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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평점 :
가마솥더위다. 그래서 올빼미처럼 밤에만 움직이고 낮에는 그늘 속에 숨는다. 더위를 피해 하릴없는 사람처럼 책으로 시간을 죽인다. 이 순간도 시간은 가까스로 넘어가는 책장처럼 더디게 가지만, 그러다 보면 여름도 가을 앞에 무릎을 꿇겠지. 은희경 소설< 태연함 인생>은 사흘에 걸쳐 읽었다. 이 책이 내게는 그녀 작품 중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 책인가 그렇다.
아직 그녀 책을 다 읽어 보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읽은 책에 대해 말하면 촌스럽게도 '좋다' 다. 그 이유는 문장이 섬세하지만 중언부언하지 않고 깔끔하다. 특히 소설 속 인물 묘사가 그렇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정확히 이해시킨다. 이 책에서는 인간에 대한 삶, 사랑, 고독을 표현하는데 그 안으로 빠져들게 하면서도 결국엔 밖으로 나와 내면을 보게 만든다.
사랑하면 뼛속까지 더 외롭고 고통이라는 말의 무게를 어느 정도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그렇잖아도 책 읽는 속도가 느린데 밑줄 긋듯 포스트잇을 붙여 가며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중국식 룰렛>을 다 보게 되면 '좋다'라는 말 앞에 '참'이라는 명사를 붙여 주지 않을까.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원피스와 흰 스웨터 차림이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다. 옆구리에는 책과 노트를 끼고 있었다. 속눈썹이 긴 그녀의 눈은 꿈꾸듯 먼 허공을 보았고 입술은 장미 꽃잎처럼 윤기가 흘렀다. 상아로 깎은 듯한 턱이 살짝 위로 들려서 목선을 한층 우아하게 만들어 주었다.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말을 할 때마다 그 위로 검은 단발머리가 조금씩 출렁거렸다. 그녀는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그녀는 밤색 구두의 앞부리를 들고 굽으로 톡톡 쳤다." (8~9쪽)
"그 침전물이 고통이 아니라 고독이었다는 걸 류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난한 유학생이 외국인의 입주 가정부가 되어서 창 밖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어떤 여름 오후. 스러지는 햇빛 아래 나무의 긴 그림자가 마치 자신의 인생의 퇴락처럼 힘겹게 빛과 모양을 유지하려 애쓰며 바래가던 날, 어머니는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상실의 세계를 보아버렸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틀을 지켜야 하고 더 이상 동의하지 않게 된 이데올로기에 묵묵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세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와서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72쪽)
"모든 매혹은 고독의 그림자를 감추고 있다.(73쪽)
"고통은 관계의 고독이고 고독은 개인됨의 고통이다."(77쪽)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을 때는 최상의 결과를 얻는 건 포기해야 한다. 무난한 걸 택하는 게 그나마 최악으로 가지 않는 방법이다."(81쪽)
"데이트하는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각기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듣고 스마트폰의 앱을 뒤적였다. 따로 노는 것 같지만 애인을 다른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혼자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러웠다. 공부를 하든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든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와 달라서 분명 혼자는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지만 독립적이었다. 심심할 수 있지만 고독해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각자 눈에 보이지 않는 부스 안에 들어가서 비용을 지불하고 그 대가로 고독에 대한 통각을 차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90쪽)
"지식인으로서는 정의로운 사람도 정서적으로는 편견투성이였으며 평등을 주장하지만 아는 사람들과 평등해지기 싫어했다. 많은 기자들은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사례만으로 자신의 편견을 일반화할 뿐이지만 전문가들은 더 나아가 거기에서 규칙을 발견해내서 자신의 신념체계로 대중을 속이기를 좋아했다." (143쪽)
"사랑이 식은 것은 반복되는 관계속에서 상대가 고유성을 잃고 다른 누구와 다를 것 없는 덤덤한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161쪽)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265)쪽
사랑이 식은 것은 반복되는 관계속에서 상대가 고유성을 잃고 다른 누구와 다를 것 없는 덤덤한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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