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깻잎을 묶으며

 

             유홍준 시인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 웃음 날려 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 숨 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 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맞다맞어,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거푸거푸 웃음을 날린다

말 안해도 뻔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쌀밥에 시퍼펀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 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엔 흰구름이 몇 덩이 머물다 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한나절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는, 이 얼마 만의 기쁨

시집<2004 좋은시>.206쪽의 詩

<마음대로 詩 해독解讀> ​신은 세상을 다 돌아볼 수 없어 집집마다 어머니를 보냈다는 말이 있다. 이 시를 보면 어머니가 계시기때문에 고향도 존재한다. 어머니가 가꾼 들깨밭에 형제들이 모여 깻잎을 따는 풍경이 동화같다. 깻잎을 켜켜이 바구니에 따 담으며 돈이었으면 좋겠다는 행간에서 가난이 읽혀 짠하다.

그러면서도 평화로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머니의 들깨밭에서 어린것들이 뛰어다니다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고 오랜만에 환하게 웃는 아내를 보는 화자의 마음은 어머니의 영토안에 들어와 있는 편안함이 엿보인다.

들여볼수록 애잔해지는 풍경은 마치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둘레둘레 앉은 자식들이 밥을 먹는 것 같다.​ 앞으로 이런 풍경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 어머니가 늙어 가고 땅도 묵정밭이 돼가는 더 이상 차려낼 수 없는 따끈한 밥상앞에 도란도란 모일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일까. 이 시는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