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살쯤 됐을까. 앙증맞은 저고리 빨간 치마에 검정 고무신을 신은 아이가 호박넝쿨에 달린 호박을 움켜 쥐고 있다.
아이를 따라 나온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반기듯 정면을 보고 있는데
머리 큰 아이의 시선은 뚱한 표정으로 다른 어딘가를 보고 있다.
책은 윤석중 시에 이영경 작가가 그린 그림으로 펴낸 시그림책 <넉점반.창비>의 표지그림이다.
그림책은 시에 등장하는 아이처럼 작은 판형이다.
전체적인 색감도 햇빛에 바래거나 아주 오래된 듯한 색감이어서 쿰쿰한 책내가 날 것 같다.
귀여운 아이의 뚱한 시선은 바로 구복상회를 보고 있었던 것.
엄마가 몇 시인지 알아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영감님 영감님/엄마가 시방/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그림속 구멍가게 풍경이 정겹다.
당시에도 있는 집 아이들이나 먹었던 최고의 영양제 '원기소 '광고지, 미원', 유리병속 박하사탕, 라면, 성냥곽,....
고무신 한 짝이 벗겨진 채 할아버지 방을 들여다보고있는 아이.
"넉 점 반/넉 점 반."을 외우며 나오다
물 먹는 닭 한 참 서서 구경하고
집하고는 반대로 개미를 따라가면서도 아이는 "넉 점 반, 넉 점 반"
지렁이를 물고 가는 개미들에 정신이 팔려 해찰하는 아이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넉점 반.넉 점 반" 하며 잠자리 따라 다니다
분꽃도 따고 ,...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의 표정은 같지만 구경하는 것마다 호기심이 가득하다.
게 아이가 심부름 갔던 구복상회는 바로 옆집이다.
아이는 그 가까운 거리를 곧장 오지 않고 온갖 해찰을 다 하고 돌아오니 강아지가 대문밖으로 마중 나오고
날이 어둑해져 가로등이 환하게 켜 져 있다.
구복상회 할아버지는 더운지 부채 들고 쉬면서 "아니. 저 녀석이 왜,..." 안경너머 떼꾼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엄마, 시방이 넉 점 반이래."
'시방' 의미를 모르는 아이는 아주 당당하게 엄마한테 얘기하고 방안 언니 오빠들은 저녁을 먹고 있다.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의 눈짓이 뾰루퉁해져선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니? 라고 하는 것만 같다.
"넉 점 반"은 네시 반을 뜻한다. 시계가 귀했던 시절 그림속 구복상회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80년대인가 티비 프로그램에서 "그때를 아십니까"가 방송됐었다. 그때 비춰주던 60~70년대 흑백사진 속 풍경들이 구복상회 자자분한 그림과 겹쳐 되살아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고 온 듯하니 나이들었다는 게 실감난다.
이 시는 윤석중 시인이 1940년 스물 아홉살 때 쓴 시라고 한다. 어렸을 적 바쁜 엄마를 대신해 가게 심부름을 가곤 했었다. 새참으로 삶아낼 국수를 사러 가거나 양은 주전자를 들고 동네 가겟집으로 막걸리 받으러 가곤 했다. 주인은 틉틉한 막걸리를 주전자 가득 담아 줘 걸을 때마다 출렁거려 넘치곤 했다. 때론 무겁고 더워서 겁도 없이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셨던 일도 생각난다.
심부름 하면 자연스레 떠오는 게 딴짓, 해찰이다. 그림속 아이처럼 옆길로 새 자기가 보고 싶은 걸 실컷 보고 경험하며 아이들을 단단하게 성장하게끔 한다. 어쩌면 그 시간이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누리게 하면서 동시에 행복감을 맛보게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