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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한나 아렌트는 여전히 쉽지 않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한 그의 문체와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의미에 독자는 당혹스럽다. 그런 아렌트를 친절하게 소개하는 책이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다.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한다는 제목은 다분히 상업적이지만, 요즘 아렌트가 다시 주목받으며 곳곳에 회자되는 만큼 아렌트는 지금 이 시대에 중요한 철학자다. 저자는 아렌트를 우파 자유주의자로 설명하며, 그런 아렌트가 좌파의 주목을 받을 만큼 중요해진 것은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에서 전체주의를 전근대적 야만이 아니라, 서구 사회의 근대화와 대중의 정치참여가 이루어지는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기인하는 문제(41)라고 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우리’라는 의식을 확인하는데, 서구사회가 자기 안에 섞여 있던 유대인을 적으로 설정하면서 ‘국민국가’를 형성해 갔다고 한다. 이런 반유대주의는 특정 국가나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현상이었는데,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더욱 확장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국민국가>의 형성→이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발달→<제국주의> 정책이 전체주의의 기원이 되었는데, 특히 제국의 기반을 이루는 ‘국민국가’의 쇠퇴와 위기가 전체주의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58) ‘구성되지 않은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 ‘세계관 정당’(현실적 이익에 호소하지 않고 세계관적 원리에 호소하는 정당=나치스, 파시즘, 볼세비즘)이 출현하여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전체주의는 현실 세계의 불안이나 긴장감을 견딜 수 없게 된 대중이 도망갈 수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공상세계를 구축한다. 총체적인 공상적 세계 안에서 대중은 편안함을at home 느낄 수 있다. 다만 이 공상적 세계는 전면적으로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상당히 왜곡시킨 형태로 가공됨으로써 전체주의적 공상의 기반이 된다.”(63)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고대의 인간관을 기준 삼아 인간의 조건을 ①노동labor ②작업work ③행위action의 세 가지로 제시한다. 이 때 ‘노동’과 ‘작업’은 다른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도 수행할 수 있지만, ‘행위’는 다른 인격을 전제하고 작용하는 것이다. 즉 아렌트는 복수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복수성(plurality)의 이해를 중요하게 강조한다. 복수성이란 사람들 사이in-between의 공간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 사이의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다양한 행위의 여지를 없애는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 다양한 행위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찾는다. 바로 사적private 영역과 공적public 영역의 분리다. <공적영역>이 ‘행위’에 의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유로운 영역이라면, <사적영역>은 물리적 폭력이 지배하고 식사나 생식처럼 생물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이다.(112) 아렌트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은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지, 사적인 공간을 인간다움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공적영역에서 복수성을 인정하며 다양한 가치관을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고대의 폴리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만인에게 인권을 부여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해온 서구시민사회가 대중사회적인 상황에 빠져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전체주의를 배태”(134)하게 되었다 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행위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자유를 말하며, 외적 장애물만 제거되면 사람들이 자유로운 상태가 될 것이라는 해방사상을 경계한다. 그래서 『혁명론』에서, 이런 공화주의를 정착시킨 미국 독립전쟁을 높이 평가하고, 선천적 인간성을 해방시킨다는 프랑스 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144) 그에게 해방이 곧 자유는 아닌 것이다.
이런 해방의 정치는 대체로 공감의 정치에 기초하는데, 아렌트는 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아렌트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을 인간적이고 올바른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배타적 가치관으로 기울어 사회의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153)
이렇게 약자에 대한 공감을 원동력으로 하는 해방의 정치는,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 스탈린주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 폴 포트처럼 철저하게 불순분자를 숙청하게 된다. 아렌트는 행위를 위해서 위선이나 가면 persona 이 필요하다하는데, 이 위선의 가면을 제거한다 해서 훌륭한 인간성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이 가면 persona을 제거해버리면 사적 영역에 쌓아 두어야 할 폭력성, 지배욕, 성욕같은 것들이 비어져 나올 뿐이다. 즉 이를 해방시켜 정치의 앞 무대로 끌어올리면 프랑스 혁명처럼 폭력만 남게 된다고 한다.
아렌트에게는 ‘가면’이야말로 인격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보다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을 ‘인간의 조건’으로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아렌트에게는 ‘겉으로 내보이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인간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아렌트에게 행위=연기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행동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합치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나타남=등장=겉으로 보임=가상appearance’에 일관성이 있고, 다른 시민들이 그것을 인정해주는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마음속으로 ‘착한 사람’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착한 시민’이라는 역할을 공중의 눈 앞에서 연기해 낼 수 있는가 아닌가가 문제다.”(165)
아렌트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다. 이 책의 저자도 지적하는 것처럼, “한나 아렌트를 따라가며 사고를 전개하다 보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녀가 『인간의 조건』에서 재발견한 의미의 인간성을 획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현대사회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완전히 벗어나 모든 시민이 대등한 입장에서 스스로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적 영역’ 따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한나 아렌트의 공공성론이 지닌 한계라고 비판하는 정치사상 및 사회사상 연구자도 적지 않다.”(131)며 비판한다.
나는 아렌트에게 얼마간의 근본주의적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인간과 세상을 단순하게 일반화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는 그의 깊이를 좋아한다. 철저히 사고하는 그의 태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렌트의 주장만을 본다면 그만큼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도 없다. 그런데 그 주장에 닿기까지 그의 사고과정은 엄청 길고 깊다. 아렌트는 우리가 쉽게 단정하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며, 사고의 깊이를 단련시킨다. 무엇이든 쉽게 생각하지 않아서 어려운 아렌트를, 이만큼 쉽게 설명한 책도 없을 텐데, 그런 아렌트를 쉽게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야말로 아렌트를 배반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렌트에 대한 훌륭한 정리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