야말로 “바보 만들기”라고 한다. ‘이해한다’는 말이야말로 누군가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 말은 세계를 둘로 쪼개는 위계, “지능의 세계에 세워진 위계에 복종”하는 것이 된다. 자코토는 자신이 학생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학생들 스스로 익혔다는 사실에서, 배움에 어떤 다른 지능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모든 문장, 결국 그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모든 지능은 같은 본성에 속한다. 이해하는 것은 번역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텍스트에 상응하는 것을 주는 것이지 그것의 이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글로 쓰인 페이지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른 지능, 즉 설명자의 지능 작업이 필요한 이중의 바탕도 없다. 스승의 언어, 언어의 언어-어떤 텍스트에 왜 그ㅡ 단어와 그 문장이 쓰였는지 그 이유를 말하는 권력을 가질 단어와 문장-도 없다”(24~25쪽)
즉 평등하다는 것이다.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29쪽)이라며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한다. 이것이 바로 “해방하는 스승”이다. 자코토가 했던 것은 학생을 이해시키는 설명이 아니라, 자코토의 지능을 그 일에서 빼냄으로써, “학생들의 지능이 책의 지능과 스스로 씨름하도록 내버려”(30쪽)둔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에서 “지능과 의지가 서로 분리되고 해방”된 것이다. 즉 스승이 자신의 지능(설명)을 학생의 지능(이해)와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학생의 의지 (스스로 이해하겠다는 의지)와 관계한 것이다. 스승의 의지가 학생의 의지(학생의 지능이 책의 지능과 대결하려는 의지)와 관계한 것이다.
자코토[랑시에르]는 한 지능이 다른 지능에 종속되도록 하는 것은 ‘바보 만들기’라 한다. 이 예속을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해방/해방하는 스승이라는 것이다. 해방하는 스승이냐/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무지한 스승이냐/유식한 스승이냐에서 전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의 고유한 지능을 사용하도록 강제한다면, 우리(스승이든 부모든)는 우리(무지한 스승)가 모르는 것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무지한 자는 스승이 모르는 것을 홀로 배우게 될 것”(34~35쪽)이다.
이는 기존의 대부분 교육학과 교육논리를 뒤집는 것이다. 옮긴이가 해제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은 모두 불평등을 축소하거나 평등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세계 인식을 보인다. 그런데 랑시에르[자코토]는 이와 반대로 평등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지적 능력의 평등은 교육에서 하나의 공리로 보며, 이를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정치적 문제로 옮아간다. 즉 랑시에르는 평등에 대한 사유를 중요하게 제기한다. 진보란 지능의 불평등을 가정하고 이를 축소하겠다는 논리가 아니라, 지능의 평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은 실현해야할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상정한다.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투쟁이 아니라 평등을 가정하지 않고는 정치자체를 발명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이 다른 이들과 평등하게 말하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공통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경험을 자신의 정치적·철학적 사유로 발전시키지만 상당히 근본주의적인 느낌이 든다. 자코토의 특별한 경험을 교육과 정치와 철학으로 확장하는 랑시에르를 ‘철학하는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야말로 관념적이고 극단적인 사유의 결과일 거란 생각도 든다. 사유를 계속 밀어붙이고 확장하는 것 자체가 관념이고 근본주의적이니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1장에 있고, 2장도 어느 정도 읽을 만은 했다. 그런데 자코토의 경험을 정치적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는 3장, 4장, 5장은 정말 읽기가 괴롭다. 어느 정도 난해한 철학책을 읽어왔지만, 이 부분은 의미의 연결도 통찰도 다가오지 않는다. 번역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랑시에르의 ‘빈약함’ 때문으로 여겨진다. 자코토의 경험을 랑시에르가 정치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려는 것이 억지로 여겨지는 부분이고, 그래서 석학들도 때로는 이렇게 조잡한 글을 쓰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